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TOP의 언론플레이
한지욱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를 먼저 터트린다고요? 하지만 만약에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요?”
“계약은 성사된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상용 실장이 진설 대표 입에서 긍정적인 답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한지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요?”
“그리고 계약이 파투 나도 상관없습니다.”
“그건 왜죠?”
“진설이 운영하는 레전드 필름과 합작 논의를 한 신생 제작사로 TOP 미디어의 이름은 널리 알릴 수 있으니까요. 레전드에서 일한 박상용 이름을 팔면 됩니다.”
“아하. 레전드 필름의 후광을 얻을 수 있다는 거군요. 이제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습니다.”
록 이사는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푸는 한지욱을 보며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록 이사는 속마음을 숨기고 한지욱의 기분을 풀어 줬다.
“대표님의 어록이 요즘 인터넷에서 화제던데요.”
“아. 그거요.”
한지욱은 기분이 나쁜지 다시 얼굴을 구겼다.
“왜요? 화가 나십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인터뷰 편집이 매끄럽지 못해서 내 인터뷰가 이상하게 나간 거 아닙니까?”
록 이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지욱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이 바닥은 유명해지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한지욱이 록 이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록 이사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한지욱 대표님은 유명인사가 되셨습니다. 지금의 인터넷 밈도 조만간 사그라들 겁니다. TOP 미디어가 잘나가면 다들 반응이 백팔십도 달라질 겁니다.”
“그래요?”
“당연하죠. 연예계는 이미지 장사입니다.”
“난 연예인이 아닌데요?”
“하지만 이미 그만큼 인지도가 높아지셨죠. 다큐멘터리 출연 단 한 번으로 말입니다. 이건 스타성이 있다는 거죠.”
한지욱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야 아시겠죠? 다큐멘터리 출연하시건 절대적으로 잘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TOP 미디어가 승승장구하게 되면 사람들은 생각할 겁니다. ‘그때 그 한지욱이라는 사람이 알고 보니 이렇게 일을 잘했군.’ 하면서 말입니다.”
“아주 좋아요. 내가 바라는 게 그겁니다. 나는 아버지처럼 회사를 이끌지 않을 겁니다. LOK는 유명하지만, 아버지의 성함을 아는 일반인은 많지 않죠. 하지만 나는 다릅니다. 나는 TOP과 내 이름 둘 다 세상에 알릴 겁니다.”
록 이사는 완전히 넘어온 한지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가시죠. KBC 지영록 국장과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좋습니다. 지수연이는 안 오나요?”
“오늘은 CF 촬영이 있어서 못 올 겁니다. 오늘을 우리끼리 식사를 하죠.”
“예. 그럽시다.”
대표실을 나가며 록 이사는 한지욱 대표의 책상을 바라봤다.
책상 위에 올려진 명패에는 ‘대표이사 한지욱’이라는 이름이 멋들어지게 빛나고 있었다.
록 이사는 야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대표실 문을 닫았다.
* * *
다음 날 나는 윤서혁 감독과 함께 레전드 필름을 찾았다.
몸이 좋지 않은 박찬영 감독 대신에 구원의 밤 시나리오 수정을 윤서혁 감독에게 맡긴 것이다.
나는 차기작을 준비하는 윤서혁에게 은근슬쩍 작품 이야기를 흘렸고 윤서혁은 레전드 박찬영 감독의 시나리오를 수정할 수 있는 귀한 기회라며 덥석 물었다.
진설은 젊은 천재 감독과 악수했다.
“반가워요. 진설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윤서혁이라고 합니다.”
윤서혁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287일 잘 봤어요. 대체 누가 이렇게 담담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 갔는지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야말로 위대하신 진설 배우님께서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셨다고 하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천재 감독이라고 불리는 윤 감독에게 그런 소릴 들으니 내가 더 좋네. 나 이제 말 편하게 해도 되지?”
“그럼요. 진설 대표님께서 영화계 선배이신데요.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저는 영광입니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끼어들었다.
“인사 나누셨으면 이제 완성된 시나리오 좀 볼까요?”
“원 대표. 아직 못 봤어?”
진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 계신 윤 감독님께서 진 대표님께서 먼저 봐야 한다며 못 보게 했습니다.”
“아. 그래?”
윤서혁이 가방에서 꺼낸 시나리오를 진설에게 건넸다.
전실이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나는 윤서혁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도 시나리오 주세요.”
“없습니다. 한 부만 인쇄해 가지고 왔어요.”
“진짜요? 그럼, 진 대표님이 다 보실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원 대표님도 보시려고요?”
“예. 봐야죠.”
“진설 배우님 허락받고 보세요.”
“허락하실 겁니다.”
“두 분이 친하셨어요?”
“예. 이제 더 친해질 예정입니다.”
윤서혁은 내 말을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시나리오를 읽는 진설의 분위기를 살폈는데 그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빠르게 다음 장으로 넘기고 있었다.
“윤 감독님은 아직 차기작 소식은 없는 거죠?”
“예. 몇 번 이야기가 되다가 엎어졌습니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이젠 조급해지네요.”
윤서혁은 웃고 있었지만 초조해 보였다.
이내 시나리오를 다 본 진설이 대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진설이 내려놓은 시나리오를 집어 들고 앞장을 펼쳤다.
진설은 내가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아무 말이 없이 침묵을 유지했다.
윤서혁은 긴장되는지 수정고가 어땠는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긴장한 채 나만 바라봤다.
대표실에는 내가 넘기는 종이 소리만 가득 찼다.
* * *
이윤기 감독과 우연미 작가는 KBC 근처의 중국집에 와 있다.
우연미는 이 중국집에서 박호중 감독과 싸운 적이 있어 기분이 묘했다.
이윤기는 우연미의 표정이 이상해 보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 작가. 여기 와 본 적 있나요?”
“예. 있었죠.”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지난번에 왔을 때 맛이 별로였어요?”
“아뇨. 그때 젓가락도 못 들어 봤어요. 재스민차 맛은 기억나요. 맛있더라고요.”
“그럼, 이번에 들어 봐요. 여기가 꽤 유명한 곳입니다.”
“예. 감독님.”
이윤기와 우연미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우연미가 이윤기에게 물었다.
“오늘 이야기가 잘돼서 여주가 확정되면 바로 촬영 들어갈 수 있겠죠?”
“왜 그렇게 급해요? 5월 방영이라서 시간이 촉박하진 않아요.”
“2화에 크리스마스이브 씬이 있잖아요. 제 생각 같아선 CG로 하지 말고 겨울인 지금 찍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알았어요.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너무 보채지 말아요.”
이윤기가 너털웃음을 짓자 우연미도 웃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그들이 있던 방에 두 사람이 들어왔다.
이자현과 그녀의 스태프인 현미였다.
“안녕하세요. 이자현입니다. 이쪽은 제 매니저인 현미 씨예요.”
“잘 왔어요. 이자현 배우님.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이자현은 긴장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우연미는 가득 차려진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연미의 시선을 느낀 이자현이 물었다.
“우 작가님.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이자현 배우님이 정말로 이 작품 하시는 거 맞죠?”
“예. 그러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무르기 없습니다.”
“그럼요. 오늘 당장 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어요.”
“그거 정말이죠?”
이자현과 우연미의 대화 중간에 이윤기가 끼어들었다.
“이자현 배우가 TOP 소속이죠? 회사와는 이야기가 된 건가요? 이자현 배우가 나한테 직접 연락한 거 봐서는 회사는 모르고 있는 일 아닌가요? 난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두 사람만 나온 거 보니까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네요.”
“저는 이제 어디 소속도 아닙니다.”
이자현의 말에 이윤기 감독의 눈이 커졌다.
“소속이 없다고요?”
“작년까지 TOP 소속이고 재계약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하지만 난 이 배우가 이적한다는 기사를 못 본 거 같은데요?”
“회사를 옮기는 게 만만치가 않네요. 아무래도 혼자서 활동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자현의 폭탄 발언에 방 안이 고요해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우연미가 입을 열었다.
“이 배우님. 그럼, 일인 기획사를 세우시겠다는 건가요?”
“우선 그렇게 활동하려고요.”
“왜요? 스타탄생에 가세요. 원래 원세강 대표님과 함께 일하셨잖아요.”
우연미의 말에 이자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거긴 못 갑니다.”
“왜요?”
우연미가 이해를 못 하겠다며 진지하게 이유를 묻자 이윤기가 나섰다.
“원 대표가 십 년 가까이 LOK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함부로 배우를 빼 가기 힘들겠지.”
“아. 그렇군요.”
우연미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인 기획사라도 계약하는 데 문제는 없잖아요. 감독님. 오늘 당장 계약서에 도장 찍어요.”
우연미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윤기를 바라봤다.
“계약서가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나오나?”
이윤기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자현을 바라봤다.
“이자현 배우는 이 작품이 정말로 하고 싶다는 거죠?”
“예. 우 작가님 신작 소식 듣고 대본을 구해서 읽었어요. 보면서 제 가슴이 뛰더라고요. 제가 너무 하고 싶은 역입니다.”
이자현은 스타와 매니저의 사랑 이야기인 대본을 보며 자신이 원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거 같아서 기분이 씁쓸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우연미가 이윤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독님. 당장 가서 계약서 먼저 만들까요? 이자현 배우님이 해 준다면 우리로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잖아요.”
이윤기도 같은 생각이었다.
수많은 톱 여배우들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고사한 상태.
남주가 신인인 이락이라서 꺼리는 배우들도 있었고, 촬영 일정이 도저히 맞지 않아 못 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배우는 오디션 우승자 이락의 첫 작품에 들러리를 서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이윤기는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선 듭시다. 여기 음식 정말 맛있어요. 식사 끝나면 바로 회사로 들어가서 계약을 진행할게요.”
이윤기의 말에 우연미와 이자현은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 * *
나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쁘진 않죠? 저는 쓰면서 정말 좋았거든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너무 좋았다.
주인공 최진을 남자에서 여자로 성별만 바꾼 것인데도 불구하고 극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에는 연쇄 살인마에게 잠식당하는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범죄 스릴러였다면 지금은 여전히 장르는 변함이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텐션이 추가되었다.
나는 진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 대표님은 어떠셨어요? 저는 너무 좋은데요?”
조용히 말이 없던 진설은 미소를 지었다.
내내 무표정이던 그녀가 웃자 윤서혁은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윤 감독이 대단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다듬어서 나타날 줄은 몰랐네.”
진설의 극찬에 윤서혁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나요?”
“너무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고요?”
“레전드 필름 소속이 되는 건 어때?”
예상 밖의 스카우트 제의에 윤서혁이 당황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렇게 못 할 거 같습니다.”
“왜? 나를 존경한다면서?”
“저. 그게……”
윤서혁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진 대표님. 윤 감독 경기하겠어요.”
“원 대표도 참. 나 안 잡아먹어. 그냥 궁금해서. 왜 못 온다는 건데?”
진설이 다그치자 윤서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지금은 소속이 없지만, 혹시라도 회사에 들어간다면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디? 혹시 엔진이야?”
“아뇨. 거기가 아니라…….”
윤서혁이 말끝을 흐리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눈빛을 받고 놀라 물었다.
“혹시 스타탄생인가요?”
“예. 대표님. 저는 스타탄생과 일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배우 소속사인 건 아시죠?”
“우연미 작가님도 있잖아요.”
나는 진설과 눈빛을 교환했다.
진설은 처음엔 놀랬지만 지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윤서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상관없겠네요. 진 대표님과 계약하세요.”
“예?”
“어차피 같은 회사가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이 합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