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연기대상에 등장한 커플
진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허브차를 들었다.
목이 너무 탔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진설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했겠네. 아픈 몸으로 스타탄생을 이끌어 가느라고.”
진설은 슬픈 눈을 하고 애써 웃고 있었다.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 덕에 지금까지 잘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병인지 물어봐도 될까?”
“말해도 모르실 겁니다. 희소병이에요.”
“가족들은 병에 대해 알고 있고?”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저 혼자예요.”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진설의 눈빛이 흔들렸다.
“병은 혼자 이겨 낼 수 없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혹시 회사에서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서이렌 씨는 알고 있을 겁니다.”
“서이렌만 안다고?”
진설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혹시 두 사람 사귀는 사이야? 나 어디에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 아니니까 편하게 얘기해 줘.”
“아닙니다. 서이렌 씨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저 배우와 매니저 사이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저로서는 지금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여력이 없습니다. 그저 제 앞에 닥친 일을 헤쳐 나가기도 벅찹니다.”
“그래.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
진설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탁자 위에 놓인 꽃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침묵이 내린 그때 김영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무슨 긴한 이야기 하시나 봐요. 차가 식었을 텐데 이거라도 드셔 보시죠.”
김영원은 우리 앞에 따뜻한 유자차를 내놓았다.
“고마워요. 형님.”
“야. 넌 볼 때마다 멋있어진다.”
“형님은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요. 내년에 큰 프로젝트를 진행하실 거라면서요?”
“그거 들었어?”
“연극판 삼대 극단이 뭉쳤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이야기 나눠. 진설 배우님. 드셔 보세요. 제주도에 사는 친동생이 직접 만들어서 보내 준 유자청으로 만든 겁니다. 너무 달지도 않고 좋아요. 따끈할 때 드세요.”
“사람 잘 챙기는 건 여전하네. 고마워. 잘 마실게.”
김영원이 웃으며 떠나자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진설은 유자청을 한입 마시고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원 대표도 들어 봐.”
“겨울에 여길 놀러 오면 김 선배가 항상 이걸 만들어 주시곤 하셨어요.”
“무슨 말로도 원 대표 마음을 돌려 볼 수가 없겠네.”
“죄송합니다.”
“원 대표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사정도 모르고 쳐들어온 내가 잘못한 거지.”
“진 대표님과 박 감독님 사이에 아드님이 계시지 않나요? 이제 스물 중후반이 됐을 거 같은데요. 왜 아드님께 회사를 물려주지 않으시고요?”
진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는 안 돼. 레전드 필름을 일 년도 안 돼서 말아먹을 거야. 지 앞가림이야 잘해야지.”
진설과 박찬영 감독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다.
지금까지 언론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나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제가 슬로우 댄스의 김주현 전무님과 친한데 그분께 여쭤봐서 다른 분을 찾아볼까요?”
“됐어. 영화판 인사들이야 내가 원 대표보다 더 속속들이 알고 있어. 난 더 신선한 사람을 원했던 거야. 감도 있는데 이 바닥의 고인 물이 아닌 사람. 바로 원 대표처럼 말이야.”
내게 병이 없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진설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
제작은 내가 꿈꾸던 인생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착잡한 기분까지 들었다.
대화를 끝낸 나와 진설이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린 대학로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제가 집까지 모셔 드릴게요.”
“됐어. 회사 동료가 근처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 그 차 타고 가면 돼.”
“조심히 가십시오. 눈이 많이 와서 도로가 미끄럽습니다.”
걸어가던 진설이 갑자기 뒤돌아서서 내게 걸어왔다.
진설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기적이 있다고 믿어?”
“예?”
“난 기적이 있다고 믿어.”
진설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박 감독님이 처음 위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삼 개월도 살지 못할 거라고 했어.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수술을 받았고 의사가 말한 삼 개월을 넘겼지.”
“진 대표님…….”
“그 후로도 오 년을 넘게 사셨어. 지금 병이 재발했다고 해서 오 년이란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는 않더라. 내 생애 제일 행복했던 시간이었어. 그건 아마 박 감독님도 마찬가지일 거야.”
진설의 말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진설을 바라봤다.
진설은 내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기적은 있어. 그러니까 믿어. 안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찾아올 리가 없잖아.”
“예. 대표님.”
진설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거세지는 눈보라에 점차 희미해졌다.
기적이라.
나는 기적이 있다고 믿게 됐다.
서이렌을 만난 일도.
빈선예가 나를 따라온 일도.
내가 이락을 찾아갔던 일도.
지난 이 년간 내가 겪은 모든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따뜻해진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며 뒤돌아섰다.
* * *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한 나비는 역대급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다.
천만 감독 윤명현의 신작.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서이렌 주연 작품.
스타메이커로 핫한 이락과 윤이슬의 출연.
모든 것이 나비의 흥행에 도움을 줬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입소문까지 나면서 나비의 흥행은 더욱 가속화됐다.
TOP 사무실에서 쏟아지는 나비의 기사를 보던 록 이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록 이사의 앞에는 홍보팀장이 서 있었다.
“김 팀장. 우리 보도자료는 준비가 다 됐어요?”
“예. 이사님. 언론에 풀 자료 모두 준비해 뒀습니다. TOP 미디어의 시작을 알리는 기사인데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록 이사가 달력을 확인했다.
이틀 후면 MBS 연기대상이 열린다.
두 여자의 성공으로 이자현의 대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혹자는 서이렌과 이자현이 공동 대상을 수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어불성설이다.
투톱이라 해도 두 여자를 이끌어 간 건 제1롤인 이자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 만난 MBS 사장도 이자현이 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록 이사를 안심시켰다.
“이자현 대상 타자마자 기사 내보내는 거 잊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이목이 쏠린 시기에 기사 터트리면 큰 홍보가 될 겁니다.”
“알았으니 나가세요.”
홍보팀장이 나가자 록 이사는 나비 기사로 도배된 포털로 눈을 돌렸다.
“이틀 후면 이자현 대상과 TOP 기사로 도배되겠지. 하하.”
록 이사는 야비하게 미소 지으며 인터넷 창을 껐다.
* * *
우연미의 신작 ‘나만의 마돈나’ 제작 소식이 떴다.
[막장의 여왕 우연미. 신작으로 돌아오다]
[톱스타와 매니저의 사랑을 담은 우연미 작가의 신작]
[막장에서 연상연하 커플의 로맨스로 탈바꿈한 우연미 작가의 신작]
[막장의 여왕 우연미 돌아오다]
기사가 뜨자마자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 우연미 신작 떴다.
- 톱스타랑 매니저의 사랑 이야기래. 미친. 이거 작가 얘기잖아.
- 우연미 연애하는 거 맞아? 그냥 루머 아님?
- 소문이긴 한데. 드라마 내용 보니까 사실인 듯 ㅋㅋㅋㅋ- 로맨스래. 이거 망하는 거 아니냐?
- 우연미 로맨스 잘함.
- 막장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시남이랑 마네킹 둘 다 로맨스 파트 쩜.
- 존나 기대된다고.
- 이윤기 우연미 조합을 또 보는 거냐고 미쳤네 ㅠㅠㅠㅠㅠ내 예상대로 우연미의 열애설 루머와 더불어 그녀의 신작 소식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