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7화 (108/261)
  • #107화. 이자현의 진심

    우연미는 남자친구 앞에 서서 발표하는 것이 긴장됐는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보였다.

    우연미와 김지성이라니.

    두 사람이 연인이라니 대체 누가 믿을까?

    우연미는 마네킹이 끝나고 김지성을 찾아갔다고 했다.

    우연미는 왜 시어머니의 남자를 흑역사라고 말한 것인지 그에게 따져 물었고 김지성은 자신이 잠시 스타병에 걸렸다며 진심으로 사죄했다.

    당장이라도 치고받고 싸움이 날 것 같았던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어찌 된 일인지 술친구가 되어 자주 만났고 이렇게 지금은 연인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남녀의 일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우연미와 김지성의 비밀 연애의 총알받이가 되어 주기로 했다.

    나만의 마돈나의 이슈도 챙기고, 괜히 서유림 매니저한테 미안할 일도 없고, 우연미 작가의 비밀 연애도 막아 주고 일석삼조다.

    어차피 나는 곧 죽을 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떠들어도 상관없다.

    “우연미 작가님. 작년에 작가님이 쓰신 마네킹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고마워요. 이락 배우님. 저도 이락 배우님이 나온 오디션 예능을 다 찾아봤습니다. 우승하신 거 늦게나마 축하드려요.”

    우연미는 긴장했지만 의외로 자연스럽게 멘트를 쳤다.

    “작가님이 내년에 KBC에서 신작을 발표하신다죠? 마네킹을 함께 만든 미장센의 대가 이윤기 감독님과 다시 한번 뭉치실 거라고 들었었습니다.”

    “하하. 이락 배우님이랑 상관없는 작품처럼 말씀하시네요. 그거 남주가 이락 배우님인 건 아시죠?”

    우연미의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들렸다.

    두 사람 다 잘하네.

    나는 곧잘 멘트를 읊는 두 사람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 원세강 웃는 거 봐라. 좋단다.

    - 자기 새끼들 잘한다고 너무 좋아하는데. ㅋㅋㅋㅋ

    - 카메라가 원세강만 따라다녀. ㅋㅋㅋ- 우연미랑 이락도 케미 쩐다.

    - 원세강 알고 보면 얼빠 아니냐? 스본은 작가도 매니저도 다 얼굴 보고 뽑나 봐 ㅋㅋ- 본인 얼굴부터 특별하잖아 ㅋㅋ- 확신의 얼빠임.

    “이 정도로 홍보를 했으면 이제 본래의 업무로 돌아와 볼까요? 올해 KBC 드라마를 빛내 주신 작가상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연미 작가님이 발표해 주시죠.”

    이락이 자연스럽게 우연미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우연미는 올해의 작가상을 발표했다.

    상을 받는 작가가 무대 위로 올라오자 우연미와 이락이 뒤로 물러섰다.

    우연미가 이락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락아. 우리 잘한 거니?”

    “그럼요. 아까 객석에서 빵빵 터졌잖아요. 잘하셨어요.”

    이락이 큐카드 뒤로 엄지를 들어 보였다.

    * * *

    MBS 드라마 시상식은 두 여자가 휩쓸고 있었다.

    두 여자 테이블 위에는 트로피가 쌓여 있었다.

    우수 여자 연기상 트로피를 바라보던 서이렌이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 가지고 있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이자현만은 빈손이다.

    서이렌이 이자현을 보며 말했다.

    “기다리기 힘들죠?”

    이자현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마치 복화술을 하듯 살짝 입을 열었다.

    “죽겠다. 왜 방송국 시상식은 이렇게 날이 가면 갈수록 길어지는 거니?”

    “이제 다 온 거 같아요. 저기 무대 뒤에 MBS 사장님 대기하고 계시네요.”

    이자현은 서이렌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이자현은 옆에 앉아 있는 서이렌을 힐끔 쳐다봤다.

    두 여자를 찍는 오 개월 동안 서이렌과 내내 붙어 있으면서 느낀 건데 그녀는 너무 괜찮은 사람이었다.

    일로는 두말할 나위 없이 프로였고 인간적으로도 좋았다.

    톱스타인 자신을 어렵게 여기며 다가오지 않는 신인 배우들도 많은데 서이렌은 첫 만남부터 당당했다.

    서이렌이 자신처럼 원세강을 좋아한다는 건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알았다.

    원세강은 두 사람 모두와 연애할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당사자는 다르다.

    이자현도 처음에는 서이렌과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연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난 오 개월간 그녀와 촬영장에서 동고동락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원세강과 상관없이 서이렌과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서이렌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이자현은 서이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카메라가 비출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도 항상 표정을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자리가 익숙해진 이자현이지만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서이렌은 전혀 흐트러짐 없이 시상식 내내 표정뿐만 아니라 자세까지 꼿꼿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세 시간 내내 그렇게 웃고 있는데 안 힘들어?”

    서이렌이 이자현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특훈을 받았거든요.”

    “무슨 특훈?”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는 거요.”

    “옷가게에 놓인 마네킹 말이야?”

    “맞아요. 마네킹은 무슨 일이 있어도 포즈와 표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거든요.”

    이자현은 서이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 혹시 모델이 꿈이었니?”

    서이렌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이자현의 손을 잡았다.

    “언니. 대상이에요.”

    “어?”

    이자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무대 위를 바라봤다.

    MBS 사장이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고 공개홀이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서이렌이 이자현에게 말했다.

    “빨리 올라가세요. 모두 언니의 수상 소감을 기다리고 있어요.”

    “고마워. 이렌아.”

    이자현이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자현의 대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록 이사가 홍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상 기사 뜨기 시작했으니까 빨리 기사 풀어.”

    록 이사가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한지욱이 말했다.

    “이자현 대단해.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대상만 세 개째야.”

    “저런 톱스타를 소속 배우로 두신 대표님이 더 대단하시죠.”

    “하하하. 또 말이 그렇게 되나요?”

    “내년엔 TOP 미디어의 첫 작품으로 연기대상이 아닌 영화상을 받으실 테니까 기대하십시오. 영화 작품상 같은 경우는 제작사가 수상하러 올라가기 때문에 아마 한지욱 대표님께서 직접 수상하러 올라가셔야 할 겁니다.”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간다는 한지욱의 표정이 밝아졌다.

    록 이사와 한지욱이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그때, 텔레비전에서 이자현의 수상 소감이 들렸다.

    * * *

    이자현은 눈앞의 트로피를 보며 수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MBS, KBC에서 동시에 대상을 받았던 때보다 오늘 받은 이 상이 더 뜻깊었다.

    대상을 받고 슬럼프가 왔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지 못해 배우가 된 지 처음으로 오랜 공백기를 가졌다.

    혹시나 이제 내리막길만 남은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했다.

    이자현은 일 년이 넘게 옆에서 자신을 지켜 준 그녀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수상 소감에 사람들은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이자현은 마지막 소감을 위해 입을 열었다.

    “두 여자를 만난 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운명은 제게 쉽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두 여자를 만나게 해 주신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자현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원세강 대표님. 제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때 조언해 주신 덕분에 제가 나쁜 선택을 피하고 두 여자라는 제 운명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해요. 저를 스타로 만들어 주신 것도 감사하고, 이미 다른 회사 배우가 된 저를 여전히 챙겨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이자현의 수상 소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두 여자 테이블에 앉은 서이렌을 비췄는데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이자현을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 뭐야? 두 여자도 원세강이 하게 해 준 거였어?

    - 한지욱의 유일한 치적이 두 여자인데 이게 무슨 일이냐??

    - 대박. 원세강 의리 쩌네.

    - 이자현이랑 원세강 다시 만나 ㅠㅠㅠㅠㅠ

    - 이자현. 스본으로 와.

    - 원세강은 사람이 대체 왜 이럼? 나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네.

    - 이자현 팬인데 원 대표님 진짜 정말 고맙다. ㅠㅠㅠㅠㅠ

    - 이자현 올해 계약 끝나지 않나? 재계약했어?

    - 아직 재계약 소식 없음.

    - 원 대표님. 이자현 데리고 오자.

    인터넷 반응이 타올랐다.

    이자현 팬들은 원세강을 찬양했고, 스타탄생과 서이렌 팬들은 이자현이 스타탄생에 오면 좋겠다고 글을 쏟아 냈다.

    대기실에서 소감을 지켜보던 록 이사와 한지욱이 똥 씹은 얼굴로 텔레비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자현. 저게 미쳤나? 무슨 소감에 회사 대표 이야기가 하나도 없이 다른 회사 대표 이야기를 해?”

    한지욱은 얼굴을 붉힌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이자현과 서이렌의 투 샷을 노려봤다.

    록 이사는 다급한 손길로 인터넷 포털에 접속했다.

    TOP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TOP 미디어 기사는 온데간데없었다.

    [MBS 두 여자로 이자현 대상 수상]

    [이자현 전 매니저 원세강에게 감사의 인사 밝혀 화제]

    [이자현 역대급 기록 수립. 이십 대에 대상 세 개를 거머쥐다]

    [KBC에 나타난 원세강, 우연미 작가. 두 사람 사이에 포착된 묘한 기류는?]

    [원세강이 키운 두 여신, 이자현과 서이렌 MBS를 접수]

    포털의 기사는 온통 이자현, 서이렌 그리고 원세강뿐이었다.

    TOP 미디어로 검색해 보자 준비했던 기사가 이미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 소외된 채 처참한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록 이사.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한 대표님. 제가 홍보팀이랑 이야기해서 기사를 더 뿌려 보라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이자현 배우가 나 말고 원세강 대표를 추켜세우는 수상 소감을 한 게 더 큰 일 아닌가요?”

    록 이사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지금 이자현을 찾아가 왜 그런 수상 소감을 했냐며 따지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록 이사는 차오르는 빡침을 깊게 누르고 말했다.

    “이자현 배우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거기선 한 대표님에 관한 이야기가 꼭 나오게 하고, 그 인터뷰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거로 하죠. 어떻습니까?”

    “하. 이왕이면 오늘같이 좋은 날 내 이름이 나왔어야죠.”

    록 이사는 한지욱이 떠들라고 놔두고 다시 포털을 확인했다.

    포털 사이트뿐만 아니라 SNS, 커뮤니티가 온통 원세강 이야기밖에 없었다.

    서이렌을 키운 원세강.

    이자현을 키운 원세강.

    이락을 키운 원세강.

    스타작가 우연미와 원세강.

    모두에게 사랑받고 의리 있는 원세강.

    록 이사는 원세강이란 이름 세 글자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 * *

    새해가 지나고 일주일이 흘렀다.

    다음 주에는 스타탄생의 모든 식구가 건강 검진을 받는 날이다.

    강진석은 아직 젊은데 무슨 검진이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검진 결과서가 있어야 보너스를 받을 수 있도록 회사 내규를 고치자 바로 말을 바꿨다.

    나는 지금 충무로에 왔다.

    건물에 들어선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서 구 층 버튼을 눌렀다.

    구 층에 레전드 필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니 직원들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비 시사회에 진설과 함께 참석한 박진숙 팀장이 나를 안내했다.

    “진 대표님이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대표실로 들어가 보니 진설이 은테 안경을 쓰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안경을 쓴 그녀는 화려한 미모는 숨길 수 없었지만, 사업가 그 자체로 보였다.

    나는 가지고 온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넸다.

    “센스 있네. 보통은 난 화분 같은 거 가져오던데?”

    “바쁘시잖아요. 난은 키우기 어렵죠. 스타탄생 앞에 꽃집이 있는데 꽃을 보다 보니 진 대표님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샀습니다.”

    “고마워요.”

    진설은 꽃다발을 향기를 음미하고는 웃는 얼굴로 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진설이 대본을 건넸다.

    “레전드 필름의 후계자는 못 돼도 작품의 투자자는 되고 싶다는 거지?”

    “레전드 필름은 항상 옳았으니까요. 저도 거기에 숟가락 좀 올리고 싶습니다.”

    “곧 죽는다는 사람이 욕심이 많아.”

    진설은 내가 시한부라는 걸 알면서도 웃으며 농담을 했다.

    나는 그런 진설이 마음에 들었다.

    “내일 죽어도 돈은 벌어야죠.”

    “그런 태도 좋아. 봐 봐. 얼마나 가치가 있는 대본인지 원 대표가 직접 확인해 줘. 외부인은 원 대표가 처음 보는 거야.”

    “예. 그럼, 감사히 읽겠습니다.”

    나는 눈앞에 놓인 대본을 들었다.

    그때 대표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탁. 탁.’

    익숙한 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팡이를 짚은 노신사가 대표실에 들어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나는 놀란 눈으로 노신사를 응시했다.

    노신사 역시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자네가 여기에는 웬일이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그냥 발작이었어. 괜찮아.”

    노신사와 내가 서로를 알아보자 놀란 것은 진설이었다.

    진설이 내게 물었다.

    “원 대표. 최병철 감독님을 알아?”

    나는 놀란 눈으로 내 앞의 노신사를 바라봤다.

    지난번 나비 시사회에서 만났던 노신사는 오 년 전 은퇴한 거장 최병철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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