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3화 (104/261)
  • #103화. 전설이 만나러 온 사람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갈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목이 쏠려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단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사를 진행할 MC가 자연스럽게 내 등장을 알렸다.

    “스타탄생의 원세강 대표님이 조금 늦게 도착하셨습니다. 눈치 보지 마시고 천천히 올라오세요.”

    스태프가 발 빠르게 이락과 빈선예의 옆자리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뒀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앉자 이락이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대표님. 늦으셨네요.”

    나는 이락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노신사는 다행히 무사히 병원에 이송됐다.

    나는 병원까지 따라갔고 노신사가 깨어난 모습을 본 다음 안심하고 이곳에 왔다.

    나는 감독이 인터뷰하는 틈을 타 이락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시사회 반응은요?”

    “최고였어요. 대표님이 보셨어야 했는데. 영화도 진짜 진짜 재미있었고, 관객들 반응도 너무 좋았어요.”

    이락의 설레는 눈빛을 보니 진심으로 영화가 좋았나 보다.

    나도 가편집본은 봤지만, CG가 들어간 최종본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편집본으로도 영화의 재미는 충분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이렌이 마이크를 들고 본인 소개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비에서 신비로운 발레리나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과거를 지닌 여전사인 제이(J) 역을 맡은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은 말을 마치고 객석에 모인 기자들을 향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눈인사를 건넸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며 회장 안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서이렌은 플래시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영화를 찍는 동안은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제가 했던 수많은 고민과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서이렌이 감독과 동료 배우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회장 안에는 다시 한번 카메라 불빛이 번쩍였다.

    기자들은 제작 발표회장을 압도하는 서이렌의 카리스마에 혀를 찼다.

    “슈스네. 슈스야.”

    “데뷔한 지 이 년밖에 안 된 신인이 대단해.”

    감독인 윤명현과 남주인 김도진, 조연인 구영진의 인사가 이어졌고 이내 이락과 윤이슬의 차례가 되었다.

    이락은 윤이슬에게 먼저 하라고 손짓했고 윤이슬이 웃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윤이슬이 해피 스릴러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은 이미 지난주에 기사로 나왔다.

    윤이슬은 긴장한 얼굴로 마이크를 들고 기자들 앞에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비에서 서이렌 배우님의 스턴트를 담당한 윤이슬입니다. 제가 배우도 아니고 스턴트로 영화에 참여했는데 이렇게 저까지 제작 발표회에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윤이슬은 벌벌 떨면서도 할 말을 빠지지 않고 다 했다.

    이락은 그런 윤이슬을 보며 잘했다며 눈짓을 보냈다.

    이내 이락이 마이크를 들었다.

    스타메이커 이후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 그런지 기자들은 서이렌만큼이나 이락에게 관심을 보였다.

    눈을 뜨지도 못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렸고 이락은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어이구. 안녕하세요. 저는 기술자의 제자인 칠구 역을 맡은 이락입니다. 그런데 너무 번쩍이네요. 다른 배우님들은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를 하신 겁니까? 대단하네요.”

    이락의 두 눈을 찡그리며 버벅대자 장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저도 윤이슬 배우님과 마찬가지입니다. 운 좋게 작은 역에 출연한 것인데 이렇게 저까지 제작 발표회에 불러 주시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락의 인사까지 끝나고 이제 기자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내가 마이크를 들자마자 장내에 다시 한번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나는 내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했지만 빨리 끝내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저야말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무리수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시고 여기 계신 감독님과 배우님들께 많은 질문 부탁드립니다.”

    내가 인사를 마치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작 발표회는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방금 영화를 보고 나온 기자들은 나비가 흥행작이 될 것임을 확신했고 모두 기분 좋게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 * *

    진설의 옆에는 레전드 필름의 박진숙 팀장이 함께였다.

    박진숙이 진설에게 물었다.

    “대표님. 대체 오늘 시사회는 누구 때문에 오신 겁니까?”

    “글쎄. 내가 누구 때문에 온 거 같아?”

    박진숙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윤명현 감독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명현 감독님이요?”

    “아냐. 틀렸어.”

    감독이 아니라면 배우겠지.

    박진숙은 이내 서이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서이렌인가 보네요. 그 작품의 여주로 캐스팅하시려고요?”

    “서이렌도 나쁘지 않지. 오늘 보니까 나를 따라 하긴 했어도 연기는 곧잘 하는 거 같더라.”

    “역시 서이렌 보러 오신 거군요.”

    “겸사겸사 온 거야.”

    진설은 말을 아꼈다.

    그때 MC가 윤명현 감독에게 물었다.

    “그럼, 이락 배우님이 즉석에서 캐스팅된 거군요. 신기하네요. 만약 이락 배우님이 그때 캐스팅되지 않았다면 우린 스타메이커에 출연한 배우님을 못 봤을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지금도 생각하면 놀라운 것 같습니다. 촬영을 다 끝내고 한참 편집 중인데 조감독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우리 영화에 출연한 조연이 예능에 나온다고 해서 놀라서 찾아봤었죠. 하하.”

    윤명현은 앞자리에 앉아서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박주오를 쳐다봤다.

    스타메이커가 터지고 제일 좋아했던 게 바로 박주오다.

    “대단하십니다, 감독님. 역시 윤 감독님 안목은 따라올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종종 그렇게 현장에서 즉석에서 캐스팅하시나 봐요?”

    “아닙니다. 사실 이번 캐스팅은 전적으로 원세강 대표가 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원세강 대표님이라고요?”

    일순 기자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관심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감독님. 썰을 조금만 더 풀어 주시죠. 대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MC가 묻자 윤명현이 웃으며 그날 촬영장에서 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라 당장 촬영이 지연될 뻔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원세강 대표님께서 이락 배우님을 데리고 오시더라고요. 이락 배우님이 열쇠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그 자물쇠를 열 수 있다고 말입니다.”

    “대단한 우연이네요.”

    “그렇죠. 원세강 대표님 말씀을 듣고 이락 배우한테 연기를 시켜 봤는데 이거다 싶더라고요.”

    “그럼, 감독님은 그때 이락 배우가 될성부른 나무라는 걸 눈치채셨군요.”

    “예. 맞습니다. 이락 배우가 대사를 내뱉는데 처음 연기를 하는 사람치고는 감정 전달력이 매우 좋더군요.”

    “오. 그랬었군요. 그럼, 원세강 대표님이 모든 걸 아시고 감독님께 의견을 제시하신 건가요?”

    MC가 나를 향해 질문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락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줄 몰랐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다며 답했다.

    기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원세강 대표가 알고 보면 능력이 대단해.”

    “LOK 내에서는 나름 유명했대.”

    “하긴 이자현과 서이렌을 톱스타로 키워 냈는데 능력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거겠지.”

    * * *

    제작 발표회가 끝나자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비는 잘하면 윤명현 감독의 전작을 뛰어넘겠어. 전작이 몇만이었지?”

    “간신히 천만을 넘겼지. 천백만이었나? 그것도 막판에 힘 떨어져서 배급사에서 반값 표 풀어서 가능한 수치였어.”

    “나비는 이벤트 없이도 더 빨리 천만 관객을 넘을 거 같지 않아?”

    기자의 말에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스타탄생은 내년에도 엄청나게 성장하겠네. 이제는 독보적인 서이렌에 한창 뜨고 있는 이락이랑 윤이슬까지.”

    “그러게, 말이야. 오늘 보니까 원세강 대표란 사람이 능력이 상당한 거 같던데. 이러다가 삼파전이 구도가 무너지는 거 아닌가?”

    “LOK, 숲 엔터 그리고 골드. 여기에 스타탄생도 끼게 되는 건가?”

    “그렇지. 내년에 재미있게 돌아갈 거 같은데. 하하.”

    기자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사라졌고 진설과 박진숙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진숙이 진설에게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가실 건가요? 회사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만나러 가야지.”

    “누굴요?”

    “저 사람.”

    진설은 제작 발표회를 끝내고 단상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 * *

    제작 발표회가 끝나자 그제야 숨이 편하게 쉬어졌다.

    이것도 못 할 짓이다.

    이런 과도한 관심을 24시간 내내 받는 스타들은 정말 피곤할 거다.

    하지만 이대로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내 배우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이렌과 이락, 윤이슬을 한데 모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모두 잘했어요. 서이렌 씨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인터뷰였습니다.”

    “당연하죠. 전 언제나 잘해요.”

    당당한 서이렌의 웃음을 보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배우님도 잘하셨어요. 이렇게 큰 행사에 서는 게 처음인데도 하나도 안 떨고 잘하셨어요.”

    “어휴. 얼마나 떨었던지 손이 땀 때문에 축축해요.”

    “저는 어깨가 아파요.”

    이락과 윤이슬은 너스레를 떨며 서로를 보고 웃었다.

    그때였다.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우리는 무슨 소리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박주오 대표와 윤명현 감독 앞에 선 진설 일행을 확인했다.

    진설이 여긴 웬일이지?

    진설이 온 줄 몰랐던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박주오 대표는 진설이 나타나자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엔진의 박주오 대표지요?”

    “제 이름까지 아십니까? 예. 제가 박주오입니다.”

    진설의 열렬한 팬인 박주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동안 시사회에 초대해도 안 오시더니.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영화는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이쪽은 윤명현 감독인가?”

    윤명현 감독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천만 영화감독이라도 영화계 레전드 앞에서 햇병아리일 뿐이다.

    “윤 감독이 재능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 영화를 보니 그 재능에 한계가 없는 거 같더라고요. 축하하고 고마워요. 좋은 영화 보게 해 줘서.”

    “너무 영광입니다. 선배님.”

    윤명현은 레전드의 찬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박주오는 광대를 씰룩이며 진설에게 물었다.

    “진설 대표님. 저희가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함께 식사라도 하러 가실까요?”

    “미안하지만 볼일이 있어서요.”

    진설의 말에 박주오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일이 있으시다니 어쩔 수 없죠.”

    진설은 박주오, 윤명현과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스타탄생 배우들과 함께 서 있는 나와 진설의 눈이 마주쳤다.

    뭐지? 방금 진설이 나를 본 건가?

    당황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진설은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때 다시 한번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 했었지.

    오늘이 그날인가?

    나는 옆에 서 있는 서이렌을 힐끔거렸다.

    진설은 레전드 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그녀의 회사에서 하는 신작에 서이렌을 출연시키려고 직접 찾아온 거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인상을 풀고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먼저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화계의 큰 어르신인 진설 대표님을 뵙습니다. 원세강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나이가 든 거 같잖아. 오랜만이에요. 원 대표.”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 대표님.”

    어느새 서이렌과 이락, 윤이슬도 내 옆자리로 와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진설은 그들의 인사를 받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만나러 왔어요.”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배우들과 함께 자리를 마련할까요?”

    “아니. 거창한 자리는 필요 없어요. 난 원 대표만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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