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스위트 홈
상가 건물의 옥상을 둘러보던 이락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대표님. 여기 너무 좋은데요?”
나와 강진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락에게 다가갔다.
“장사가 잘될까? 역에서 너무 떨어져 있지 않아?”
강진석의 물음에 이락이 고개를 저었다.
“저기 아파트 단지도 있고 반대쪽에는 철물점 거리잖아요. 손님들은 많을 거예요.”
“그런가?”
나는 이락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바로 옆 동네가 대연동인데 상관없겠어요?”
내 말에 이락이 웃으며 답했다.
“대표님도 보셨죠?”
“뭘요?”
“마지막 결승전에 보스가 왔던데요? 형님들 죄다 데리고.”
“이락 배우님도 봤어요?”
“한가운데서 양복 쫙 빼입고 나란히 앉아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못 봐요? 카메라 감독님도 신기한지 계속 잡던데요?”
“그렇긴 했죠.”
나와 이락이 소곤대자 강진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 빼고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무슨 얘기 했어? 락아. 네가 말해 봐.”
“정말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이락은 강진석을 벗어나 옥상을 한 바퀴 돌면서 말했다.
“여기가 딱 맞아요. 일 층에는 이모네 식당을 차리면 되고 이 층에 이모가 삼 층에는 나랑 엄마가 살면 되잖아요. 옥상에는 작은 텃밭도 키울 거예요. 저기에 흔들의자도 놓고 가끔 올라와서 여기서 차도 마시고요. 어때요?”
이락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여기로 계약합시다.”
내 말에 이락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강진석과 나는 좋아하는 이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형님. 이 광고는 꼭 찍읍시다. 윤이슬 배우님과 이락 배우님의 동반 광고인데다 조건도 나쁘지 않아요.”
내가 들이민 CF안을 본 강진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대광그룹 이미지 CF잖아. 그것보다는 유진전자 핸드폰 광고가 훨씬 낫지. 대광그룹이랑 유진전자가 라이벌 관계라서 둘 다 못 찍어.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난 유진전자 쪽이야.”
“유진전자는 단발 계약이잖습니까? 제가 보기엔 대광그룹이 좋을 거 같습니다.”
대광그룹이 우리에게 오퍼를 한 CF는 대한민국 광고 대상까지 타는 유명한 작품이다.
다른 건 다 놓쳐도 저것만은 반드시 해야 한다.
성공하는 CF이기 때문에 장기 계약을 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유진전자가 너무 아까운데.”
“형님이 지난번에 그러셨죠? 제가 손대는 것마다 술술 풀린다고요.”
“그랬지.”
“이번 것도 그럴 테니까 저를 믿어 주시죠.”
내가 자신감 있게 나오자 강진석은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자.”
강진석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럼, 정리해 보자. 락이는 대광그룹, 태양제과, 피자월드 이렇게 세 개로 하고, 이슬이는 대광그룹, 섬유유연제, 코크콜라 이렇게 세 개. 맞지?”
“예. 그렇게 세 개씩만 합시다.”
“에이. 오퍼 들어온 거 싹 다 하고 싶지만 그건 내가 봐도 무리수다. 이미지 소비가 너무 커. 네 말대로 하자.”
강진석이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나가는 강진석을 불렀다.
“내일. 잊지 않으셨죠?”
“락이 이모님 이사 오시는 거 말이지?”
“예.”
“그걸 어떻게 잊어. 오후 두 시쯤에 서울에 이사차가 도착하니까 늦지 않게 가자. 넌 오전에 뭐 하지?”
“저는 오전에 두 여자 촬영장에 갈 겁니다.”
“오케이. 그럼, 열두 시에 내가 촬영장으로 너 픽업하러 갈게.”
* * *
오전에 인터뷰 스케줄을 마친 이락과 윤이슬이 오늘 이사 들어오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누나는 그냥 집에 가서 쉬라니까요.”
“어떻게 그래. 나도 인사드려야지.”
“고마워요. 누나.”
“나도 고마워. 나 인터뷰 버벅댈 때마다 네가 나 도와주잖아.”
“그건 누나가 정말 대답을 엉망으로 하니까. 내가 도저히 못 듣겠어서…….”
이락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윤이슬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이락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 누나. 내가 실수했어.”
윤이슬은 금방 눈빛을 풀었지만, 이락은 다시는 윤이슬을 놀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커다란 트럭이 보였다.
그런데 예상했던 포장 이사 트럭이 아닌 용달이었다.
2.5톤 용달에 낡아 빠진 세간살이가 실려 있었고 차 안에는 운전사와 이모부 그리고 가운데 자리에 이종사촌인 정희진이 끼어 있었다.
용달차에서 이모부 정호택이 내리자 이락이 다가갔다.
“이모부. 오셨어요?”
“락아.”
정호택이 웃으며 이락을 불렀다.
그는 아침부터 짐을 싸고 옮기느라 피곤해 보였지만 표정만은 좋았다.
“희진아. 너도 왔어?”
“오빠. 우리 아빠 좀 말려 봐요. 포장 이사 하자니까 기어이 용달을 불렀어.”
정희진은 2.5톤 트럭에 실린 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덧 용달차 옆에 스타탄생 카니발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나와 강진석이 용달차를 보고 기겁했다.
“포장 이사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정호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장 이사 비용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짐도 얼마 안 돼서 제가 옮기면 됩니다. 저기 용달 아저씨가 같이 옮겨 주실 겁니다.”
그런데 용달차 운전자가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짐 내려놓고 바로 가야 하겠소.”
“예? 하지만 내릴 때도 도와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올 때 차가 막혔잖소. 저녁에 이 차 반납하려면 빨리 가야 해. 시간이 없소.”
“아. 그렇군요. 그럼, 짐만 내려 주십시오. 제가 옮겨야죠.”
용달차 운전자는 나와 강진석을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짐꾼은 많네. 그럼, 안심하고 가겠수다.”
나와 강진석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정호택은 자신이 혼자 할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재킷을 벗고 팔을 걷어붙이자 이락이 놀란 얼굴로 다가와 나를 말렸다.
“대표님. 뭐 하시는 거예요?”
“이삿짐 나르는 거 도우려고요.”
“어휴. 제가 할게요. 대표님은 저기서 쉬세요.”
“괜찮아요. 보니까 짐이 별로 없네요. 장롱같이 무거운 건 다 처분하고 오셨네요.”
“그래도 안 됩니다. 그냥 건물 안에 들어가서 가만히 서 계세요.”
“난 괜찮은데…….”
그때 강진석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만들 싸워. 내가 일꾼 부를게. 이런 서비스 많아.”
강진석이 정리를 하자 이락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약한 척을 많이 했나?
이락이 나를 너무 챙기려고 든다.
내가 씁쓸한 마음으로 고개를 드는데 멀리서 시커먼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쫙 빼입고 양손에 화장지, 세제를 바리바리 들고 오는 그들은 다름 아닌 최용팔 일당이었다.
최용팔을 본 나는 놀라 뒤를 돌아봤는데 마침 이락이 그들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보스!”
이락은 환하게 웃으며 최용팔에게 달려갔다.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이락과 웃으며 인사하는 최용팔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락이 최용팔을 보자마자 말했다.
“딱 맞춰서 잘 오셨어요. 짐 옮기는 것 좀 도와주세요.”
“뭐여? 사람을 불러 놓고 일꾼으로 쓰려는 거야?”
“전에 저 월급도 안 주고 많이 부려 먹으셨잖아요. 이럴 때 갚으시는 거죠.”
“이놈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이제는 기어오르네.”
“쳇. 저 때리시면 백만 안티가 대연동에 몰려갈 겁니다.”
“백만은 무슨. 뜨더니 사람이 변했네. 변했어.”
이락과 최용팔이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최용팔이 데리고 온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민수야. 얘들 풀어서 짐 옮기자.”
“예. 보스.”
* * *
최용팔 일행이 도와주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이 층에 짐을 모두 옮기고 최용팔과 그의 부하들은 일 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정희진은 자신의 방을 확인했다.
이락과 내가 침대와 책상 같은 가구는 미리 들여 놔서 정희진의 짐이라곤 옷 가방과 책가방밖에 없었다.
정희진은 생전 처음 생긴 자신의 방을 보고 울컥했다.
어느새 이락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이 촌스럽게 핑크로 하자고 하셔서 내가 막았어. 깔끔하게 흰색으로 골랐다. 괜찮지?”
“응. 마음에 들어. 오빠.”
정희진은 침대가 생겨서 기쁜지 침대에 앉아 새 이불 냄새를 맡았다.
“이모랑 우리 엄마는 언제 오셔?”
“내일 퇴원하실 거야. 일부러 이모랑 엄마 퇴원 전에 이사하려고 서둘렀어.”
“잘했어. 오늘을 봐. 내가 포장 이사하자고 그렇게 졸랐건만 돈 몇 푼 아끼겠다고 용달차를 불렀다가 개고생할 뻔했잖아. 오빠 팬들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내 팬들?”
“응. 그 사람들 오빠 팬이잖아. 나도 잘 알아. 인터넷에서 유명해.”
“유명하다고?”
“저렇게 쫙 빼입고 스타메이커 결승전에 왔었잖아. 커다란 플래카드도 들고 왔다던데. 잠깐만.”
정희진은 인터넷을 뒤지더니 사진 한 장을 찾아 이락에게 보여 줬다.
[대연동의 자랑 이락. 우승하자!]
플래카드에 적힌 글을 본 이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근데 오빠. 나 오빠를 어떻게 불러? 오빠 이름은 이락이 아니라 우석이잖아. 이우석.”
“집에선 우석 오빠라고 해. 그래야 엄마가 안 헷갈리실 거야.”
“알았어. 그럼, 대외적으로만 이락인 거지?”
“응. 예명은 그대로 이락으로 할 거야.”
이락과 정희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 전화다.”
* * *
일 층 식당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식당 안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음식 냄새도 가득 찼다.
이미 식당 집기를 다 들여놨기 때문에 이모부인 정호택이 이사를 마친 기념으로 요리를 한 것이다.
최용팔의 옆에 앉은 나는 그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최용팔은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어쨌다고 그러시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정호 국장을 찾아간 것도 최용팔 당신이었죠?”
“우리가 어두운 곳에서 살긴 하지만 의리라는 것도 있어. 한때 부하였던 놈이 당하는데 그냥 볼 수는 없지.”
최용팔은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눈에서 이락을 생각하는 마음이 보였다.
나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락이가 그 골목에 버려진 일에 대해 아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최용팔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건 왜 묻는 거야?”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할 것도 많네.”
“모르시나요?”
“몰라.”
최용팔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정호택이 웃으며 주방에서 나왔다.
“십 년 전에 중국집에서 일했었는데 음식 만드는 걸 까먹지 않았더군요.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했습니다. 드시죠.”
정희진과 이락이 식당에 앉아 있는 최용팔 일행에게 음식을 돌렸다.
탕수육과 짜장면 그리고 라조기였다.
이락은 제일 먼저 깡치 앞에 음식을 올려놨다.
“많이 드세요.”
“그래. 맛있게 먹으마.”
정호택이 만든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당장 중국집을 다시 해도 될 정도였다.
음식을 먹던 최용팔이 내게 말했다.
“락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거야.”
“예?”
“지는 갓난쟁이 때 골목에 버려졌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락이가 네 살 때 골목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 거야. 손에 상자를 꼭 쥐고 있더군.”
나는 놀란 얼굴로 최용팔을 바라봤다.
최용팔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뭐, 보육원에서 도망이라도 쳤나 보지. 알 게 뭐야.”
최용팔은 말을 마치고 탕수육을 입에 밀어 넣었다.
나도 더는 캐묻지 않고 입을 닫았다.
한참 식사하며 떠들고 있는데 강진석이 식당 벽에 걸린 텔레비전 앞에 섰다.
“우리 락이랑 이슬이 CF가 온에어를 시작했다네요. 같이 봅시다.”
강진석이 텔레비전을 틀자마자 이락과 윤이슬의 대광그룹 이미지 광고가 흘러나왔다.
민수는 텔레비전 속의 이락을 보며 한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네가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다. 허여멀건 두부같이 생긴 녀석인데 말이야. 자고로 남자란 나처럼 눈썹도 두껍고 목도 두꺼워야 하는데 말이야.”
정희진은 민수를 째려봤다.
민수의 얼굴을 확인한 정희진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다.
“뭐야? 무슨 개소리세요?”
정희진의 팩트 폭력에 식당 안에 모인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