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6화 (117/261)

#116화.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

요즘 한창 캐스팅이 잘되는 젊은 신인 배우 임준학.

그의 비밀은 조만간 터진다.

내가 본 미래에서는 그 비밀이 천재용이 아니라 다른 중소 인터넷 연예지에서 특종으로 보도된다.

임준학은 재계 서열 오 위 안에 드는 대광그룹의 숨겨진 막내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진설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여배우 설미영.

설미영은 한창 활동하던 중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지금까지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한 소문이 따라붙었고 그중에서는 설미영이 대광그룹 사장과 비밀 결혼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대광그룹 사장 임영식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기에 소문의 파장은 컸다.

하지만 설미영이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소문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고 루머도 과거의 일이 돼 버렸다.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설미영과 임영식의 아들인 임준학이 그룹의 지원을 받으며 연예인으로 데뷔하면서부터 다시 소문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광그룹이 막내아들을 너무 밀어준 탓이다.

데뷔한 지 일 년도 안 된 검증되지 않은 신인이 대작의 주연으로 턱턱 캐스팅되니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준학을 털었던 중소 연예지는 대광그룹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던 거로 기억한다.

대광그룹에서 대형 로펌을 끼고 소송을 걸었고 회사는 얼마 안 가 파산했다.

나는 영상 속에서 웃고 있는 천재용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렸어.

조만간 고소장을 받게 될 거야.

노트북을 닫은 나는 곧바로 레전드 필름에 전화를 걸었다.

“박 팀장님. 접니다.”

[원세강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아까 오전에 미팅했잖아요.]

“우리 오디션이요. 그거 오디션 볼 사람은 다 추려진 거죠?”

[그럼요. 이미 다음 주에 오디션 볼 거라고 전화 연락 돌렸어요.]

“혹시 독설피디라는 인터넷 미튜버가 올린 영상 보셨나요?”

[난 보지는 못했고 팀원이 이야기해 줘서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에 임준학이라는 배우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거기 대표가 진설 대표님을 따로 만나 뵙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나요?”

[오디션 접수가 끝났으니 스타탄생에 연락해 보라고 하고 회사 전화번호를 가르쳐 줬습니다. 뭔가 엮이면 안 될 거 같다는 촉이 들어서요. 대표가 조금 이상해요.]

“잘하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상한 소문이 도는데 굳이 빌미를 제공해 줄 필요는 없죠. 우리 확실하게 정리할 겸 오디션 일정을 조금 당길 수 있을까요?”

[얼마나 당기길 원하시는데요?]

“최대한 빨리요. 임준학이 없는 상태에서 오디션을 보고 그걸 기사로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 줄 만큼.”

[좋아요. 오디션 준비는 끝났으니 일정 조정 가능할 겁니다.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박 팀장님.”

내가 박진숙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회사 전화가 울렸다.

설마? 벌써 전화를 한 건가?

나는 목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설기획 대표 박동식입니다.]

박동식이란 이름을 듣자 나는 뭔가 떠올랐다.

설미영의 조카가 임준학 기획사 사장이었지.

“박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를 주신 건가요?”

[혹시 설기획을 아십니까?]

“임준학 배우님이 설기획 소속이 아닌가요?”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대화가 조금 편해지겠군요. 우리 준학이가 레전드 필름의 신작에 관심이 있어서요.]

“관심이 있다고요?”

[예. 그래서 레전드 필름에 전화를 해 봤더니 오디션을 보라고 하더군요. 하하하.]

“왜 그렇게 웃으시죠?”

[제가 돌아가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저희 측에서 영화의 투자자를 물어 왔습니다. 다른 투자자는 필요 없을 만큼 대단한 분들이죠. 우리 준학이랑 계약하시죠?]

“저희는 오디션으로 남주를 뽑겠다고 이미 기사를 냈습니다.”

[우리 선수끼리 이러지 맙시다. 어차피 오디션은 영화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박동식의 말을 들은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대광그룹을 믿고 까부는 건가?

너무 막 나가는데?

그때 이 층으로 이선아 씨가 올라왔다.

그녀는 내가 전화 통화하는 걸 확인하고 내 책상 위에 조용히 팩스를 올려놓고 나갔다.

팩스는 설기획에서 우리 측에 보내온 투자 관련 서류였다.

입이 떡하고 벌어지는 투자금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신인인 임준학이 대작에 턱턱 캐스팅됐던 게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나 보다.

[원 대표님. 저희가 보낸 팩스를 보고 계신 모양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뇨. 회사 팩스가 고장 나서요. 뭘 보내셨나 봐요.”

박동식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럼, 대표님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 주시죠. 바로 투자사에 대한 서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원래대로 오디션으로 남주를 뽑을 예정입니다. 임준학 씨도 참가하고 싶다면 오디션 신청 서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방동식이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대화를 마친 박동식이 입을 열었다.

[오디션이라면 저희 배우님이 질색하셔서요. 안타깝네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다면 함께하시죠.”

[그러죠.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박동식이 보내온 팩스에서 로열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 회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대광그룹이 운영하는 투자 회사인가?

아니면 설미영?

내가 알기로 임준학 측은 캐스팅을 위해 다른 투자 회사도 쳐 낼 만큼 힘이 세다고 한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걸 파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가 금쪽같은데 이런 걸 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방금 닫았던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던 천재용의 미튜브 채널이 떠 있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천재용은 기레기 중에서도 원 톱이었다.

지금은 이빨이 빠졌다지만 여전히 독기가 차 있다.

미튜브를 등에 업고 날뛰는 기레기와 뒷배경이 든든한 건드릴 수 없는 스타.

누가 이길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 * *

오디션장에 최병철 감독, 윤서혁 감독 그리고 박진숙 팀장이 함께 앉아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톱스타들도 구원의 밤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진설은 무조건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기준을 정했고 그래서 오늘 오디션에는 오랜만에 오디션을 보는 톱스타들도 함께한다.

한류스타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 송진석이 오디션을 마치고 나가자 윤서혁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와. 송진석도 연기를 너무 잘하는데요?”

박진숙이 윤서혁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송진석이면 원래도 연기파로 유명했습니다. 연기도 잘하는데 인기까지 있는 톱 중의 톱이죠.”

“그러네요. 와. 사람이 다 가졌어요.”

그때 최병철이 윤서혁과 박진숙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연기를 잘하지만, 이정수와는 이미지가 맞지 않아. 특히 나이가 너무 많아.”

박진숙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병철 감독의 말에 수긍했다.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송진석이 다섯 살만 더 젊었더라도 송진석을 캐스팅했을 텐데 안타깝네요.”

“다섯 살도 무리수야. 난 요즘 나이 많은 배우들이 열 살 스무 살 차이 나는 역을 맡는 거 너무 이상하더라. 제 나이에 맞는 역을 해야지.”

“그건 그렇죠. 우리는 나이대에 맞게 캐스팅해요. 최 감독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참가자가 호명됐다.

“다음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의외의 인물이 오디션장에 들어왔다.

박선호의 등장에 윤서혁이 깜짝 놀랐다.

훈남과의 서글서글한 얼굴의 소유자인 박선호는 오늘 오디션을 볼 캐릭터와 맞게 꾸미고 나타났다.

경찰이지만 묘하게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정수 역을 맡기 위해 그는 앞머리를 내리고 눈빛을 교묘하게 가렸다.

옷은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었는데 단정한 그답지 않게 셔츠 단추를 반이나 잠그지 않았다.

박선호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박선호입니다.”

목소리 톤까지 바꿔 온 박선호는 예민해 보이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남자 같았다.

놀란 윤서혁이 물었다.

“박선호 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요.”

최병철은 박선호의 원래 이미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의 분위기가 작품 속 이정수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담은 그만하고 바로 연기를 시작해 볼까요?”

최병철의 말에 들떠 있던 윤서혁이 바로 입을 닫았다.

박선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떴을 때 그는 구원의 밤에 나오는 이정수가 되어 있었다.

박선호의 연기를 지켜보던 오디션장의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

‘찾았다. 저 사람이 이정수다.’

* * *

오늘은 레전드 필름이 있는 충무로의 유명 고깃집을 빌려서 회식을 한다.

나는 윤서혁 감독의 곁에 앉았고 저 멀리 가운데 테이블에는 최병철 감독과 주연인 심석현이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박선호는 오디션에서 캐스팅되자마자 회식 자리에 불려 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조연으로 출연하는 배우가 술병을 들고 말했다.

“윤 감독님.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그럴까요?”

배우가 능숙한 솜씨로 윤서혁의 술잔에 맥주를 가득 따랐다.

한두 번 따라본 솜씨가 아니었다.

거품의 비율이 훌륭했다.

“대표님께도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난 약을 먹고 있어서요. 술은 마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양하자 조연 배우는 재빠르게 종업원을 불러 나를 위해 사이다를 시켰다.

조연 배우는 이후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레전드 필름의 직원들과 친해졌다.

그에 비해 박선호는 원래 말이 없는 성격인지 조용히 고기만 굽고 있었다.

스타메이커에서 만나 친해진 윤호상 매니저가 우리 자리로 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선호의 매니저인 윤호상입니다. 원세강 대표님.”

“왜 이래요. 우리 스타메이커에서 만났잖아요.”

“하하. 그래도 대표님 대 매니저로 만나는 거라서 어색하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다 어색하네요.”

윤호상은 박선호가 멀뚱멀뚱 앉아만 있는거 같아서 보다 못해 지원 사격을 나온 듯싶었다.

윤호상은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원 대표님. 요즘 살맛 나시죠?”

“그건 윤 매니저님도 마찬가지 시잖아요.”

“하하. 그렇죠. 그런데 요즘 힘듭니다. 사실 저는 멜로 드라마 남주를 밀었는데 우리 선호가 제 말은 듣질 않습니다.”

“박선호 씨는 연기만 파는 스타일입니다. 차라리 잘된 거라고 생각하세요. 어설프게 멜로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우리 작품이 훨씬 박선호 씨에게 좋을 겁니다.”

“원 대표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윤호상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서이렌 씨는 오늘 안 오시나요? 제가 서이렌 씨 팬이라서 오늘만 기다렸습니다.”

“CF 촬영이 있는데 조금 늦어지나 봅니다.”

“그렇구나. 무슨 CF인데요?”

“샴푸 CF요.”

“와. 부럽네요. 우리 선호는 들어오는 CF도 하나도 안 찍겠다네요. 제가 속이 타들어 갑니다.”

“이미지에 안 맞아서 그렇겠죠.”

“그건 맞습니다. 우리 선호랑 안 맞긴 했어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원래 자리의 주인인 조연 배우가 돌아왔다.

윤호상은 자리를 넘기고 그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서이렌이 장우재와 함께 고깃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늦어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온 건지 서이렌은 CF 촬영장에서 세팅한 머리와 화장을 한 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서이렌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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