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복사도(2)
“뭐라고? 리얼리티?”
“예. 리얼리티요. 스타탄생 엠티를 예능으로 만드는 겁니다.”
강진석이 혹하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윤 감독은 어떻게 생각해?”
윤서혁도 구미가 당기는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저는 예능은 잘 모르지만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제가 찍었지만, 오늘 재미있는 게 많이 찍혔거든요.”
“그렇죠? 아무런 계획 없이 왔는데 그냥 우리끼리 뭉쳐만 있어도 신기하게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네요.”
“캐릭터가 겹치지 않고 다양하잖아요.”
윤서혁의 말대로 스타탄생 식구들은 각자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뭐든 잘하는 만능 재주꾼 서이렌.
일머리는 없는데 힘쓰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윤이슬.
요리조리 다니면서 없던 일도 만들어 내는 날쌘돌이 이락.
틈만 나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그 자리에서 뭔가를 적는 우연미.
이미 예능에서 한번 이슈가 된 적 있는 강진석의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고작 하루 만에 각자의 캐릭터를 알 수 있는 영상이 쭉쭉 뽑혀 나왔다.
영상을 보고 있던 스타탄생 식구들도 어느새 우리 곁에 몰려와 있었다.
다들 신기한 얼굴로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우선 이 영상은 편집해서 스타탄생 공계에 시리즈로 올립시다. 반응이 괜찮다 싶으면 정식으로 스타탄생 엠티 기획안을 만들어서 방송국과 컨택하고요. 어떤가요?”
빈선예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그럼, 스태프들도 나오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배우 위주로 편집할게요. 대신 강 이사님은 나올 겁니다. 괜찮죠? 어차피 예능에 많이 출연해 보셨잖습니까?”
“나를 물고 늘어지네. 그럼, 대표인 너도 출연하는 거다. 나는 이제 한물간 사람이고 대세는 너잖아.”
강진석이 물귀신처럼 나를 물고 늘어졌다.
배우들 위주로 편집한다는 말에 스태프들은 일단 안심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눈치를 살피던 장우재 로드매니저가 손을 들며 말했다.
“저는 나오고 싶습니다.”
강진석이 되려 놀라 물었다.
“야. 뭐냐? 너도 스타 매니저가 되고 싶은 거냐?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저도 웃기는 거로는 지지 않습니다. 강 이사님보다 재미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까?”
장우재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강 이사님은 사실 몸으로 웃기는 거지. 위트가 있지는 않잖아요. 로드 장이 훨씬 웃겨요.”
빈선예의 말에 당황한 강진석이 그녀에게 눈빛을 쐈다.
“로드 장은 또 뭐야?”
“장우재 매니저님 별명이잖아요. 모르셨어요?”
장우재의 별명을 들은 스타탄생 식구들이 한바탕 박장대소했다.
* * *
저녁을 먹고 난 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었다.
위성 텔레비전을 달아 놔서 그런지 집에서 보는 것처럼 채널이 많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던 서이렌이 리모컨을 내려놨다.
영화 채널에서 공포 영화의 오프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자와 술을 먹으며 수다를 떨던 우리는 갑자기 들리는 스산한 음악에 놀라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악마의 집이다!”
“어휴. 여름도 아닌데 무슨 공포 영화야?”
우연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서리를 치자 윤서혁이 말했다.
“저건 구십 년대에 나온 공포 영화잖아요. 클래식이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데 갑자기 방의 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누구야? 누가 불 껐어?”
“이락 너지? 너 나한테 죽는다.”
“빈 팀장님. 저 아니에요.”
한바탕 야단법석이 있고 난 뒤, 불이 켜졌다.
“클래식 운운하던 윤 감독 좀 봐요. 놀라서 마시던 맥주캔 엎었어요. 크큭.”
이 장난을 친 사람은 다름 아닌 서이렌이었다.
“이렌 씨. 장난치지 말아요. 나 진짜 무서워서 혼났어요.”
모두 안도하는데 서이렌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담력 테스트를 해 볼까요?”
“담력 테스트?”
“오늘 보니까 섬 꼭대기에 있는 나무에 사람들이 소원을 빌어서 걸어 놨잖아요.”
복사도 섬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소원을 적은 손수건을 걸어 놔서 멀리서 봐도 알록달록 예뻤다.
사람들은 관심이 생기는지 서이렌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우리 두 사람씩 편짜고 산에 다녀오는 거예요. 가서 나무에 우리 소원이 적힌 손수건을 매달고 내려오는 거죠.”
“진짜 담력 테스트네.”
“제일 빨리 다녀온 팀이 우승. 어때요? 재미있겠죠?”
서이렌의 제안에 사람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나는 짓궂은 얼굴로 웃는 서이렌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거 진짜 하고 싶었나 보다.
앞으로 엠티를 자주 와야겠네.
서이렌은 어느새 보자기를 들고 우리에게 내밀었다.
“제가 여기에 번호표 적어 놨어요. 같은 번호를 고르면 같은 팀이에요. 빨리 뽑으세요.”
“뭐예요? 벌써 준비한 건가요?”
서이렌이 내미는 보자기 속으로 사람들이 손이 왔다 갔다 했다.
모두 종이를 뽑았고 서이렌은 마지막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보자기에 손을 집어넣고 자신의 번호를 뽑은 서이렌이 남은 번호라며 내게 종이를 건넸다.
내가 손을 내밀자 서이렌이 내 손바닥 위에 남은 종이를 떨궈 놓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왜 저러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재빨리 종이를 펼쳤다.
7번. 행운의 7번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번호표를 펼치고 짝을 찾아다녔다.
보자기를 구석에 가져다 놓은 서이렌이 나를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걸어왔다.
나는 그런 서이렌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서이렌은 그녀의 손에 든 종이를 내 눈앞에서 펼쳐 보였다.
7번. 나와 같은 7번이다.
당했구나.
나는 서이렌을 보며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뭡니까? 이거 사기 아닌가요?”
서이렌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TOP에서는 밤늦게까지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이자현이 나가면서 TOP 미디어에서 준비하던 영화 기획에 문제가 생겼다.
이자현이 빠지자 몇몇 투자자들은 발을 빼겠다고 했다.
이러다가 영화가 엎어질 수도 있기에 회의실 분위기는 살벌했다.
한지욱은 굳은 얼굴로 눈앞의 사람들의 영양가 없는 회의를 지켜봤다.
록 이사와 진철한 작가는 이자현이 없으면 다른 캐스팅을 하면 된다며 본래 기획안을 밀고 나갔고, 박호중 감독과 박상용 실장은 이자현을 대체할 완벽한 대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획을 수정하거나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계속 똑같은 말이 오가자 결국 한지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지욱이 일어서자 싸우고 있던 록 이사가 그를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한 대표님?”
“대체 언제 끝나는 겁니까? 지금 여덟 시가 넘었어요. 다들 집에는 안 가요?”
“이거 수습하고 가야죠. 아직 해결 난 게 없지 않습니까?”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겁니까? LOK랑 TOP에 이자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 캐스팅해서 원안대로 갑시다.”
“하지만 이자현만 한 레벨의 배우가 없습니다.”
“그럼, 이번 영화를 잘 찍어서 그 배우를 이자현 같은 톱스타로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겠니?’ 록 이사는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한지욱의 얼굴을 보며 꾹 참았다.
“캐스팅은 내가 결정할 테니 오늘 회의는 이만 접읍시다.”
“하지만 아직 논의할 사항이…….”
“그럼, 계속 회의나 하시든가요. 저는 더는 못 있겠네요.”
한지욱이 외투를 들고 문으로 걸어갔다.
모두 똥 씹은 표정으로 퇴근하는 한지욱을 바라봤다.
문을 연 한지욱이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 좀 더 나이스하게 일합시다.”
한지욱이 사라지자 회의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곳에 남은 모두의 얼굴에는 심기 불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 *
“대표님. 같이 가요. 저 무서워요.”
한 손에 손전등을 든 서이렌이 무섭다며 내 곁에 찰싹 붙었다.
“팔에 힘 좀 풀어 봐요. 팔짱 좀 끼게.”
서이렌이 내 옆구리에 손을 욱여넣더니 기어이 팔짱을 꼈다.
나는 이 상황이 우스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 당한 거 맞죠?”
“뭘 당해요?”
“갑자기 담력 테스트하자고 한 거나. 우리 둘이 같은 팀 된 거나. 다 서이렌 씨가 꾸민 일 아닙니까?”
“무슨 소리예요? 전 그런 적이 없어요.”
서이렌은 아니라고 발뺌을 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도 피식 웃어 버리고는 그녀와 함께 산을 올랐다.
그때였다.
나는 길가에 떨어진 메마른 나뭇가지를 밟았고 고요한 밤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큰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고 내 옆에 붙은 서이렌의 팔을 꽉 잡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나는 내가 나뭇가지를 밟아서 낸 소리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서이렌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놓으려고 했는데 서이렌이 놔주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나 무서우니까 이대로 가요.”
“안 무서운 거 다 알아요. 방금도 나만 놀랐잖아요.”
“아닌데요. 나도 놀랐는데요?”
서이렌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를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복사도 자체가 큰 섬이 아니라 섬 꼭대기까지 십 분 만에 도착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해안가와 섬의 중턱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깊이를 알 수 없게 새카맸지만, 마을은 불빛이 반짝거리며 정다운 느낌을 줬다.
서이렌은 소나무 아래로 가서 그곳에 매달린 손수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어요?”
“사람들의 소원을 보고 있었어요. 이것 봐요. 이 소원은 귀엽죠?”
서이렌이 길게 매달린 손수건의 한 귀퉁이를 내게 보여 줬다.
[용석이와 결혼하게 해 주세요.]
어린 꼬마가 쓴 거 같은 삐뚤빼뚤한 필체를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서이렌을 향해 물었다.
“혹시 이거랑 비슷한 소원 쓰려는 건 아니겠죠?”
“내 소원이니까 뭘 쓰든지 내 맘이에요.”
나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이렌 씨 첫사랑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서이렌은 준비한 손수건을 꺼내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뭐야? 그걸 진짜 지금 듣고 싶어요?”
“아뇨. 안 듣고 싶어요. 농담이었어요.”
나는 농담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서이렌은 어느새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서이렌을 놀려 주려고 그런 건데 지금, 이 순간 달빛을 받는 서이렌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정말 순수하게 호기심에 물어보는 겁니다. 내가 회사 대표니까요. 혹시 나중에라도 첫사랑에 대한 인터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하는 거라고나 할까요?”
갑자기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나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버벅댔다.
서이렌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 줄게요.”
“아뇨.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요.”
“내 맘이니까 그냥 할게요.”
나는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서 서이렌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든 말든 그녀의 첫사랑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십 년도 더 오래된 이야기인데요. 내가 있던 양장점에 불이 난 적이 있어요.”
양장점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불이 났다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내 기억에는 양장점에 불이 난 적이 없다.
서이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서이렌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때 놀러 오셨던 동네 아주머니가 쑥 찜질이 좋다며 양장점에서 쑥을 태우셨어요. 기억나요?”
“아. 그거…….”
기억난다.
쑥을 잘못 태워서 양장점에 연기가 가득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왔던 나는 연기로 가득 찬 양장점을 보고 놀라서 불이 났다고 오해했었다.
그때 어머니와 아주머니들은 마을에 왔던 배추 장사의 트럭에 가 계셔서 양장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양장점에 불이 난 줄로만 알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바깥에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제일 아끼시는 물건을 먼저 옮겼었다.
어머니의 재봉틀을 제일 먼저 옮기고, 그다음에는 텔레비전이었다.
어린 몸으로 그것들을 낑낑대며 모두 옮기고 나서야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손에 배추 다발을 들고 돌아오셨다.
모든 기억이 떠오른 나는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내 첫사랑이 그때 나를 연기로 가득 찬 양장점에서 구해 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