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4화 (105/261)

#104화. 거절의 이유

내 머릿속에 처음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진설이 나를? 왜?

이내 주변의 시선도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박주오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이렌 씨 캐스팅 때문에 원세강 대표를 찾아오신 거군요. 알겠습니다.”

진설이 자신을 보러 온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박주오는 김이 팍 샌 기분으로 뒤로 물러섰다.

진설은 나를 보며 우아한 손짓을 보냈다.

“일정 다 끝난 걸로 알고 있어요. 같이 가죠.”

“예. 대표님.”

나는 고개를 돌려 박주오 옆에 서 있는 강진석을 바라봤다.

강진석과 눈빛을 주고받은 나는 진설에게 다가가 말했다.

“가시죠. 제가 조용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죠.”

* * *

TOP 사무실에서는 김경록이 기획안을 검토하고 있다.

TOP가 영입한 박호중 감독과 진철한 작가 건넨 기획안을 모두 읽은 김경록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인어 공주’라는 영화의 시놉시스와 대본이 놓여 있었다.

“좋네요. TOP 미디어의 출발이 아주 좋아요.”

김경록의 만족한 표정을 보자 박호중과 진철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성제 대표님께서 TOP 미디어에 대한 걱정이 크십니다. 우리가 첫 작품을 제대로 터트려야 합니다.”

“록 이사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진철한 작가가 대박을 뽑아 왔습니다. 대본을 읽자마자 이건 될 거라는 감이 팍하고 왔어요.”

박호중 감독은 신이 난 표정이었다.

진철한은 박호중과 함께 KBC 소속이던 중견 작가다.

이번에 KBC와 계약된 횟수를 모두 채우고 시장에 풀린 걸 박호중 감독이 제의해서 함께 TOP 미디어로 왔다.

두 사람 모두 계약금을 역대급으로 받고, 그것도 모자라 TOP 미디어의 지분도 일부 받았다.

이번 작품이 성공하면 지분을 보유한 그들은 돈방석에 앉게 된다.

록 이사는 제목과 감독, 작가만 덩그러니 쓰여 있는 대본을 보고 말했다.

“주연은 이자현, 김선우예요. 대본에 대문짝만하게 박읍시다.”

그의 말에 진철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록 이사는 그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진 작가.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진철한은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남주는 김선우 좋습니다. 요즘 작품이 지지부진해서 위기라지만 막강한 한류 팬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주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쓴 겁니다.”

“그게 누군데요?”

“서이렌 씨요.”

서이렌의 이름이 불리자 록 이사뿐만 아니라 박호중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록 이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진 작가. TOP 미디어는 TOP, LOK 배우들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는 회사예요. 서이렌은 다른 회사 소속이라고요.”

“자회사 배우만 쓰는 제작사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에 다른 회사 배우가 웬 말입니까? 이건 이자현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서이렌을 생각하며 대본을 썼던 진철한은 내심 기분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록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만 미팅 끝냅시다. 저녁엔 TOP 일정이 있습니다.”

진철한 작가가 먼저 이사실을 나가고 박호중이 록 이사에게 다가왔다.

박호중은 록 이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시네요.”

록 이사는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다운되긴요. 다 잘되고 있는데 뭐가 문제라고요.”

록 이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최근에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았다.

동생인 김경진이 경찰 조사를 받고 결국 LOK에서 나간 일이 제일 컸고, 한지욱의 닦달도 심해져만 갔다.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다큐가 방송되고 한지욱의 어록이 인터넷에서 밈화돼서 떠돌아다니자 그 화풀이를 록 이사에게 한 것이다.

록 이사는 박호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작품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죠. 날 징계한 KBC에 보란 듯이 성공할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역시 박 감독의 그런 자신감 좋습니다. 그럼, 어서 나가 보세요. 나도 정리하고 나가 봐야 합니다.”

“예. 이사님.”

박호중이 나가고 록 이사는 약속 장소로 나가기 전에 메일을 확인했다.

메일함을 모두 확인하고 포털 메인 페이지로 돌아온 록 이사는 페이지의 한가운데 떠 있는 기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대급 반응이 쏟아진 나비 시사회 현장]

[나비로 두 번째 천만 영화를 노리는 윤명현 감독]

[나비 제작 발표회를 위해 스타탄생 총출동]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매니저 원세강 나비 제작 발표회에 참석]

포털 메인에 뜬 기사 사진 속에서 원세강을 발견한 록 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제 세상이구나.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기사를 내리던 록 이사의 손이 멈칫했다.

하단에 뜬 기사 타이틀을 본 록 이사는 눈을 의심했다.

[영화계 대모 진설, 스타탄생 원세강을 보러 직접 방문]

“진설? 그 진설이라고?”

록 이사는 당황한 손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 속에는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진설이 우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기사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록 이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한국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레전드 필름의 대표인 그녀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충격적인데 문제는 그녀가 원세강을 만나러 왔다고 직접 말했다는 것이다.

“진설이 원세강을 만날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화가 난 록 이사는 그대로 포털 창을 닫아 버렸다.

자신이 한 발짝 앞으로 가면 원세강은 두세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갔다.

LOK에 있던 지난 십 년간 원세강에게 충분히 자격지심을 느꼈다.

원세강이 LOK에서 나가고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왜 이렇게 저 자식이 꼴 보기가 싫지? 대체 왜 저렇게 잘나가는 건데?”

* * *

대학로에 도착한 나는 진설과 함께 건물의 이 층으로 향했다.

“제가 잘 아는 선배님이 운영하는 커피숍입니다. 손님이 없어서 우리를 방해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가시죠.”

좁은 계단을 오르는 진설이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엘리베이터는 있는 곳으로 가지 그랬어? 나 이제 무릎 수명이 다했다고.”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제 손 잡으세요.”

내가 손을 내밀자 진설이 망설이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카페에 들어오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김영원이 뛰어나왔다.

김영원은 나와는 눈인사만 하고 지나쳐 버리고 곧바로 진설 앞으로 달려갔다.

“진설 배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설은 볼이 빨개져서 수줍게 웃는 김영원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카페 사장이 많이 보던 사람이네. 극단 운영도 바쁠 텐데 카페도 같이하는 거야?”

“먹고살려면 별수 있나요?”

“마루 이제 잘나가고 있는 거 아닌가?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제 배우들 월급 줄 정도는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죠.”

김영원은 우리를 카페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선배님은 에스프레소로 드시죠?”

“기억력은 여전하네. 김 단장이 만들어 준 에스프레소 맛은 어떤지 기대할게.”

“기다리고 계시죠. 최선을 다해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김영원이 웃으며 사라지자 진설이 맞은편에 앉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원 대표는 텔레비전에 나오더니 이제는 연예인 같네.”

당황한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오늘 시사회랑 제작 발표회가 있어서 과하게 꾸민 겁니다. 평소에는 절대 이렇게 하고 안 다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왜? 내가 뭐라고 그랬나? 남자든 여자든 보기 좋게 차려입고 다니면 좋지. 원 대표도 잘 어울리니까 계속 이러고 다녀.”

이내 김영원이 방금 뽑은 커피를 내놨다.

진설은 에스프레소 맛이 좋다며 김영원을 칭찬했다.

김영원이 떠나고 다시 단둘이 남자 진설이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만날 거라고 했지?”

“예. 그러셨죠.”

“내가 왜 원 대표를 만나자고 했을 거 같아?”

“글쎄요. 혹시 서이렌을 캐스팅하고자 찾아오신 건가요?”

“그래서 내가 원 대표를 찾아왔다고 생각한 거야? 캐스팅 때문에?”

“그것 밖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진설은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은데 참아야겠지? 요즘 밤잠이 통 안 와서.”

천하의 진설이 왠지 모르게 긴장한 듯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레전드 필름이 최근 몇 년간 제작을 쉰 건 알고 있을 거야.”

“박찬영 감독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레전드 필름이 제작을 하지 않는 거지 투자랑 영화 수입은 지속해서 하고 있죠. 그 성과도 아주 좋고요. 다 선배님의 선구안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작사인데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 회사는 죽은 회사지. 이러다가 레전드에서 필름이란 두 글자를 떼야 할 지경이야.”

진설은 대체 왜 나를 찾아온 걸까?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내가 투자하는 영화마다 투자자 목록에서 같은 이름을 봤어. 원세강. 바로 자네 말이야.”

“…….”

“난 처음에 나를 따라서 투자하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지. 287일은 엎어질 뻔한 걸 감독을 찾아가서 제작할 수 있게 연줄을 다 잡아 준 걸로 알고 있어.”

“저에 대해 많이 알아보셨네요.”

“당연하지. 레전드 필름의 후계자를 정하는 건데 허투루 할 수는 없지.”

후계자라고?

나는 순간 너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박 감독님이 아프신 건 알고 있다고 했지? 위암이셔.”

나는 너무 놀라서 뭐라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첫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이제 괜찮다 싶었어. 그래서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으려고 한창 바쁘게 일하셨지.”

나는 진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진설은 담담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재발하셨어. 아무래도 영화 제작에서 손을 떼셔야 할 것 같아. 영화 제작뿐만 아니라 레전드 필름의 모든 걸 내려놓으셔야 해. 나도 일을 내려놓고 박 감독님을 지켜야 하고.”

그녀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당황스러웠다.

“그럼, 서이렌 배우님을 캐스팅하기 위해 저를 찾아온 게 아니셨군요.”

“난 원세강 당신을 캐스팅하러 왔어. 레전드 필름을 맡아 줘.”

너무나도 놀라운 제의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레전드 필름이라.

지금은 작품 활동이 뜸하지만 대한민국 영화의 르네상스 열었던 시기에 이름 그대로 전설적인 작품을 쏟아 냈던 회사다.

그런 위대한 제작사에서 나를 원한다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제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자현을 키우면서 생각한 거다.

그때는 내 배우가 할 작품을 내가 직접 만든다는 생각으로 제작에 뜻을 품었지만, 사실은 작품을 만든다는 그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떨리던 내 심장은 곧 잠잠해졌다.

나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안주머니에 든 약병이 만져졌다.

안 되겠지.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거겠지.

내가 씁쓸하게 웃자 진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나는 거절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진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한 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못 할 거 같습니다.”

진설은 내 표정을 보고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미래를 알 수 없는 제작사를 맡는 거보다는 스타탄생에 집중하는 게 낫겠지.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찔러 볼 걸 그랬어. 스타탄생이 이렇게 크기 전에.”

씁쓸한 진설의 표정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진설의 눈에 물음표가 떴다.

“아니라고? 그럼, 왜 거절하는 건데?”

“사실은 제가…….”

나는 잠시 숨을 내쉬었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다.

막상 내 입으로 직접 말하려니 갑자기 슬퍼졌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시한부입니다. 이제 일 년 정도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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