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1화 (112/261)
  • #111화. 세 개의 기사 그리고 특종 하나

    윤서혁이 놀란 얼굴로 나와 진설을 바라봤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이 같은 회사가 되는 겁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서혁이 진설을 바라봤다.

    진설은 그런 윤서혁의 얼굴을 보며 웃으며 답했다.

    “윤 감독. 그래서 도장을 찍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찍어야죠. 당연히 찍어야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원 대표님과 진설 대표님이 뭉치신다는데. 당연히 제가 그 회사의 감독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서혁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두 회사가 합치면 누가 대표님이신 겁니까?”

    윤서혁의 말에 내가 답했다.

    “공동 대표겠지요.”

    “무슨 소리야? 공동 대표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진설이 끼어들자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표는 원세강 대표 한 명으로 족해. 의미 없는 공동 대표 남발하지 말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진 대표님 말씀대로 대표를 한 명만 둬야 한다면 그건 제가 아니라 진 대표님이 하셔야 합니다.”

    진설은 내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원 대표 착한 거 세상이 다 아니까. 그만해. 난 곧 집안일 때문에 ‘구원의 밤’ 제작에서 빠져야 해. 원 대표가 진두지휘해야 할 건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고일 대로 고여 버린 레전드 필름에 새바람을 불어넣으려고 후계자를 뽑은 거야. 내가 계속 대표할 거였으면 원 대표를 찾아가지도 않았지.”

    진설이 딱 잘라서 거절하자 나도 그녀에게 대표직을 계속 권유할 수는 없었다.

    윤서혁만 웃으며 답했다.

    “두 분이 이렇게 대표직을 두고 싸우시니 제가 해도 되겠네요.”

    “윤 감독이 사람 웃기는 재주가 있었네.”

    “제가 어디 가서 재미없다는 소릴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하하하.”

    윤서혁의 허세에 진설이 미소 지었다.

    “자자, 그만들 웃으시고 이제 작품 이야기를 해 보죠. 진 대표님. 이미 그전 시나리오로 프리프로덕션이 어느 정도 진행됐다고 하셨죠?”

    “장소 헌팅까지는 모두 마쳤어. 최대한 빨리 준비하면 2월 초에 촬영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야.”

    “최병철 감독님이 연로하신데 그 일정을 다 소화하실 수 있을까요?”

    “누군가 옆에서 도우면 될 거 같기도 한데.”

    진설은 말을 마치고 윤서혁을 바라봤다.

    눈치 빠른 윤서혁의 입에서 곧바로 답이 나왔다.

    “제가 돕겠습니다. 거장 최병철 감독님의 작품인데 당연히 제가 도와야지요.”

    진설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원 대표가 합류하자마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풀리네.”

    “제가 촬영 일정을 좀 더 조정해 보겠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윤서혁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일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박찬영 감독님께 영화를 보여 드리려면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는 게 좋다.

    나는 윤서혁을 보며 말했다.

    “287일 수준으로 타이트하게 일정을 잡았으면 하는데요.”

    윤서혁은 처음에는 못 알아듣다가 이내 놀라 소리쳤다.

    “예? 287일이요?”

    * * *

    복사도.

    봄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다고 해서 유명한 섬이다.

    남해 완도군에 있는 이 섬은 노화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섬이다.

    파도가 잠잠한 날에도 노화도에서 이십 분 이상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마을에 사는 주민은 이십 년 전만 해도 백 명이 넘었으나 지금은 열 명이 채 안 되는 상황.

    복사도는 강동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섬이며 강동철의 행적을 찾아보던 최진이 그곳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레전드 필름은 이곳에서 구원의 밤을 찍기 위해 사전 답사와 촬영 협조까지 모두 다 받아 놓았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복사도의 사진을 확인하던 나는 강진석에게 물었다.

    “엠티 장소예요. 어떤가요?”

    강진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로 가려고?”

    “예. 가야죠. 바빠지기 전에 빨리 다녀와요.”

    강진석은 새하얗게 물든 복사도의 사진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스타탄생 전 식구가 다 가는 건가?”

    “예. 배우들까지 모두 갑니다.”

    “윤이슬 배우는 촬영이 한창인데?”

    “스케줄 확인해 봤는데 하루 정도를 뺄 수 있겠더라고요. 윤 배우님은 저녁 늦게 오는 거로 해서 모두 다 같이 가는 겁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LOK에서 일할 때 매니저들끼리 엠티 자주 갔잖아요. 형님은 좋아하셨죠?”

    “나야 원래 산과 들을 사랑하는 남자니까 그런 거고. 가끔 그렇게 콧바람 좀 쐬어 주면 좋잖아.”

    “그래서 가는 거죠. 이제 레전드 필름이랑 합치면 회사 규모가 커지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끼리 단출하게 엠티 가는 게 힘들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전에 갔다 오자는 거죠.”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기사는 언제 발표할 거야?”

    “기사가 많아서 한 번에 모아서 내려고요. 깡기자님과 상의 중입니다. 조만간 발표할 겁니다.”

    “역대급 발표겠네. LOK 매니저들 얼굴 좀 봐야 하는데.”

    LOK에서 이직할 때 몇몇 매니저들로부터 망했다는 소릴 들었던 강진석은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 소식을 듣고 제일 기뻐했다.

    “이직해도 급이 떨어지는 곳으로 갔다며 나를 조롱했던 놈들이 기사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에 선하다. 아이고. 쌤통이야.”

    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지는 강진석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한참 동안 혼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내가 있는 이 층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비의 무대 인사 일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서이렌이었다.

    오늘 부산에 다녀온 서이렌은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내 앞으로 걸어왔다.

    “부산에서 온 걸 텐데 피곤하지 않아요?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그랬어요?”

    서이렌은 내가 일하는 책상 앞에 서더니 말했다.

    “우리가 만날 때가 된 거 같아서요.”

    “어제도 본 거 같은데요?”

    “우리 십 분 이하로 본 거는 안 본 거로 칩시다. 인간적으로 그건 너무 짧잖아요.”

    두 여자 촬영을 하는 동안 오랫동안 못 본 탓인지 서이렌은 요즘 유독 내게 집착했다.

    “조금 전까지 강진석 이사님이 계셨어요. 계속 이렇게 나오면 강 이사님이 알아차리실 거라고요.”

    “에이. 그건 아니죠. 강 이사님은 모르실 거예요. 일 눈치는 백 단이신데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잘 못 알아채시더라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이렌의 말대로 강진석은 현장 분위기는 잘 읽는데 남녀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잘 캐치하지 못한다.

    그래서 LOK에서 일할 때도 소속 배우의 열애를 감지하지 못해 몇 번이나 물을 먹은 적이 있었다.

    서이렌은 내 모니터에 떠 있는 복사도 사진을 보며 물었다.

    “여기가 구원의 밤 촬영지인가요?”

    “맞아요. 다음 주에 여기로 스타탄생 식구들이 엠티를 갈 겁니다.”

    엠티라는 말에 서이렌의 똥그란 두 눈이 두 배가 됐다.

    “와. 정말요? 정말로 우리 엠티 가는 거예요?”

    “윤이슬 배우님 일정 조정되면 바로 떠날 겁니다.”

    서이렌은 엠티 소식에 내 예상보다 더 기뻐했다.

    “너무 좋아요. 엠티라는 거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었어요. 가서 기타도 치고 캠프파이어도 하고 다 해 보고 싶어요.”

    “그동안 본 게 많은가 보네요. 좋아요. 우리 가서 다 해 봅시다.”

    서이렌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복사도에 대해 검색하더니 갑자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웃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웃었는데 그러세요?”

    “방금 이렌 씨 표정이 이랬어요. 무슨 드라마 찍는 줄 알았어요.”

    내가 서이렌의 은근한 미소를 따라 하자 서이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녀가 섬에 갔다가 배를 제때 못 타서 단둘이 섬에 남잖아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으니 표정이 그랬던 거다.

    나는 딱 잘라서 말했다.

    “우린 그럴 일이 없으니 그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거기 배 자주 다녀요.”

    내가 철벽을 치자 서이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기대한대요? 그냥 그렇다고요.”

    “엠티 일정을 아주 타이트하게 짜야겠네요. 누군가 이상한 생각을 못 하게 말입니다.”

    내가 서이렌을 놀리자 그녀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서이렌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나와 말장난을 하다 떠났고 그녀가 떠나자 나는 갑자기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편해진 걸까?

    지난번 병원에 다녀온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인다.

    위태롭게 다이빙대를 걸어가던 나였다.

    나는 여전히 끝이 보이는 다이빙대 위에 서 있지만, 예전만큼 초조하지는 않다.

    편하게 마음을 먹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 *

    다음 날, TOP 대표실에 록 이사가 나타났다.

    한지욱은 어디를 갔는지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록 이사는 한지욱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한 대표님.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아. 록 이사님.]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는데 말도 없이 어딜 가신 겁니까?”

    [대학 동창이 한국에 와서요.]

    ‘시발. 친구는 일 끝나고 만나라고.’

    록 이사는 욕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말했다.

    “다음 주에 기사 내보내기로 한 거 지금 풀어야 할 거 같아서요.”

    [기사? 무슨 기사요?]

    록 이사는 그새 다 잊어버린 한지욱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레전드 필름이랑 합작한다는 기사 말입니다.”

    [아. 그거요? 왜 이렇게 일찍 푸는 건가요? 무슨 일 있어요?]

    “진설 대표가 윤서혁 감독을 영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요.”

    [윤서혁이면 작년에 대박 터트린 신인 감독을 말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레전드 필름이 윤서혁 감독이랑 계약한다면 우리한테는 좋을 일이겠군요.]

    ‘당연하지. 그러니까 기사 바로 푼다고. 이 자식아.’

    마음이 급한 록 이사는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알아서 하세요.]

    “그럼, 바로 기사 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친구 만나고 바로 퇴근해야 할 것 같으니 록 이사가 알아서 처리하세요. 끊습니다.]

    전화를 끊은 록 이사가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 삼십 분.

    점심 먹고 차 마시고 돌아오겠거니 했던 한지욱이 아예 오후 시간은 째 버리겠단다.

    “대체 일을 한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록 이사는 비어 있는 한지욱의 의자를 보며 욕을 내뱉었다.

    “머저리 같은 놈.”

    * * *

    윤이슬의 촬영 일정을 조정한 우리는 다음 주 수요일 목요일로 엠티 일정을 정했다.

    윤이슬은 수요일 저녁에 왔다가 목요일 오전에 올라가게 됐다.

    한창 일정표를 정리하고 있는데 깡기자에게 전화가 들어왔다.

    “예. 깡기자님.”

    [케이스타에서 기사 뜬 거 보셨어요? TOP 미디어랑 레전드 필름이 합작한다는 기사가 떴어요.]

    “그거 오보입니다. 레전드 필름에서 일했던 박상용 실장이 지금 TOP 미디어에서 일하거든요.”

    [그런데 기사 논조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기사를 확인해 보셔야 할 거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확인해 볼게요.”

    나는 깡기자와 전화를 끊고 케이스타 기사를 찾았다.

    내가 문제의 기사를 찾은 그 순간, 진설에게 전화가 왔다.

    “예. 진 대표님.”

    [원 대표. 기사 뜬 거 봤어?]

    “지금 보고 있습니다.”

    [원 대표가 그 기사 좀 내려 봐. 말도 안 되는 말을 써 놨어.]

    [단독] 레전드 진설, TOP 미디어와 손잡다.

    기사 내용은 진설이 TOP 미디어의 가능성을 크게 보고 회사를 직접 찾아가 합작 의사를 밝혔다고 적혀져 있었다.

    심지어 레전드 필름에서 일했고 지금은 TOP 미디어에서 일하는 박상용 실장의 인터뷰까지 실어서 누가 봐도 진짜처럼 느껴졌다.

    [원 대표가 잘 처리해 봐. 난 기자들이라면 학을 뗐어. 엮이기 싫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나는 곧바로 깡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 대표님. 기사 봤죠? 그냥 추측성 기사가 아니에요.]

    “그러네요. 누가 봐도 혹하게 기사를 썼더군요. 아무래도 우리가 준비하던 기사를 당장 풀어야 할 거 같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이미 데스크에 확인받아 놨어요.]

    “빠르시네요. 우리가 준비한 기사가 총 세 개죠?”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의 합병이 첫 번째, 윤서혁 감독의 스타탄생 계약이 두 번째, 마지막으로 서이렌 씨 캐스팅. 이렇게 총 세 개예요.]

    “거기에 하나만 더 끼워 주실 수 있나요?”

    [기삿거리가 더 있어요?]

    “저도 안 지 얼마 안 된 건데, 특종입니다. 깡기자님. 특종 터트리시겠네요.”

    [와. 나 심장 떨리는 것 좀 봐. 나 좀 놀리지 말아요.]

    “지금 깡기자님 메일로 내용 보냈어요. 보시고 그것까지 해서 네 개의 기사를 동시에 내주세요.”

    [어머. 이게 뭐야? 이거 사실인가요?]

    “예. 사실입니다. 그대로 기사 내주세요.”

    [대박이네요. 이거랑 같이 터지면 스타탄생이랑 레전드 필름 기사는 묻힐 수도 있겠는데요?]

    “우리 기사는 중요하지 않죠. 캐스팅 끝나고 영화 촬영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시작입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하하하. 나만 특종 건졌네.]

    깡기자가 즐거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케이스타 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이건 한지욱이 기획한 게 아닐 거다.

    록 이사 작품이겠지.

    우리가 준비한 기사가 터지면 한동안 TOP이 아주 바빠질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