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수술을 마친 이락의 어머니가 창원에서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에 도착한 나는 먼저 강진석을 만났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네가 더 고생했지. 락이는 지금 이모님과 함께 병실에 있어.”
“수술은 잘 끝난 겁니까?”
내가 사정을 묻자 강진석이 주위를 둘러봤다.
병원 복도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모여들고 있었다.
“차로 가서 이야기하자.”
“예. 형님.”
나는 강진석과 함께 병원의 주차장을 찾았다.
차에 타자 강진석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그러세요?”
“속상해서 그런다.”
“왜요? 왜 그렇게 속상하신 건데요?”
강진석은 답답한지 담배를 찾다 놀라 웃었다.
“아! 나 담배 끊었지.”
강진석은 은단을 꺼내 한입에 털어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상자 말이야. 그게 락이 아버님이 일하던 공장에서 생산하던 거란다. 락이 아버님이 편지를 써서 그 안에 넣고 어머님께 청혼했었나 봐.”
병원에서 본 이락의 가족 중에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긴장한 채 물었다.
“이락 배우님의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죠?”
“돌아가셨어. 락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공장에서 사고로. 만삭이던 락이 어머님이 그 일로 정신을 놓으셨대. 락이는 창원에서 태어났는데 락이 어머니가 매일 공장에 찾아가니까 이모님이 창원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셨나 봐. 그런데 이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에 어머니께서 어린 락이를 데리고 집을 나간 거야.”
“하…….”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연에 나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모님이 락이 어머님을 찾았을 때는 어머님 혼자였고 락이가 없더래. 사정을 알아봤더니 아이를 업고 있는 정신 나간 여자가 있으니까 경찰들이 발견하고 시설에 데리고 갔었나 봐. 거기서 어머니랑 락이랑 잠시 지내다 락이는 보육원으로 가게 됐다고 하는데 왜 락이만 대연동에서 발견된 건지 모르겠대. 어머님도 기억을 못 하셔서 아무도 진상을 몰라.”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십 년 전에 자살 기도를 하셨었나 봐. 그날 이후로 과거 기억을 다 잃으셨대.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모조리 다.”
“그럼, 락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시나요?”
“지금은 그래. 그런데 웃긴 게 락이는 그게 더 좋대. 어머니가 괴로운 기억을 안고 사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사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내 눈가가 점점 뜨거워졌다.
말을 하는 강진석은 이미 시뻘게진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머님 병은 어떠세요?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하. 그것도 참.”
강진석은 답답한지 차창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을 쐰 강진석이 입을 열었다.
“세상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심장판막증이 있으셔. 수술할 수 있는 병인데 그걸 못하고 내버려 둬서 이렇게 된 거래. 창원 이모님 댁 형편이 좋지 않은가 봐. 이모님이 다 내 잘못이라면서 우시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락이랑 붙들고 통곡했다.”
강진석은 그날 일이 떠오르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눈에도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강진석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락이가 배우 하길 정말 잘한 거 같아. 스타메이커에 출연한 것도 마치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이제 다 잘될 겁니다.”
“그럼, 당연하지. 네가 결승전에서 말한 대로 우리 락이는 이제 꽃길만 걸을 거다.”
순간 강진석이 두 눈이 빨개진 채 나를 쳐다봤다.
“세강아.”
“예. 형님.”
“상금이 얼마나 됐지?”
“상금이요? 스타메이커 말씀하시는 거죠?”
“응. 그거 상금이 얼마였지?”
“일억입니다.”
일억이라는 말에 눈물범벅인 강진석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걸로 당장 이모님이 진 빚부터 갚자.”
* * *
강진석과 나는 함께 창원으로 내려왔다.
서울의 병원에 있는 이락은 지금 빈선예가 지키고 있다.
이모님 댁은 창원에서 식당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산업도시인 창원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보였는데 이모님 댁이 위치한 동네는 낙후된 곳이었다.
창원에는 지금 이락의 이모부 정호택과 그의 딸인 정희진이 남은 가족이 남아 있다.
이모님이 적어주신 쪽지를 가지고 우리는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식당은 예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장 입구의 낡은 백반집에 사람들이 몰려 있던 것이다.
“저긴가 본데요?”
“그러네. ‘희진이네 밥집’ 맞다.”
강진석과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밥집으로 들어갔다.
좁은 식당 안은 이미 만석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웃으며 우리에게 달려왔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아뇨. 저희는 다른 일로 왔습니다.”
“혹시 기자신가요?”
“기자요?”
“가십시오. 저희는 기자와 할 말이 없습니다.”
남자의 행동을 보아하니 이미 기자가 여럿 다녀간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자 쓰고 온 모자와 안경을 벗고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이락 배우님이 우리 회사 소속 배우님이십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내 명함을 받아 든 그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 프로그램에 나오신 분이신가요?”
“예. 맞습니다. 텔레비전과 비슷하죠?”
“어이쿠. 이게 웬일입니까.”
사내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손으로 닦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락이를 보살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내는 내 손을 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와 사내의 대화를 듣던 식당 안의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서울에서 왔나 보네.”
모두가 이락의 이모님 댁 사정을 잘 알고 있는지 웃으며 덕담을 했다.
“희진 아빠. 이제 살림 피겠네. 요즘 유명한 배우라면서?”
“희진이네가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아이고야. 내가 왜 눈물이 나냐? 희진이네는 잘될 줄 알았어. 그럼, 잘돼야지.”
마침 학교를 마친 소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는 그녀의 아버지와 손을 잡은 내 얼굴을 살폈다.
소녀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놀라 외쳤다.
“원세강이다!”
* * *
식당 안쪽에 살림하는 방이 있었다.
거실과 방 하나로 되어 있었는데 방이 부족해서 거실도 방으로 쓰는 거 같았다.
이락의 이모부인 정호택이 우리에게 차를 내왔다.
접이식 양은 밥상에 투박한 커피잔을 올려놓자 달콤한 인스턴트커피 향이 비좁은 거실에 퍼졌다.
방 안에는 정희진이라는 어린 소녀가 들어가 있는데 방문을 살짝 열고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정호택에게 수술 경과부터 말해 줬다.
“지영숙 님은 수술은 잘됐고 지금 회복 중이십니다.”
“예. 희진이 엄마한테 들었습니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호택은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하긴 그러니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락의 어머니를 지금까지 이 작은 집에서 부양하며 함께 살았을 거다.
내가 강진석에게 눈짓하자 강진석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양은 밥상 위에 올려놨다.
정호택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락 배우님이 이모님 가족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합니다.”
“가족끼리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감사의 인사라니요. 가족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열어 보시죠. 이락 배우님이 직접 찾아뵙고 전달해 드리고 싶다고 했었는데 아직은 병원을 떠날 수가 없어서 저희가 대신 내려온 겁니다.”
나는 흰 봉투를 정호택의 앞으로 밀었다.
봉투를 바라보던 정호택이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안에는 이락이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어머니를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담긴 편지였다.
정호택은 그것을 보며 미소와 함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편지를 다 읽고 웃으며 그것을 내려놓는데 내가 말했다.
“봉투 안에 편지 말고 뭔가 하나 더 있을 겁니다.”
“다른 거요?”
“예. 확인해 보세요.”
정호택이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 든 종이를 꺼내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정호택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이게 대체 뭡니까?”
“스타메이커에서 이락 배우님이 우승한 건 아시죠?”
“예. 알다마다요.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는데요.”
“우승 상금 일억입니다.”
일억이라는 말에 정호택이 멈칫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이락 배우님이 원하시니까요. 이 댁에 빚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영숙 님의 치료비와 그 밖의 다른 일 때문에 빚을 지셨다고요.”
“…….”
정호택은 떨리는 눈빛으로 수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빚이 오천이었다.
원금은 갚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이자만 갚기에도 버거운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걸 갚고도 남을 돈이 눈앞에 있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걸 어떻게 받습니까?”
“받으셔야죠. 지금까지 이락 배우님의 어머니를 돌봐 주셨지 않습니까?”
“한 게 없습니다. 제대로 치료도 못 해 줘서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했는데 어떻게 이걸 받습니까? 염치가 없어서 못 받겠습니다.”
“살아나셨잖아요. 그게 중요한 거죠. 받아 주십시오. 이걸 전달하지 못하고 서울로 가면 이락 배우님께 제가 한 소리 듣습니다.”
정호택은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수표를 들고 떨고 있었다.
보다 못한 강진석이 수표를 빼앗아 봉투에 넣고 정희진을 불렀다.
“희진아. 너 듣고 있지. 나와 봐라.”
정희진이 방문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이거 네가 가져가서 챙겨 놔라.”
“그래도 돼요?”
“빨리 가져가. 아저씨 팔 아프다.”
정희진이 냉큼 방에서 나오더니 강진석이 건네는 봉투를 채 갔다.
강진석과 나는 똘똘한 정희진을 보며 웃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희진 양. 아버지 옆에 앉아 볼래요? 내가 물어볼 말이 있어서 그래요.”
“저한테요?”
“예. 두 분 모두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
정희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서울로 올라올 계획은 없으신가요?”
“서울이라고요?”
“이제 이락 배우님과 함께 사셔야 하지 않습니까? 서울에 함께 살 집이 있다면 올라오시겠습니까?”
정호택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같이 살고는 싶은데…… 저희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상금으로 빚을 해결한다 해도 이 좁은 집의 보증금으로는 서울에 구할 곳을 구하기 어려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집을 얻어 드리겠습니다.”
“집을 구해 주신다고요?”
“예. 지금처럼 계속 식당을 하실 수 있도록 상가 주택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일 층에는 식당을 하고 위층에는 가정집이 있는 상가 주택이요. 제가 어릴 때 그런 집에 살았습니다. 잘 알아보고 살기 편하고 장사하기 편한 곳으로 골라 드릴게요.”
정호택은 너무 몰라서 정신을 못 차렸다.
그는 다 식어 버린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정희진은 그녀의 아버지와 달리 웃으며 물었다.
“정말요? 정말로 서울로 이사 갈 수 있나요?”
나는 정희진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녀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락이 오빠가 그렇게 돈이 많아요?”
“학교에서 요즘 이락 배우님 인기가 어떤가요?”
“장난 아니에요. 학교에 가면 다들 락이 오빠 이야기만 해요. 그리고…….”
정희진은 상기된 뺨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원세강 대표님도 인기가 많아요.”
나는 그녀의 말에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까지 챙겨 주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진짜로 원세강 대표님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알았어요. 암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이락 배우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겁니다. 들어온 CF만 해도 수십 개예요. 대본은 말할 것도 없고요. 어차피 지금 이락 배우님이 사는 집이 좁아서 새집을 얻어 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전혀 부담 같은 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희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정호택은 여전히 얼떨떨한 상태였다.
나는 정희진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희진 양은 이제 이락 오빠한테 잘 보여야 할 겁니다. 그래야 용돈을 많이 받죠.”
“헤헤. 용돈도 주시는 건가요?”
나는 순수한 이락의 가족들을 보며 한없이 가슴이 따뜻해졌다.
* * *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강진석이 내게 물었다.
“세강아. 락이 CF는 아직 계약서에 도장도 안 찍었어. 계약을 한다고 해도 그거 정산되려면 일 년은 지나야 할 텐데?”
“미리 정산해 줍시다. 지금 스타탄생 자본금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배우를 위해서는 그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알지. 잘 알고말고. 우리 이왕 이렇게 된 거 크게 한 통 쏘자. 그리고 락이가 정산금의 두 배, 세 배로 벌 때까지 열심히 굴리면 되지.”
운전하던 강진석이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기분이 좋아서.”
웃는 강진석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차창 밖에 보이는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높고 푸르렀고 태양은 온 세상을 자애롭게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