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3화 (114/261)
  • #113화. 복사도(1)

    진설이 온다는 말에 록 이사는 당황한 듯 보였다.

    “진설 대표님이 오신다고?”

    “박주오 대표님과 회의할 게 있으셔서요. 조금 있으면 오실 텐데 같이 보시죠?”

    록 이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됐어. 다음에 보지.”

    “왜요? 이자현 배우 때문에 저희와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거 아닌가요? 여기서 저희와 대화를 더 나누다가 진설 대표님도 보고 가세요.”

    “됐다니까.”

    록 이사는 안으로 안내하는 내 팔을 뿌리치고 뒤돌아섰다.

    문으로 걸어가던 록 이사가 나를 돌아봤다.

    록 이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의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두고 보자고. 내가 이대로 당할 김경록이 아니야.’

    나는 끝까지 차분한 어조로 록 이사를 마중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흥분하신 거 같은데 운전 조심하시고요.”

    록 이사는 끝까지 나를 노려보며 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박주오 대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록 이사, 열받으니까 아주 사람이 달라지네? 아니지. 그동안 내게 보여 준 모습이 가면이었던 건가? ……그런데 원 대표.”

    “예.”

    “아까 그 얘긴 뭐야? 진설 대표님이 오신다고?”

    “아. 그거 뻥입니다.”

    “뻥이라고?”

    “록 이사님이 진설 대표님께 잘못한 일이 있거든요. 지금은 피하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뻥을 좀 쳤습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이라고 하자 박주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원 대표. 인제 보니 무서운 사람이었네. 록 이사보다 더 무서워.”

    “무슨 말씀이세요? 지혜를 발휘한 거죠. 보십시오. 조용하게 록 이사님 보냈잖습니까?”

    “하하. 또 말이 그렇게 되나?”

    박주오는 순간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원 대표. 그 뻥 말이야. 사실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예?”

    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박주오가 두 볼을 붉히며 말했다.

    “원 대표. 사실은 말이야. 내가 진설 대표님 팬이야.”

    박주오는 대표의 양 볼이 어울리지 않는 홍조로 물들었다.

    “진설 대표님을 좀 만나게 해 줘. 대표님이 일이 아니면 사적으로는 보기가 힘들다고. 우리 같은 편이잖아. 그렇지? 내 소원 좀 들어주라.”

    박주오의 얼굴을 보니 안 된다고 하면 한바탕 난리가 날 거 같았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죠. 제가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겠습니다.”

    “오케이. 좋았어!”

    박주오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 * *

    이자현의 이적 소식이 뜨고 한바탕 후폭풍이 불었다.

    - 대박.

    - ㅊㅋㅊㅋ

    - 이자현 ㅊㅋㅊㅋ 좋은 작품으로 보자.

    - 미친 스튜디오 엔진의 첫 번째 배우래.

    - 탈 TOP 축하해.

    - TOP 이제 보지 말자.

    - ㅠㅠㅠㅠ

    - 드디어 좆같은 TOP 탈출하는구나.

    그녀의 팬들은 이자현이 엔진으로 간다는 소식이 뜨자마자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 팬들이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 지금 소속사가 일을 거지같이 함.

    - 대상 타고 일 년 넘게 이자현 수납하고 CF만 찍게 시킴.

    -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다큐멘터리 못 봤어? 사장이 한지욱이잖아.

    - 옮길 만하네. ㅋㅋㅋ

    - 근데 스튜디오 엔진은 괜찮으려나? 거긴 배우는 처음이라며?

    - 뭘 해도 TOP보다는 나아.

    - 진심 TOP는 개구렸음. 특히 두 여자 찍을 때 짜증 대박이었음. 서이렌은 스본에서 매주 촬영장 비하인드 영상이나 사진 하나라도 꼬박꼬박 올려 주고 그랬는데. 이자현은 그런 거 하나도 없었음. 완전 무능력의 극치.

    - 아오.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서이렌 비하인드 캠에 나오는 이자현 얼굴 보며 근근이 살았다고.

    - 난 이자현 스본으로 옮겼으면 했는데. ㅠㅠ

    - 나도 스본으로 가길 바랐는데. ㅠㅠㅠㅠㅠ

    이자현의 팬들은 배우를 매니징 한 적 없는 엔진이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TOP보다는 낫다며 좋아했다.

    그때 팬들을 더욱 놀라게 한 이자현의 차기작 기사가 떴다.

    [단독, 이자현 우연미의 신작 ‘나만의 마돈나’ 전격 캐스팅]

    [톱스타 역으로 돌아오는 여신 이자현. 핫한 신인 이락과 연상연하 로맨스 연기 펼쳐]

    [스튜디오 엔진으로 이적한 이자현의 첫 작품. 나만의 마돈나]

    - 엥??? 정말?

    - ㅁㅊㅁㅊ

    - 오오. 드디어 여주 확정이다.

    - 캐스팅 무슨 일이야? 이자현이랑 이락이라니.

    - 이자현 열일한다. 나 울어 ㅠㅠㅠㅠㅠ

    - 이적하자마자 대박 터트림.

    - 존좋!!!!

    - 기대치 급상승!!!!!!!!!!!!!!!!!!

    - 우와.

    - 대박.

    - 와!! 믿고 본다. ㅠㅠ

    이자현의 팬들은 새 작품 소식에 더없이 기뻐했다.

    이락의 팬들도 좋아하긴 마찬가지였었다.

    - 대박 여주가 이자현이래.

    - 캐스팅 미쳤어.

    - 존나 좋아.

    - 작감에 캐스팅까지 완벽하다. 완벽해.

    - 어떻게 나 기대돼서 손이 떨린다.

    - 왐마. 미쳤네.

    - 와. ㅋㅋㅋ 연기 개쩔겠다.

    - 케미도 미쳤음. 선남선녀 ㅋㅋㅋ

    * * *

    스타탄생 사무실 앞에 전세 버스가 도착했다.

    15인승 버스에 나들이 가는 복장을 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줄줄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오늘은 스타탄생 식구들과 함께 복사도로 엠티를 가는 날이다.

    처음 가는 엠티에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강진석이 마이크를 잡고 버스 앞에 섰다.

    “자자. 자리에 앉아 주세요. 완도까지 가는데 넉넉잡고 다섯 시간은 걸릴 겁니다. 그러니까 다들 편한 곳에 앉아서 잠이나 잡시다.”

    “에이. 저렇게 윤 감독님이 우릴 찍고 있는데 어떻게 자요.”

    이락이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고 있는 윤서혁을 보며 한소리를 했다.

    윤서혁은 웃으며 받아쳤다.

    “첫 엠티인데 기념으로 영상을 남겨야죠. 버스 안에서 침 흘리고 자는 것도 다 추억입니다. 그냥 즐기세요. 여러분.”

    윤서혁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세요.”

    운전기사의 말에 강진석과 윤서혁이 앞자리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제일 뒷자리에 홀로 앉은 나는 스타탄생 식구들을 눈으로 훑었다.

    제일 앞자리에는 강진석과 윤서혁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이렌과 빈선예가 나란히 앉아 뭐가 좋은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장우재 로드매니저와 경영지원팀 이선아 씨가 그 뒤에 앉았고 이락과 우연미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다.

    이락과 우연미는 나만의 마돈나 대본을 보며 이야기 중이었다.

    “작가님. 7화 대본의 21씬이요. 제가 현장을 아는데요. 그렇게 자유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래?”

    “배우들이야 촬영 전에 대기하는 시간이 많다고 하지만 매니저들은 달라요. 대기하는 배우들도 챙겨야 하고. 배우분들이 연기하면 모니터링도 해야 하고.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쉬는 시간이 없어요.”

    “그렇구나. 난 촬영 중이니까 잠깐 볼일 보고 와도 되겠거니 했지. 어떻게 하지?”

    “이건 어떨까요? 그날 촬영장에 최 팀장님도 같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동하가 최 팀장님께 맡겨 놓고 사라졌다가 늦게 돌아오는 거죠.”

    이락의 의견에 우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다. 최 팀장이랑 동하랑 앙숙이니까 그 일로 사이가 더 틀어지고 촬영장에서 엄청나게 깨지는 거지. 하영이는 자기 때문에 혼나는 동하 보고 미안해하고 말이야.”

    “오 대박. 작가님.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데요?”

    “역시 내가 배우 하나는 캐스팅을 잘했단 말이야. 우리 락이가 매니저 출신이라 현장도 잘 알고 얼마나 좋아?”

    “현장만 잘 아나요? 저는 연기도 잘하잖아요.”

    “어이구. 그 말만 안 했으면 더 예뻤을 텐데.”

    이락과 우연미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바라봤다.

    1월의 겨울 하늘과 빌딩 숲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속도로를 타자 눈이 내린 산과 들이 보였다.

    드넓은 산과 들녘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강진석의 말대로 가끔은 이렇게 밖으로 나와서 쉬어 줘야 할 때도 있나 보다.

    다섯 시간의 이동 시간 동안 우리는 휴게소에 두 번이나 들렸다.

    그곳에서 두 손 가득 간식을 사 와 차에서 나눠 먹었고 오후 한 시가 되어서야 선착장에 도착했다.

    본섬인 노화도까지는 배를 타고 십 분을 가야 했고 거기서 다시 이십 분을 가면 우리가 묵을 복사도가 나온다.

    우리는 본섬을 오가는 배를 탔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는 배라 그런지 크게 흔들렸고 멀미가 심한 사람들은 선내에 들어가 쉬어야만 했다.

    다들 멀미에 힘들어하는데 이상하게 나와 서이렌만 멀쩡했다.

    나는 바닷바람을 쐬러 홀로 갑판 위로 나왔다.

    내가 출렁이는 파도를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누군가 섰다.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다들 죽으려고 하는데요?”

    “그러게요. 나도 원래 멀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네요. 이렌 씨는 괜찮아요?”

    “저도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서이렌이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고 윙크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혹시 마네킹이라서 괜찮은 건가요?”

    “맞아요. 심장에 있는 보석이 나를 지켜 주거든요.”

    “그 보석이 나한테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나도 지켜 줄 거잖아요.”

    “그럼, 내 걸 반으로 쪼개서 대표님 드릴까요?”

    서이렌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소리예요? 그걸 왜 쪼개나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작년에 뉴욕 패션 위크에서 봤던 세이렌 마네킹이 떠올랐다.

    팔이 부서지고 심장이 꺼내진 움직이지 않는 마네킹.

    서이렌은 그 마네킹을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바라봤었다.

    “난 괜찮은데요.”

    “내가 안 괜찮아요.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알았죠?”

    “대표님이 그러라는데 그래야죠. 알았어요.”

    나는 다시 드넓은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서이렌도 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봤다.

    * * *

    복사도에 도착한 우리는 레전드 필름에서 촬영을 위해 수리한 집에 도착했다.

    우리가 도착할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우리를 반겼다.

    그곳에서 한평생 살아오신 어르신들은 서이렌과 이락을 바로 알아보셨다.

    텔레비전을 보는 게 인생의 낙인 그분들은 그 속에 나오는 스타인 서이렌과 이락을 본인들의 손주처럼 좋아해 주셨다.

    “어이구. 락이는 어머니는 잘 계시고?”

    “덕분에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잘되었어.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 거야.”

    “감사합니다. 할머니.”

    “이짝은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내가 이 섬에 시집올 때 같네.”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지금도 미인이세요.”

    “그럼, 내가 복사도에서 제일로다가 미녀였어. 본섬에서도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

    복사도 주민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산에 걸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지자 우리는 부리나케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나와 우연미를 제외하고는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우리가 요리를 담당했다.

    해가 지고 얼마 안 가 서울에서 윤이슬이 도착했다.

    한참 촬영 중이었지만 오랜만에 휴가를 받아서 그런지 윤이슬의 표정은 날아갈 것 같았다.

    얼렁뚱땅 저녁을 짓고 커다란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우리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때 윤서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우리는 숟가락을 든 채 윤서혁을 바라봤다.

    윤서혁은 카메라를 들고 여전히 우리를 찍고 있었다.

    “밥 차려 놓은 거 좀 찍읍시다. 비켜 봐요.”

    “윤 감독님. 무슨 다큐멘터리 찍어요? 손에서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으시네. 그러고 보니 아까 집 구석구석 마다 ENG 카메라도 설치하셨죠?”

    “그러게요. 대체 뭘 찍었는지 좀 봅시다.”

    사람들이 숟가락을 놓고 몰려들자 윤서혁이 움찔했다.

    “편집하고 보여 줄게요.”

    “무슨 편집이야? 우리끼리 노는 거 찍은 건데 그냥 좀 봐요.”

    빈선예가 윤서혁의 손에서 카메라를 빼앗았다.

    우리는 빙 둘러앉아 촬영한 영상을 처음부터 재생했다.

    영상은 시작부터 재미있었다.

    이른 아침에 버스에 우르르 올라타는 좀비들.

    휴게소에 들려 간식을 한 보따리 사서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

    복사도에서 저녁 준비를 하며 벌이는 몸개그까지.

    너무 길어서 중간중간 끊어서 보는데도 너무 웃겨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와. 우리가 이러고 놀았다고요?”

    “미치겠다. 왜 이렇게 오합지졸이야? 요리는 또 왜 이따위로 하는데? 예능이 따로 없네. 크큭.”

    뒤에서 함께 영상을 보던 나는 강진석의 마지막 말에 깜짝 놀랐다.

    예능이라고?

    순간 내 머릿속에 재미있는 장면이 펼쳐졌다.

    스타탄생 식구들이 함께 꾸미는 리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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