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00화 (101/261)
  • #100화. 씬 넘버 38

    나는 박상규라는 남자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박상규과 그의 친구들은 엘리베이터가 이십일 층에 도착할 때까지 지난 과거 이야기를 하며 우연미를 험담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나가자 나는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딜 가도 저렇게 몰려다니며 자기들이 잘난 줄 알고 어깨를 세우는 놈들이 있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에는 마침 우연미로부터 톡이 들어와 있었다.

    [대표님. 나 방금 우리 열애설 친구들한테 들었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우연미는 그 이후에도 톡을 쏟아 냈다.

    [지금 여기로 오는 길이죠?]

    [혹시 대표님도 열애설 때문에 나 만나자고 한 거예요?]

    [미치겠네. 내가 아니라고 해도 친구들이 안 믿어요.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난 겁니까?]

    [대표님. 빨리 와요.]

    쏟아지는 메시지에 나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 작가님.”

    [원 대표님. 제가 보낸 메시지 보셨어요?]

    “예. 봤습니다.”

    [우리 열애설 난 거 보셨어요?]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아 대박. 내가 열애설이 나다니. 그것도 원 대표님이랑. 나 성공하긴 했나 봐요.]

    어라? 나는 예상외의 우연미 반응에 깜짝 놀랐다.

    “기분 나쁘지 않아요? 루머잖아요.”

    [좋은데요? 내가 강 이사님이랑 열애설이 났으면 기분이 나쁘겠죠. 그런데 아니잖아요. 원 대표님이랑 났는데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친구들도 나보고 부럽다고 난리가 났어요. 하하.]

    호탕하게 웃는 우연미 작가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보통 자신이 이런 소문에 휘말렸으면 화를 낼 만도 한데 우연미는 대범하게 소문을 즐기는 것 같았다.

    “강 이사님이 들으시면 화내시겠네요.”

    [대표님이 비밀 지켜 주시면 되죠. 그런데 지금 어디에 계세요?]

    “저 지금 서울호텔 이십일 층입니다.”

    [벌써 오셨어요?]

    “놀라서 헐레벌떡 뛰어왔어요.”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요?]

    “사실은 저도 여기에서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일 친한 친구가 아직 안 와서요. 그 친구만 보고 바로 나갈게요.]

    “아닙니다. 제가 기다릴게요. 천천히 즐기다 나오세요.”

    [어차피 볼 사람은 다 봤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아싸여서 친구가 없거든요. 십분 아니 이십 분만 기다려 주세요.]

    우연미와 전화를 끊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힐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을 피해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 * *

    화장실로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안에 앉아 있던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야. 상규야. 우연미 만나면 어떻게 좀 해 봐.”

    “미쳤냐? 내가 우연미 같은 찐따랑 사귀게?”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우연미 지금 스타 작가야. 대본 한 편에 몇천씩 받아. 미니시리즈 하나 끝나고 나면 수억 벌걸?”

    돈 이야기에 박상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번다고?”

    지금까지 우연미를 무시했던 박상규는 그녀가 억대 연봉의 스타 작가라고 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때? 갑자기 없던 마음도 동하지?”

    “근데 우연미 연애한다고 했잖아. 아까 애들이 그러던데?”

    “그거 아니야. 내가 진숙이한테 물어봤는데 우연미가 그거 루머라고 웃더란다. 원세강이면 스타메이커란 예능에 나와서 인기 많은 매니저인데 그런 사람이 뭐 하러 우연미랑 사귀냐?”

    “우연미 돈 많다며? 그럼, 가능한 이야기 아니야?”

    “일반 매니저가 아니야. 서이렌이 있는 회사 대표라고.”

    “그래? 그럼, 우연미는 지금 솔로라는 거지?”

    “그렇다니까. 한번 작업 걸어 봐. 밑져야 본전이지. 그리고 걔가 여전히 너 좋아할 수도 있잖아.”

    “하긴 나를 안 좋아하면 그건 여자도 아니지.”

    미친놈.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박상규를 눈으로 훑었다.

    대화를 나누던 친구는 먼저 나가고 박상규 혼자 화장실에서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응. 자기야. 지금 서울호텔 스카이라운지야. 그냥 동창들 만나는 거지. 여자가 어디에 있어? 우리 토목과라니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내가 동창회 끝나면 다시 전화할게.”

    박상규는 전화를 끊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와 얼굴을 확인했다.

    “캬. 잘생겼어. 누가 봐도 혹할 얼굴.”

    * * *

    “야. 저기 상규 온다.”

    “누구?”

    “네가 화이트데이 때 고백했다가 차였던 걔. 박상규.”

    친구의 말에 우연미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박상규는 샴페인 잔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대학교 이 학년 때 우연미는 박상규에게 고백하고 차였다.

    혼자 고백하고 차인 거지만 어느새 학교 전체에 그 일이 소문이 났고 우연미는 창피해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우연미의 앞에 다가온 박상규가 들고 있는 샴페인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오랜만이다. 예뻐졌네. 몰라볼 뻔했어.”

    우연미는 박상규의 칭찬에 미간을 찡그렸다.

    “안 받아? 팔 떨어지겠다.”

    “어. 그래.”

    샴페인 잔을 건네받은 우연미의 볼이 빨개졌다.

    오랜만에 박상규를 보니 과거의 일이 떠올라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박상규는 우연미 볼의 홍조를 자신 때문이라고 오해했다.

    “연미 너는 그대로네. 하나도 안 변했다.”

    “박상규 너도 마찬가지야. 어쩜 그렇게 사람이 그대로니?”

    “아냐. 난 변했어.”

    “뭐?”

    “난 더 멋있어졌잖아.”

    “…….”

    “미안. 농담이야.”

    박상규의 느끼한 미소를 보며 우연미는 코웃음을 쳤다.

    “넌 나 안 미워? 내가 그때, 네 고백 매몰차게 거절했잖아.”

    “당연히 밉지. 나 너 때문에 학교도 휴학했어.”

    “미안하다. 그게 그렇게 학교에 소문이 다 날 줄은 몰랐어.”

    “그래? 난 네가 일부러 퍼트린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거 오해야.”

    “그래? 그럼, 우리 단둘이 있었던 일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도 다 알게 된 걸까? 난 제일 친한 친구한테도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박상규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해야. 내가 소문 안 냈어. 네가 사탕 바구니 들고 오는 거 사람들이 보고 오해한 거라고.”

    우연미는 박상규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탕 바구니는 무슨. 하나도 기억도 못 하면서. 그때 너한테 편지 써서 주고 사탕은 주지도 않았다고. 이 나쁜 새끼야.’

    우연미는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켜고 빈 잔을 박상규에게 내밀었다.

    “어?”

    “받아. 잘 마셨어. 속에서 열불이 났는데 간신히 진화했네.”

    “무슨 소리야?”

    “여기 좀 덥지 않니? 히터를 너무 세게 틀어서 그런가? 야. 나 손 떨어지겠다. 빨리 빈 잔 받아.”

    “어. 알았어.”

    얼떨결에 우연미가 건넨 빈 샴페인 잔을 받은 박상규를 얼굴을 굳혔다.

    우연미는 박상규를 웨이터처럼 취급하고는 뒤돌아섰다.

    “아. 우연미. 내 말 좀 들어 봐.”

    박상규는 테이블 위에 샴페인 잔을 대충 올려 두고 떠나는 우연미의 팔을 낚아챘다.

    깜짝 놀란 우연미가 뒤로 돌아섰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 우연미의 팔을 낚아챈 박상규의 팔을 뿌리쳤다.

    우연미 앞에 나타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가님 그거 알아요? 작가님은 항상 내 앞에서 누군가에게 팔을 잡히더라고요.”

    “대표님……?”

    우연미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두 눈이 커졌다.

    “어떻게 들어왔어요? 이따 보기로 했잖아요.”

    “내가 마음이 급해서요. 빨리 작가님 보려고 왔죠. 내가 잘못했나요?”

    나와 우연미가 대화를 나누자 근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 사람 원세강 아니야?”

    “어머? 진짜네. 원세강 맞아.”

    “우연미랑 저 대표랑 진짜로 사귀나 봐.”

    우리에게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박상규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우연미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작가님. 혹시 시어머니의 남자에 나왔던 장면 기억나세요?”

    “무슨 장면이요?”

    “여주가 선보러 갔다가 나쁜 놈 만나잖아요.”

    “아. 그거요. 기억나요. 28화 씬 넘버 38.”

    “와. 되게 자세히 기억하시네요.”

    “제가 시남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지금이 그 상황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때 여주가 겪었던 일이 지금 작가님이 겪고 있는 일입니다.”

    “뭐라고요?”

    우연미는 깜짝 놀라며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주위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나와 우연미가 귓속말로 대화하는 걸 보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둘이 진짜 사귀나 봐.”

    “아닌데. 우연미가 아까 루머라고 했어.”

    “그럼 사귀는 사이 아니고 썸 타는 사인가 보지.”

    “우연미 대박이다. 작가로 성공하고 저렇게 멋진 남자랑 썸도 타고.”

    “근데 진짜 잘생겼다. 원세강에 비하면 토목과 킹카 박상규는 오징어인데?”

    사람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박상규가 열받는지 화를 냈다.

    “저게 뭐가 잘생겼어. 그냥 일반인이잖아.”

    “야. 이 새끼 왜 이러냐? 우연미 애인 있다니까 충격받은 거 같은데.”

    “아니라고.”

    “그 똥 씹은 표정이나 어떻게 하고 그런 말을 해라. 크크큭.”

    우연미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씬 넘버 38에서 여주는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선 자리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대학 동창을 만나지만 그는 애인이 있는 사람이다.

    여주 집안의 돈이 탐나서 애인이 있는 것을 숨기고 선 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여주는 남자의 속내도 모르고 그가 만든 어장에 제 발로 들어갔다.

    시청자들이 여주는 바보라며 한탄하고 있을 때 남주가 쳐들어오며 극이 반전된다.

    우연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내게 물었다.

    “대표님. 그럼 지금 내가 지금 여주고 대표님은 남주인가요?”

    “그렇게 된 거 같네요.”

    우연미는 저쪽에 동창들과 함께 수군거리는 박상규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와. 기분 더럽네요.”

    “친구분 만났어요?”

    “오늘 못 온다고 연락 왔어요.”

    “그럼, 저랑 나가실까요?”

    뒤돌아서려던 우연미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잠깐만요. 이 씬은 끝내고 나가요.”

    우연미의 말에 나는 시어머니의 남자를 회상했다.

    내가 박상규라는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우연미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야 씬이 끝난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저도 사회적 지위란 게 있으니 봐주세요.”

    “대표님. 그럼, 이건 어때요?”

    * * *

    박상규와 그일 일행은 술을 마시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연미 쟤는 왜 거짓말을 한 거야? 동창회에 에스코트하러 온 거면 사귀는 거 아니냐?”

    “아주 난리가 났구나. 야. 원세강이 그렇게 유명해?”

    “내 여동생이랑 엄마는 진짜 좋아하긴 하시더라.”

    박상규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연미를 보며 화가 나는지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번에 마셨다.

    “야. 상규야. 천천히 마셔. 샴페인도 술이야. 계속 그렇게 마시다간 취해.”

    “그냥 놔둬라. 속이 쓰리겠지. 크큭.”

    친구의 말에 박상규가 눈을 치켜떴다.

    “씨발. 조용히 해라.”

    그때 친구들 사이를 해치고 나와 우연미가 그에게 걸어갔다.

    박상규 일행은 우연미가 다가오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우연미 옆에 바짝 붙어서 그들을 바라봤다.

    박상규란 사람은 술을 꽤 마신 모양인지 얼굴이 시뻘겋다.

    “난 이제 가 봐야 할 거 같아.”

    “그래. 연미야. 바쁘더라도 동창회에 빠지기 말고 와라. 우리 학번 중에 네가 최고로 잘 나가잖아.”

    “알았어. 작품 쓰느라 바쁜 거 아니면 꼭 올게.”

    우연미는 말을 하며 박상규를 바라봤다.

    “상규야. 난 네가 제일 고맙다.”

    “뭔 소리야?”

    “그때 네가 소문 퍼트려서 내가 휴학했잖아.”

    “제길. 내가 소문 안 냈다고.”

    박상규가 화를 내며 휘청거리자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자리에 앉혔다.

    “취하셨나 봐요.”

    “이거 놔. 이 새끼야.”

    “친구분들이 좀 봐주시죠.”

    “야. 박상규. 좀 가만히 있어.”

    친구들은 박상규의 팔을 잡고 그를 붙잡았다.

    우연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휴학하고 나 작가 교육원에 들어간 거야. 생각해 보면 그 일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어. 고마워. 박상규.”

    우연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박상규에게 미소를 보냈다.

    박상규는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줄곧 나와 스킨십이 없었던 우연미가 갑자기 내게 팔짱을 꼈다.

    “대표님. 포르쉐 가져오셨어요?”

    포르쉐라는 말에 박상규를 포함한 친구들의 두 눈이 커졌다.

    난 차가 없다.

    지금 가지고 다니는 차는 그냥 중형 세단이고 그마저도 스타탄생 법인 차량이다.

    하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을 하고 우연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미는 여기에 한술 더 떴다.

    “잘됐네요. 내 포르쉐는 지금 수리 중이라서 안 가져왔어요. 나온 김에 드라이브나 하고 들어가죠.”

    면허가 없는 우연미의 거짓말에 박상규와 친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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