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8화 (109/261)
  • #108화. 레전드와 레전드

    노신사는 나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병철 감독.

    그는 진설과 같은 시대에 한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레전드 감독이다.

    최근까지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지속해 오다가 부인이 병에 걸리자 활동을 접고 병간호에만 전력을 쏟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시절 영화 촬영 때문에 집 밖으로 나돌아다녔기 때문에 아내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곁을 지키고 있다는 인터뷰가 기억난다.

    하지만 최 감독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인이 죽고 최병철은 은퇴했다.

    부인이 죽고 슬럼프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최 감독님이셨군요. 몰라뵀습니다. 현장에서처럼 모자와 선글라스를 안 쓰셔서 최병철 감독님인 줄 몰라뵀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사죄하자 최병철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생명의 은인께서 그게 무슨 말인가? 어서 일어나시게.”

    진설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원 대표가 이해해. 감독님은 아직도 빵모자를 써야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옛날 분이야. 최 감독님도 이제는 빵모자 좀 그만 쓰시라니까요?”

    “허허. 그게 내 트레이드마크 아니었나? 나는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낡은 상징이 뭐가 좋다고 웃으시는 거예요? 이제 다시 작품 활동하실 건데 이번에는 좀 신선하게 가자고요.”

    진설의 말에 나는 놀랐다.

    최병철 감독이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하는 건가?

    “최 감독님. 돌아오시기로 한 겁니까?”

    “박 감독님이 하시던 작품을 최 감독님께서 맡아 주시기로 했어.”

    레전드 필름의 영화를 최병철 감독이 한다고?

    “은퇴작으로 손색이 없을 거 같더군. 그래서 돌아왔어.”

    은퇴작이라.

    거장이 마지막 작품을 찍으려고 돌아온 것이다.

    웃는 최병철을 보니 갑자기 흥분됐다.

    최병철이야말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신작을 낸다니 관계자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가슴이 요동쳤다.

    “지금 원세강 대표가 시나리오 보려던 참이었어요. 최 감독님도 오늘 시나리오는 처음 보시는 거죠?”

    “내가 날을 딱 맞춰 왔군. 같이 보면 좋지.”

    진설은 나와 최병철을 탁자로 안내했다.

    탁자 위에는 내가 보려던 시나리오가 놓여 있었다.

    진설은 인쇄해 놨던 시나리오 한 부를 더 가져와 최병철의 손에 안겼다.

    나는 시나리오의 앞장을 먼저 확인했다.

    [구원의 밤]

    영화의 시작은 교도소였다.

    교도소에 수감된 연쇄 살인마 강동철의 앞에 경찰과 수화 통역사 최진이 찾아온다.

    구원의 밤은 잔혹한 연쇄 살인마 강동철과 농아인 그의 통역을 담당하는 수화 통역사 최진의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교도소의 접객실에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문답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특이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묘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매혹됐다.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심장이 떨렸다.

    나는 조용히 옆에 있는 최병철 감독을 힐끔 쳐다봤다.

    마침 최병철 감독도 시나리오를 다 읽고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놨다.

    진설은 최병철에게 먼저 물었다.

    “어떤가요?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마음에 안 들면 안 찍는다고 하셨잖아요.”

    “이거 박 감독이 직접 쓴 건가?”

    “예. 맞아요.”

    “박 감독 느낌이 물씬 풍기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장면이 연상되더군. 박 감독이 그리려던 앵글이며 극의 분위기가 모두 느껴져.”

    최병철의 말에 진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요? 좋다는 말씀이세요? 아니면 하기 싫다는 말씀이세요?”

    “당연히 좋지. 은퇴작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아.”

    진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최병철 감독의 역대급 칭찬을 들은 진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뛰었습니다. 비록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대단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걸 최병철 감독님이 찍어 주신다면 대한민국 영화의 전설이 될 작품이 탄생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진설과 최병철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원 대표가 이제 보니 아부가 되는 사람이네. 박 감독과 나를 동시에 띄워 주는데? 하하하.”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그런데 작품을 보니 배우의 연기가 중요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병철이 내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지. 강동철과 최진. 두 사람이 내내 대치하면서 극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둘 다 연기를 잘해야 해. 캐스팅은 쉽지 않겠어. 강동철 나이대는 생각나는 배우들이 몇몇 있는데 최진 나이대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진 대표는 어떻게 생각해?”

    최병철이 정곡을 찔렀는지 진설도 고민하며 답했다.

    “맞아요. 저도 최진 역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정 안 되면 나이대를 조정하려구요.”

    “흠.”

    최병철은 쉽게 대답하지 않고 고민에 빠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이 상황이 부러웠다.

    최진은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한 젊은 남자다.

    사십 대의 강동철과 이십 대의 최진.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지금이 딱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설픈 연기를 하는 배우를 최진으로 캐스팅하면 극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진설과 최병철이 고민하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남았다.

    저 역을 서이렌이 한다면 좋을 텐데.

    나는 최진이라는 역이 탐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이렌이 만약 이 작품을 하게 된다면 그녀의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될 거다.

    나는 고민하는 진설과 최병철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말했다.

    “저. 진 대표님. 그리고 최 감독님.”

    “원 대표 말해 봐. 왜 그러는데?”

    “최진이라는 역 말입니다. 반드시 남자여야 합니까?”

    내 말에 진설과 최병철의 두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최진은 강동철과 달리 인생에 굴곡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성격도 유약하고 강동철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죠. 제가 보기엔 여자로 캐스팅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진설과 최병철은 내 이야기가 신선한지 더 해 보라고 손을 내밀었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내 생각을 전했다.

    “제 생각일 뿐이니 편하게 들어 주세요. 제가 보기에 강동철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최진에게 집착합니다. 갓난아이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라며 학대당하던 강동철이라면 어머니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최진이 여자여야만 극이 더 살아날 거 같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이래저래 떠들었지만 결론은 최진을 여자로 바꾸자는 이야기였다.

    진설이 갑자기 웃더니 내게 물었다.

    “원 대표. 혹시 최진 역에 서이렌을 생각하는 거야?”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꿋꿋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 누구보다 서이렌이 최진을 잘 소화할 겁니다. 확신합니다.”

    “역시 매니저답네.”

    진설이 피식 웃더니 최병철 감독을 쳐다봤다.

    생각을 마친 최병철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좋네. 원 대표 말대로 최진이 여자인 편이 강동철이 그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더 극명하게 사는 것 같아. 그런데 박찬영 감독의 의견은 한번 들어 봐야 하지 않나? 시나리오 주인인데?”

    “그럴 필요 없어요. 박 감독님은 이 시나리오를 최 감독님께 넘긴 순간부터 이제 이건 최 감독님 작품이라고 하셨어요. 최 감독님이 좋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무조건 주인공은 남자라고 생각한 거죠. 원 대표가 한 건 한 거 같은데요?”

    진설이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미소에 답했다.

    사실 나는 최진이란 인물을 보자마자 그 역을 서이렌에 이입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럼, 우선 최진을 여자로 바꾸고 시나리오를 다시 써 봐요. 감독님.”

    “캐스팅은 어떻게 하고?”

    “우선 시나리오가 새로 나오면 그때 다시 논의해 봐요.”

    “그래. 그렇게 하자고.”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진설과 최병철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내 모습을 본 진설이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최진 역에 서이렌도 이름 올려 줄 테니까 그렇게 좀 쳐다보지 마.”

    “제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요?”

    “어휴. 지 배우 작품에 꽂고 싶어서 눈치 보는 거 다 보여.”

    “죄송합니다. 직업병입니다.”

    “캐스팅 건은 최 감독님이 결정하실 거야. 그런데 아마 서이렌 씨라면 최 감독님도 거절하지 않으실 거야.”

    최병철은 이미 서이렌의 작품을 본 적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었다.

    데뷔 삼 년 차.

    서이렌은 그녀의 인생의 대표작을 만났다.

    * * *

    1월 초, 스타탄생 식구들이 모두 병원에 모였다.

    건강 검진을 하기 위해 병원을 예약한 것이다.

    해피 스릴러 촬영을 시작한 윤이슬과 병원을 꺼리는 서이렌만 빠지고 다른 스타탄생 식구들은 모두 함께 왔다.

    옷을 갈아입고 온 강진석이 내 옆에 앉으며 불만을 늘어놨다.

    “아이고. 새벽 여섯 시가 뭐냐? 지금 시간이면 한창 늘어지게 잘 시간인데.”

    “왜요. 좋기만 한데요. 사람이 없고 조용하고.”

    “누가 새해 벽두부터 건강 검진을 받는다고 그래? 우리뿐일 거다.”

    강진석은 늘어지게 하품하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옆에 있던 빈선예, 이락은 그런 강진석을 보며 한 소리를 했다.

    “참나. 대표님이 우리 건강을 걱정해서 건강 검진까지 꼼꼼하게 다 챙겨 주시는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요?”

    “빈 팀장. 아침부터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제가 언제요?”

    이락도 빈선예를 거들었다.

    “강 이사님도 이제 건강 챙겨야 할 나이세요. 원 대표님이 정말 잘하고 계시는 거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어이구. 락아. 너까지 그러냐?”

    강진석은 자신을 노려보는 빈선예와 이락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마침 CT실에서 나온 나는 그 앞에 모인 스타탄생 식구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빈선예, 이락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지 내가 검사를 받으러 가는 곳마다 보였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겁니까?”

    “검사 결과 나왔어요? 어때요?”

    “방금 들어갔다 나왔는데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죠.”

    “아. 그런가?”

    “어서 들어가 봐요. 빨리 끝내고 갑시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강진석이 잔소리를 했다.

    “세강아. 나 아직 팔팔하다니까.”

    “알죠. 그래도 건강 검진은 빠지지 않고 받아야 합니다. 병은 언제 찾아올지 몰라요.”

    내 진지한 얼굴을 본 강진석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표가 이렇게 직원들 건강을 챙겨 주겠다는데 내가 딴지를 걸 순 없지.”

    나는 검사를 받으러 들어간 강진석을 보며 생각했다.

    형님은 나보다 오래 사셔야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스타탄생을 지켜 주세요.

    * * *

    건강 검진이 끝나고 나는 내가 치료를 받는 대학병원에 홀로 찾아왔다.

    지난주에 검사를 받았고 오늘이 그 결과를 듣는 날이다.

    내가 자리에 앉자 내 주치의가 나를 쳐다봤다.

    주치의의 행동과 눈빛이 평소와 다른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사의 앞에 놓인 심장 CT 사진을 쳐다봤다.

    언제나 그렇듯 시커먼 사진은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긴장해서 두 주먹을 꽉 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주치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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