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5화 (116/261)

#115화. 복사도(3)

서이렌은 지금까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고도 뻔뻔하게 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서이렌은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월에 부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서이렌의 모습을 보며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양장점에 불이 났다고 생각한 나는 어머니가 제일 귀하게 여기시는 세 가지를 양장점 바깥에 꺼내 놨다.

어머니의 재봉틀, 텔레비전 그리고 마네킹이었다.

작은 몸으로 그 무거운 것들을 낑낑대며 옮겼던 나는 마네킹을 끝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시고 깜짝 놀라셨더랬다.

“에구머니나. 이게 웬일이야. 쑥 태우던 걸 깜박하고 나갔었네.”

“뭐 하는 거야? 빨리 들어가 봐.”

아주머니들이 놀라서 배추를 내동댕이치고 양장점으로 들어가셨고 어머니는 내게 달려오셨다.

“세강아. 괜찮아?”

“엄마. 콜록. 콜록.”

“다친 데는 없어? 엄마를 부르지 그랬어? 엄마 핸드폰 챙겨서 나갔는데.”

나는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 배터리가 없어.”

“정말 괜찮은 거지? 세강아?”

“불이 난 줄 알았어. 엄마. 나 깜짝 놀랐어.”

“아이고. 그러게, 양장점에서 무슨 쑥 찜질이냐고 그랬는데. 다음부터는 내가 못 하게 시킬게.”

어머니는 내가 옮긴 재봉틀과 텔레비전 그리고 마네킹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불이 난 줄 알고 이걸 다 옮긴 거야?”

“응. 엄마.”

“이걸 어떻게 다 옮겼대? 너 힘도 없잖아.”

“아냐. 나 이제 힘세.”

“그래. 이걸 다 옮긴 걸 보니 우리 세강이가 정말 힘이 세졌구나. 엄마보다 센 거 같다.”

나는 엄마의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타던 쑥을 정리한 아주머니들이 재봉틀과 텔레비전을 들고 양장점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바닥에 누워 있는 마네킹을 자리에 세워 놓고 말했다.

“세강아. 이건 왜 가져 왔어?”

“그거?”

나는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그거 엄마가 좋아하는 거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엄마가 ‘네가 더 좋아하지 않아?’라고 되물으실 것만 같았다.

나는 얼굴이 빨개진 채 대충 둘러댔다.

“그거 비싼 거라며? 불이 난 명품 판매장에서 가져온 거.”

“그래?”

“화재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또 불이 나면 마네킹도 무서웠을 거야.”

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웃으며 나를 꼭 안아 주셨다.

“그래. 잘했어. 마네킹도 무서웠을 거야. 잘했어. 세강아.”

어머니 품에 안긴 나는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마네킹을 바라봤다.

마네킹은 언제나 같은 포즈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왠지 그녀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거 같았다.

* * *

회상을 마친 나는 서이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렌 씨. 가요.”

“예? 벌써요? 이렇게 분위기가 좋은데?”

“분위기는 무슨. 추워요. 갑시다.”

서이렌이 입술을 쭉 하고 내밀었다.

마치 오리입술 같아서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빨리 내려갑시다. 사람들이 기다리겠어요.”

내가 가려고 하자 서이렌이 놀라 외쳤다.

“달빛이 내리는 이 야심한 밤에. 주위에 아무도 없고. 우리 둘밖에 없는데! 이대로 가는 거예요?”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이러다가 우리가 꼴찌 합니다.”

서이렌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나를 거칠게 떠밀었다.

“그래요. 가요. 갑시다. 이럴 거면 우리 달려가죠? 일등 해야 하잖아요.”

“밤길이 어두워요. 그냥 천천히 걸어갑시다.”

서이렌이 삐진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여신이라 불리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그녀가 야밤에 나 때문에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미안했다.

대체 내가 뭐라고.

나는 터벅터벅 걸어오는 서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잡아 줄게요. 자요.”

내 손을 보자마자 축 처졌던 그녀의 어깨가 솟구쳤다.

그녀는 내가 번복하기 전에 재빨리 내 손을 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던 서이렌이 황급히 그것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항상 생각하는 건데. 대표님은 손이 차가워요.”

“맞아요. 난 몸이 대체로 차가워요. 예전에는 친구들이 나를 냉장고라고 부르면서 더운 여름에는 내 팔을 만지고들 그랬어요.”

“오. 그거 좋은데요? 그럼, 나도 이제 대표님 냉장고를 자주 이용해야겠어요.”

“안 되는 거 알죠? 지금 복사도니까 내가 이렇게 손을 내주는 거예요. 밤길이라 위험하기도 하고요.”

어두워서 서이렌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입술을 쭉 내밀고 구시렁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스캔들 같은 거 나면 안 되는 거 알죠?”

“알아요. 그만 말해요.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그리고 대표님은 지금 우연미 작가님이랑 스캔들이 난 사이잖아요.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는다고요.”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에게 변명을 늘어놨다.

“우연미 작가님과 제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알죠?”

내가 뱉어 놓고도 너무 급하게 말한 거 같아서 민망했다.

서이렌은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알죠. 우 작가님 진짜 남친은 나도 봤거든요.”

“하긴 그렇겠네요.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걷다 보니 어느덧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서이렌은 잡은 손을 빼기 아쉬운지 천천히 걸었다.

나도 그녀의 걸음에 발맞춰서 보폭을 줄었다.

“이렌 씨. 만약에 우리가 스캔들이 나면 난 죽을 수도 있어요.”

죽는다는 말에 서이렌이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표님이 왜 죽어요? 그럴 일 없으니까 그런 소리 말아요.”

“내가 대체 왜 죽겠어요? 이렌 씨 팬들이 나를 죽이려고 들 거라고요.”

“아니에요. 우리 팬들이 얼마나 착한데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요.”

“그럴까요? 아닐걸요? 내가 서른일곱 살이고 이렌 씨는 스물세 살이에요. 열네 살 차이라고요. 아마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겁니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서이렌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왜 그래요? 이렌 씨?”

“대표님.”

“말해요. 왜요?”

“사실 내가 대표님보다 나이가 많은 건 알고 계시죠……? 그렇지, 세강아?”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서이렌이 내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서이렌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나이가 열네 살 차이라고? 내가 너무 어려서 세강이 네가 사람들한테 욕먹을 거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너 그렇게 쫄아 있으면 내가 기자회견 열어서 다 불 거야. 원래 내 나이를 공개할 거라고. 알았어?”

“…….”

나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서이렌은 그제야 표정을 풀더니 내게 미소를 보였다.

“대표님. 우리 빨리 가요. 어디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나네요. 우리 몰래 라면 먹나 봐요.”

“아……. 예.”

서이렌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손을 이끌고 달렸다.

나는 서이렌의 손에 이끌려 달리며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나. 너무 빨라. 조금만 천천히…….’

* * *

복사도에서 돌아와 보니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소속 배우와 챙길 작가, 감독이 늘어나고 레전드 필름의 일이 겹치면서 사람이 필요했다.

오늘은 이 바닥에서 실력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매니저를 영입하는 날이다.

한참 일을 보고 있는데 강진석이 누군가를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갔다.

“서 매니저님.”

서유림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지난번 스타메이커 회식 때 보고 오랜만에 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잘 못 지냈는데 이제는 잘 지내 보려고요.”

서유림이 유스케이에서 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지난주였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서유림에게 연락했다.

나는 그녀에게 함께 일해 보자고 말했고, 서유림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내 제의를 수락했다.

“고마워요. 서 매니저님이 함께해 주신다고 생각하니 너무 든든합니다.”

“저야말로 원 대표님이 권유해 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사표를 내던지긴 했는데 사실은 이 일이 너무 좋거든요.”

밝게 웃는 서유림을 보니 안심이 됐다.

강진석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더니 말했다.

“자자. 인사는 이만하고 서 매니저 그만 나갑시다. 윤이슬 배우 촬영장에 가 봐야 해요. 거기가 위치가 애매해서 지금 안 나가면 차가 막혀요.”

“예. 강 이사님.”

서유림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만간 서유림 씨 입사 축하 겸해서 회식 자리를 만들어 볼게요.”

“나야. 좋지. 회식은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형님을 위한 회식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

나는 서유림과 강 이사가 나가는 걸 배웅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내 책상 앞에서는 레전드 필름과의 합병 서류가 쌓여 있었다.

나는 레전드 필름이란 이름은 그대로 유지하고 경영권만 인계받기로 했다.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레전드 필름의 이름을 버릴 수는 없었다.

길고 긴 설득 끝에 진설과 박찬영 감독도 레전드 필름의 공동 대표로 계속 남게 됐다.

그때 책상 위에 둔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윤서혁 감독이었다.

“감독님.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세요?”

[원 대표님. 저희 캐스팅 말입니다.]

구원의 밤은 서브 남주를 제외하고는 모든 캐스팅을 마쳤다.

여주는 이미 보도된 대로 서이렌이며 남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인 심석현이다.

서브 남주는 서이렌을 도와주는 풋내기 경찰로 이십 대를 캐스팅해야 한다.

레전드 필름에서 서브 남주는 오디션을 보겠다고 선포했고 조만간 오디션이 열린다.

레전드 필름이 내놓는 오 년 만의 신작.

거장 최병철 감독의 은퇴작.

나비와 두 여자를 성공시킨 서이렌의 차기작.

스타탄생의 첫 제작 영화.

여러 가지가 합쳐서 구원의 밤에 대한 기대감이 늘어만 갔고 오디션 지원 서류도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음 주가 오디션인데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저도 친구한테 방금 들은 건데요. 인터넷에 이상한 영상이 떴다고 해서요.]

“인터넷에요? 혹시 구원의 밤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입니까?”

[미튜브에 독설피디라는 채널이 있나 봐요. 거기에 뜬 영상이라는데요.]

독설피디.

천재용인가?

“제가 지금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는 예정대로 다음 주에 오디션을 볼 겁니다.”

[예. 그럼, 대표님만 믿고 전화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미튜브 앱으로 들어갔다.

지난번에 천재용 채널의 영상을 한번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메인 화면에 천재용이 올린 새 동영상이 떠 있었다.

“망할 알고리즘 같으니라고.”

나는 모자이크 범벅에 화면 가득 자극적인 글씨로 채워진 영상의 제목을 확인했다.

[진설의 새 영화 오디션. 그러나 주인공은 이미 내정???]

제목은 그러려니 했지만, 섬네일에 채워진 글귀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엄마 빽으로 승승장구하는 톱스타. 이번에도 캐스팅 완료]

영상을 클릭하자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오는 천재용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빠르게 보기 위해 2배속으로 빠르기를 조정했다.

예전보다 살이 엄청나게 찐 천재용이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목소리로 구원의 밤 오디션 소식을 소개했다.

“아무리 서브라지만 이 중요한 영화의 주연급을 오디션으로 뽑는다고 하네요. 웃기지 않습니까?”

자료 화면 구석에 천재용이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자료 화면 속의 남자가 익숙한 얼굴이다.

“말로는 오디션이라는데 사실 우리는 다 알죠. 이미 남주가 내정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임준학. 대단하네요. 대체 빽이 어떻길래 이렇게 대작에만 덥석덥석 캐스팅되는 걸까요?”

최근에 임준학에 대한 영상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천재용은 이번에도 임준학을 물어뜯고 있었다.

“제가 입수한 정보로는 임준학의 어머니가 은퇴한 여배우라고 합니다. 이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영상을 내리니 지저분한 댓글이 보였다.

- 임준학이 진설 아들인가?

- 나이대 정확하게 일치하네. 미친.

- 독설피디 이번에도 대박 터트렸네. ㅋㅋ

- 진설도 나이 먹더니 노망났나 봐.

- 어쩐지 임준학 캐스팅 잘되는 게 신기했는데.

나는 댓글이 꼴 보기 싫어서 바로 영상을 껐다.

천재용이 입수한 정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임준학이 은퇴한 여배우의 숨겨진 아들이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진설은 아니다.

천재용은 결국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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