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2화 (113/261)
  • #112화. 그녀의 홀로서기

    TOP 미디어의 주역이 회의실에 모여 있다.

    록 이사를 필두로 박호중 감독과 진철한 작가 그리고 최근 합류한 박상용 실장이다.

    박상용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록 이사는 박상용의 그런 표정을 보고 물었다.

    “뭡니까? 박 실장은 회의 내내 표정이 왜 그런 겁니까?”

    내내 불편했던 박상용이 입을 열었다.

    “기사 말입니다.”

    록 이사는 박상용이 왜 그러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기사 말이죠?”

    “TOP이랑 레전드랑 합작한다는 기사 말입니다.”

    “그게 왜요?”

    “확정이 아닌데 그렇게 단정적으로 기사를 내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제 이름과 인터뷰가 대문짝만하게 실리지 않았습니까?”

    록 이사는 불만을 토로하는 박상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박 실장. 언론 플레이라는 말도 모릅니까?”

    “당연히 알죠. 하지만 오늘 기사는 언론 플레이라기엔 너무 부풀려진 이야기지 않습니까?”

    “루머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루머가 되는 게 이 바닥 생리예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레전드 필름에서 기사를 보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연락을 하겠죠. 안 그렇습니까? 이러지 말고 박 실장이 직접 연락해 보는 건 어떤가요? 레전드 필름의 진설 대표와 가족처럼 친한 사이라고 했잖습니까? 난 오히려 박 실장이 레전드 필름과의 협상에서 발언권을 가지지 못한 게 더 문제라고 보는데요.”

    “레전드에서 십 년을 함께 일했습니다. 저보다 진 대표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미팅 때 보셨다시피 진 대표님이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신중한 성격이신지라…….”

    록 이사는 변명하는 박상용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난번 미팅 이후로 레전드 필름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전화해도 진 대표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

    이렇다면 합작은 물 건너간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레전드와 합작이 없던 일이 될 거라면 미팅한 것이라도 언플을 해서 TOP 미디어가 뭐라도 챙겨야 했다.

    “레전드 필름에서 기사를 보고 전화를 하면 박 실장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다시 진설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든가. 아니면…….”

    “아니면요?”

    “아니면 기사가 오보였다고 잘 무마하는 거죠.”

    박상용은 자신에게 뒤치다꺼리를 시키는 록 이사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TOP에서 일하다 보니 한지욱 대표는 말뿐인 대표였고 실세는 김경록 이사였다.

    한지욱은 맨날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중요한 회의가 아니면 얼굴도 볼 수 없었고 모든 일을 저기 상석에 앉아 있는 록 이사가 처리했다.

    박상용이 이직을 잘못한 건 아닐까 고심하는 찰나 회의실 문이 열렸다.

    록 이사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온 홍보팀 팀장을 보며 말했다.

    “뭡니까? 회의 중인 거 안보여요?”

    “록 이사님. 그게 아니라.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뭘 보란 말입니까?”

    “스타뉴스에서 기사가 떴습니다.”

    “무슨 기사?”

    록 이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묵음으로 해 놓은 핸드폰에 이미 전화와 문자가 수십 통이 들어와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록 이사는 당장 인터넷을 켰다.

    스타뉴스라고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는 이미 스타뉴스의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단독] 레전드와 신성의 만남! 레전드 필름과 스타탄생 합병.

    [단독] 진설의 뒤를 잇는다. 서이렌 레전드 필름의 신작에 전격 캐스팅.

    [단독] 천재 감독 윤서혁 스타탄생과 정식 계약 체결.

    무려 세 개의 단독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록 이사는 기사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이들도 기사를 찾아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박상용 실장은 합작도 아니고 무려 합병했다는 기사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레전드 필름이 합병이라고?

    진설 대표님이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무슨 소리지?

    박상용은 빠르게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의 내용을 읽은 박상용은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의 진설이 레전드 필름을 넘기고 심지어 대표 자리에서도 물러난다고?

    이게 정말인가?

    박상용은 TOP 미디어가 한 것처럼 이 기사가 언론 플레이일 가능성은 없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함께 쏟아진 다른 기사를 보니 점점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국민 영화를 탄생시킨 레전드 필름과 여신 서이렌을 포함한 톱스타를 보유한 스타탄생의 결합이라?

    심지어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윤서혁까지 스타탄생과 계약한 거라면 기사에 나온 대로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박상용은 고개를 들어 록 이사를 살폈다.

    록 이사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벌벌 떠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록 이사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기사를 보던 박호중 감독이 소리쳤다.

    “이게 뭐야?”

    록 이사는 충혈된 눈으로 박호중을 쳐다봤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호중 감독이 그의 핸드폰을 록 이사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이라고. 어차피 레전드 필름과의 합작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한 거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그냥 우리 일을 하면 됩니다.”

    록 이사는 속내를 숨기며 박호중 감독의 핸드폰을 바라봤다.

    핸드폰에 뜬 기사를 본 록 이사의 눈이 커졌다.

    록 이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제기랄.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록 이사는 박호중 감독의 핸드폰을 뺏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니. 내 핸드폰을 왜??”

    놀란 박호중이 달려 나가 바닥에 처박힌 그의 핸드폰을 들었다.

    깨진 액정 사이로 스타뉴스의 특종 기사가 떠 있었다.

    [특종] 이자현, 스튜디오 엔진으로 이적.

    * * *

    엔진의 홍보팀 담당자는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전화에 학을 뗐다.

    “팀장님. 기사가 뜬 뒤로 전화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말을 하는 중간에도 여기저기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홍보팀 박 팀장은 기사의 파급력이 이 정도일 줄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홍보팀 문이 열리고 익숙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원 대표님. 강 이사님.”

    홍보팀 박 팀장이 우리를 구세주인 양 반갑게 맞이했다.

    강진석이 정신이 반쯤 나간 박 팀장을 보며 한소리를 했다.

    “제가 기사 뜨면 한동안 시끄러울 거라고 했잖습니까? 그러게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요.”

    “준비했죠. 그런데 이 정도로 반향이 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박 팀장은 엔진이 제작한 영화와 드라마의 홍보만 오 년 넘게 맡아 온 베테랑이다.

    하지만 톱스타의 홍보는 처음 해 보기 때문에 오늘처럼 버벅댈 수도 있다.

    심지어 이자현이 엔진에 이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바로 엊그제라서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없이 기사가 터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오면서 준비한 언론 배포 자료를 박 팀장에게 건넸다.

    “이걸 언론에 쫙 뿌리세요.”

    내가 건넨 자료를 받아 본 박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미 자료는 언론사마다 다 전달했습니다.”

    “저도 오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좀 부족하더군요.”

    “부족하다고요?”

    “사람들이 정말 궁금해하는 건 하나도 실려 있지 않더군요.”

    박 팀장은 놀라며 내가 건넨 자료를 살폈다.

    내가 건넨 자료에는 이자현이 이적을 결심하게 된 계기나 엔진이 왜 이자현을 영입하게 됐는지 같은 것들이 Q&A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준비하셨습니까?”

    “스타뉴스 강 기자님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이자현의 이적 기사를 준비하던 깡기자는 이자현과 나눈 인터뷰를 기획 기사로 준비 중이었다.

    이 자료는 그걸 다시 Q&A 형식으로 편집한 거다.

    “인터뷰의 원본은 이미 기사로 떴을 겁니다. 이건 보도자료로 다른 언론사에도 전달하세요. 그럼, 이 상황을 우선은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말을 하는 사이에도 홍보팀이 들썩거릴 정도로 여기저기에서 전화벨이 들렸다.

    “아. 예. 그러죠.”

    정신이 나간 듯한 박 팀장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강진석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형님이 좀 박 팀장님을 도와주십시오. 저는 박주오 대표님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 * *

    대표실에 들어서자 박주오가 일어서서 나를 맞이했다.

    “원 대표 왔어?”

    박주오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나를 자리로 안내했다.

    “예정보다 이적 기사가 좀 일찍 떴습니다.”

    “얼마나 일찍이라고. 됐어. 괜찮아.”

    “기사 반응은 보셨나요?”

    박주오는 전원을 끈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말도 마. 여기저기서 전화가 들어와서 그냥 껐어. 하하하.”

    박주오는 말을 하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걱정했는데 박 대표님이 이자현 배우님을 잘 보살펴 주실 거 같아서 좋네요.”

    “하하. 제작사에서 무슨 배우를 키우냐며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군.”

    이자현이 TOP를 나와 일인 기획사를 차린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주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엔진을 찾아왔다.

    일인 기획사도 잘만 운영하면 나쁘지 않다.

    배우 한 명만 집중적으로 케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배우와 오랫동안 함께한 베테랑 매니저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내가 LOK를 나오고 이자현이 TOP으로 가면서 현미를 제외하고 매니저를 포함해서 이자현을 케어하는 스태프가 모두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예상대로 이자현은 현미와 단둘이 나와 일인 기획사를 차린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LOK랑 TOP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자현이 다른 회사로 이적하지 못한 것도 다 LOK의 영향력이 커서일 거다.

    나는 이자현의 소식을 듣자마자 엔진을 떠올렸다.

    영화와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 엔진.

    대한민국 부동의 제작사로 원 톱에 가깝다.

    이자현이 새 둥지를 틀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한 나는 박주오 대표를 찾아왔다.

    “원 대표가 지난주에 나를 찾아와서 빚 갚으라고 했을 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

    “제가 좀 당돌했죠?”

    “아니야. 내가 원 대표랑 우연미 작가한테 실수한 거 이제야 갚는 거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남는 장사 같아.”

    박주오는 얼떨결에 이자현을 맡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엔진한테 이득이었다.

    “계약은 단 일 년입니다. 일 년만 이자현 배우님을 잘 보호해 주세요. LOK에서 아마 헛짓거리를 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이적할 때 깨끗이 보내 주는 회사가 없어. 그동안 한솥밥 먹은 정은 다 잊어버렸는지. 걱정하지 마. 이자현 배우님이 이제 우리 엔진 소속이니 신경 써서 챙길게.”

    “감사합니다. 대표님.”

    박주오와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와 박주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사람들의 팔을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록 이사였다.

    “이거 좀 놓고 이야기합시다.”

    록 이사는 자신을 말리는 직원들을 뿌리치고 우리를 노려봤다.

    록 이사는 처음에는 박주오 대표를 노려보다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나는 당황한 나를 보는 록 이사를 보며 말했다.

    “록 이사님.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게 좋겠습니다.”

    “설마 너였어?”

    나는 아무 말 없이 록 이사를 바라봤다.

    “이제야 알겠네. 원세강 네가 이자현을 빼돌린 거지? 스타탄생으로 바로 데려가면 욕먹을 거 같으니까 엔진은 그냥 연막용이고 말이야?”

    보다 못한 박주오가 나섰다.

    “록 이사 말을 이상하게 하네. 우리 엔진이 고작 연막용이라고?”

    박주오가 세게 나가자 록 이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박주오는 화가 나는지 록 이사를 몰아붙였다.

    “이봐. 록 이사. 계약 기간 끝난 배우와 정식으로 계약한 거야.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어디를 와서 행패야?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박주오가 맞는 말만 하자 록 이사는 자신이 심했다고 느꼈는지 한발 물러났다.

    나는 그런 록 이사를 향해 말했다.

    “록 이사님. 이만 나가 주십시오. 이제 곧 진설 대표님이 이곳에 오실 거라서요.”

    진설이라는 말에 록 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진설 대표님도 보시고 가시든가요. 그렇지 않아도 기사 때문에 진 대표님이 TOP랑 할 말이 있으신 거 같은데 말입니다.”

    내 말에 록 이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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