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9화 (110/261)
  • #109화. 두 번째 기적

    나는 놀란 눈으로 주치의를 바라봤다.

    “기적이라니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주치의는 CT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보십시오. 지난번보다 흰 선이 많이 줄었죠? 한번 섬유화된 조직은 다시 회복되지 않는데 원세강 환자의 심장은 섬유화된 조직이 복구되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나는 주치의가 가리키는 대로 CT를 노려봤다.

    의사의 말대로 뭔가 흰 선이 줄어든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제가 사는 겁니까?”

    “아직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섬유화 진행이 늦춰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나는 뭔가를 물어보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제 병이 나은 건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건 설레발인 것 같았다.

    “그럼 제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고르고 골라 말한 내 질문에 주치의가 웃으며 말했다.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무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처음 예상했던 삼 년보다는 더 오래 사실 거 같습니다.”

    “아…….”

    나는 너무 기뻐서 순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당장 병이 낫지 않아도 좋다.

    단 일 년만이라도 삶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이렇게 기적이 일어나다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 자리에서 울고 싶지는 않았다.

    주치의도 기분이 좋은지 내 손을 잡았다.

    “작년 초에 약을 바꾼 게 신의 한 수 같습니다. 신약이라서 약의 효능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약을 바꿨었죠? 그때부터 발작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간혹가다 신약이 잘 받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때도 병의 진행이 느려졌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예. 맞아요. 그때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약을 바꿔 보자고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몸이 나아지고 있다고 해서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약은 꼬박꼬박 챙겨서 드셔야 하고요. 아시겠죠?”

    “작년에 미국에서 쓰러진 이후로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음에는 삼 개월 후에 진행 상황을 봅시다. 바쁘다고 안 오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올게요.”

    주치의는 내가 앞으로 삼 개월간 먹을 약을 처방해 줬다.

    처방전을 들고 병원에서 나온 나는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기적을 한번 겪은 사람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서이렌이 내게 찾아왔을 때 나는 이미 기적을 선물 받았다.

    나는 아무래도 신의 축복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이렇게 두 번이나 기적이 찾아올 리가 없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발작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내 병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내게 남은 시간이 늘어난 것만은 확실하다.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보러 가야겠다.

    내가 살아갈 이유이자 내게 힘을 주는 내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 * *

    조수석에 앉아 있던 강진석이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엠티라니?”

    “스타탄생이 생기고 한 번도 회사 동료들과 엠티를 간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

    “그렇긴 하지. LOK에 있을 때는 매니저들끼리는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모여서 산에 갔으니까.”

    “형님은 놀러 가는 거 좋아하시죠?”

    “나야. 어디든 밖으로 나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도시는 너무 답답하잖아.”

    “그렇긴 하죠.”

    나는 강진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한적한 섬에서 촬영하면 좋으시겠네요?”

    “섬이라고?”

    “낚시도 할 수 있나?”

    “섬인데 당연히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당연히 좋지.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누가 섬에서 촬영해? 뭐 대본 들어온 거 있어?”

    “바로 알아채시네요.”

    “뭔데? 섬에서 촬영하는 거야? 혹시 드라마야? 아니면 영화? 어디서 제작하는 건데? 감독은 누구고 작가는 또 누구야?”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물어보세요. 제가 다 헷갈리네요.”

    “하하하. 궁금해서 그러지. 빨리 자세히 말해 보라고.”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지난주에 본 시나리오에 섬이 나오는데 찾아보니 실제 있는 섬이더군요. 보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무슨 시나리오를 읽었길래 읽자마자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고 싶다는 거야?”

    “레전드 필름의 신작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강진석의 두 눈이 커졌다.

    “레전드라고? 진설 배우님이 운영하시는 그 레전드?”

    “예. 맞습니다.”

    “미치겠네. 정말로 레전드 필름 맞아?”

    강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흥분했다.

    “그런데 세강아. 레전드 필름은 최근에 영화 제작은 안 하잖아. 그리고 거긴 이제는…….”

    강진석은 뭔가 떠올랐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래요? 레전드 필름에 무슨 일 있나요?”

    “나도 LOK 진 매니저한테 들은 거긴 한데.”

    “진채환 매니저님이요?”

    “응. 걔가 그랬거든. 조만간 TOP 미디어랑 레전드 필름이랑 합작할 거라고. TOP 미디어에 새로 부임한 박상용 실장이라고 있는데 그 사람이 레전드 필름 출신이거든.”

    “정말요? 그 소식을 언제 들으셨어요?”

    “어제 들었어. TOP 미디어에 진설이 직접 찾아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진설 팬인 LOK 매니저들이 떠들썩했다고 했어.”

    진설이 TOP 미디어와 손잡는다고?

    설마? 내가 거절해서 대안을 찾은 건가?

    왜 하필 많고 많은 곳 중에 TOP이지?

    “형님. 당장 엔진에 전화하세요. 오늘 회의 취소해 달라고요. 먼저 가 볼 곳이 있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심 팀장이 기다릴 텐데?”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핸들을 꺾었다.

    핸드폰을 손에 든 강진석의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

    “세강아. 너 어디 가는 건데 이렇게 급하게 그래?”

    “레전드 만나러 갑니다.”

    * * *

    진설은 고민에 빠졌다.

    박상용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TOP 미디어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앞에 앉은 박진숙 팀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제가 보기엔 아닌 거 같아요.”

    “역시 박 팀장도 그렇게 생각하나?”

    “어제 TOP 미디어 대표가 말하는 거 못 들으셨어요? 한성제 대표님 아들이라고 해서 기대했었는데 완전 깨더라고요.”

    “한지욱이 인물이긴 하더라고. 좀 색다른 인물이라서 그렇지.”

    “완전 돌아이던데요? 좀 이상한 사람 같아요. 그리고 영화에 대한 조예가 그렇게 없는 사람한테 레전드 필름을 맡기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진설은 박진숙의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한지욱은 바지 사장 같더라. 진짜 TOP 미디어를 움직이는 건 그 옆에 있던 김경록 이사였지?”

    “저는 그 김경록 이사란 사람도 마음에 안 들어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제 촉 아시죠? 제가 사기꾼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잖아요.”

    “김경록 이사가 그래도 LOK에서 십 년이 넘게 일한 사람이야.”

    “뒤가 구린 사람 같아요. 암튼 TOP 미디어는 아닌 거 같아요.”

    “그래. 알았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박상용만 믿고 TOP과 손잡을 수는 없지. 조금 더 고민해 보자고.”

    박진숙 팀장이 나가자 대표실에 진설이 홀로 남았다.

    진설은 달력을 확인했다.

    어느덧 1월 중순에 접어들고 있었다.

    박찬영 감독의 건강 상태는 지금까지는 양호하지만 언제 상태가 악화될지 모르는 일이다.

    빨리 회사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박찬영 감독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 그녀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정 안 되면 원세강 대표가 말한 대로 엔진의 박주오를 찾아가야겠어. 엔진이 너무 비대해지는 거 같아서 걱정스럽지만, 방법이 없어.”

    진설이 달력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방금 나갔던 박진숙 팀장이 손님들과 함께 대표실에 들어왔다.

    진설은 박진숙의 뒤에 서 있는 나와 강진석을 보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원세강 대표?”

    나는 강진석과 함께 진설의 앞에 섰다.

    “저 또 왔습니다.”

    진설은 피곤한 얼굴로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함께 오신 분은 누구야?”

    강진석은 시뻘게진 얼굴로 진설 앞에 다가서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설 배우님. 저는 스타탄생에서 일하는 강진석이라고 합니다.”

    강진석은 생긴 것과 다르게 진설 앞에서 순한 양이 되었다.

    진설의 카리스마가 대단하기도 했지만, 강진석이 그녀의 오랜 팬이라 그렇다.

    “만나서 반가워요. 진설입니다.”

    진설은 자신의 추종자를 만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인지 편하게 강진석을 맞이했다.

    진설은 강진석에게 시선을 거두고 나를 쳐다봤다.

    “원 대표가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거 같네.”

    “맞습니다.”

    내 병을 알고 있는 진설은 내 몸부터 살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더 좋아졌네?”

    “걱정해 주신 덕에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강진석은 우리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직원이 커피를 가져왔고 대표실에 커피 향이 가득 퍼졌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내가 온 용건을 꺼냈다.

    “지난번에 제의해 주신 거 아직 유효한가요?”

    내 말에 놀란 진설이 커피잔을 도로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렇다고 하면 뭐가 달라지나?”

    “예. 제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 농담하는 거 아니지? 정말로 레전드 필름의 후계자가 되고 싶은 거야?”

    커피를 마시던 강진석이 놀라서 사레가 들었다.

    “컥.”

    강진석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나와 진설은 진지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레전드 필름이랑 스타탄생이 함께한다고?’

    강진석이 속으로 상황을 유추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둘만의 대화를 계속했다.

    “원 대표 괜찮겠어? 난 원 대표가 걱정되는데.”

    “괜찮습니다. 맡는다고 해 놓고 책임감 없이 바로 도망가 버리는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시간이 일 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때 대표님이 제게 그러셨죠. 기적은 있다고요.”

    내 말에 진설이 두 눈이 커졌다.

    “저는 이제 믿기로 했습니다. 제게도 기적이 찾아온 거 같아서요.”

    진설의 눈빛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내 밝은 얼굴이 되었다.

    “잘됐네. 불행을 완전히 거둬 낸 건가?”

    “안타깝게도 그건 아닙니다. 제가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일찍 사라지는 엑스트라에서 조연급은 된 것 같습니다.”

    “정말 잘됐어. 박 감독님께도 원 대표의 좋은 소식을 전할게. 기뻐하실 거야.”

    “감사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강진석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잠시만요. 대체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 * *

    TOP이 한바탕 뒤집혔다.

    한지욱과 록 이사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지욱이 얼굴을 구기며 록 이사에게 따져 물었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직도 이자현과 재계약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게 사실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국엔 도장을 찍을 겁니다.”

    “그래도 나가겠다고 하면요? 지금 완강하게 나온다면서요?”

    “어차피 나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을 겁니다. 이자현이 재계약을 안 한다고 했던 게 작년 가을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누구와도 계약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있잖습니까?”

    록 이사의 말에 한지욱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우선 대한민국 탑 쓰리 기획사는 대표님들끼리 이미 이자현을 탐내지 않기로 논의를 끝낸 상황입니다. 한성제 대표님이 잘 처리해 주셨더군요.”

    “당연하죠. 아버님은 일을 허투루 하지 않으시니까요. 하지만 한국에는 다른 기획사가 많지 않습니까.”

    “작년 말에 소문을 좀 냈습니다. 이자현 이적하는 회사는 앞으로 LOK, TOP이랑은 척지는 거라고 말입니다. LOK 계열에 소속된 배우만 오십 명이 넘습니다. 우리와 엮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어느 회사에서 좋다고 이자현을 받아 주겠습니까? 그리고 이자현의 급도 문제일 겁니다.”

    “급이라고요?”

    “탑 중의 탑이잖아요. 계약금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미리 소문을 내놨습니다. 중소 기획사는 함부로 명함도 못 들이밀 만큼요.”

    “이거 록 이사님이 철저하게 약을 뿌려 놓으셨군요.”

    하지만 한지욱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풀릴 줄 몰랐다.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죠. 일인 기획사가 있으니까요.”

    “이자현이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하진 않을 겁니다. 지금 이자현 담당인 스태프를 다 빼 가도 문제예요. 원세강 같은 치프급 매니저가 없거든요. 다른 곳에서 영입하려고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먼저 소문이 날 텐데 그땐 우리가 나서면 됩니다.”

    록 이사의 말에 한지욱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하. 록 이사님 말씀을 들으니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우린 이대로 TOP 미디어 첫 작품이나 신경 쓰면 되겠네요. 레전드 필름 쪽에서도 합작에 관심이 있는 거 같으니 당장 일을 진행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두 회사가 합작한다고 기사를 먼저 흘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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