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94화 (95/261)
  • #94화. 마지막 무대(2)

    - 미친. 원세강이 뭘 한다고 ㅋㅋㅋ

    - 이락 대신 무대에 올라왔는데 뭐라도 할 수 있지.

    - 개소리 ㅋㅋㅋ

    -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끌리는데?

    - 다들 미쳐 돌아가는구나 ㅋㅋㅋㅋ

    상황실에서 생방송 무대의 총괄 프로듀싱을 진행하고 있는 최욱환에게 조연출이 다가왔다.

    “최 PD님. 반응이 나쁘지 않아요.”

    “그래? 그럼 다행이긴 한데. 실시간 시청률은 어때? 이락 안 나온다고 하니까 훅 꺾이지 않았어?”

    “아뇨. 오히려 올랐어요.”

    “올랐어?”

    “예. 이락 배우 가족 찾아서 생방송에 못 나온다고 기사 나자마자 사람들이 궁금했는지 생방송 찾아보고 있나 봐요.”

    최욱환의 얼굴이 밝아졌다가 이내 어두워졌다.

    “궁금해서 찾아봤다가 채널 돌리겠네. 지금 실시간 시청률 떨어지는 추세지?”

    조연출이 태블릿 PC를 최욱환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아뇨. 계속 오르고 있어요.”

    “뭐라고?”

    라이플 코리아라는 시청률 조사 회사에서 제공하는 실시간 시청률은 다음 날 제공되는 실제 시청률과 100%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느 부분에서 시청률이 떨어지고 오르는지 추이가 꽤 정확하게 나온다.

    최욱환이 본 실시간 시청률 그래프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생방송이 시작된 이후 시청률이 급격하게 오른 이후로 완만한 곡선으로 시청률이 증가하고 있었다.

    “오케이. 좋았어.”

    최욱환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어젯밤 원세강에게 이락의 소식을 듣고 방송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그였다.

    하지만 편성된 한 시간 반의 프로그램에서 출연자 한 명이 빠지자 그걸 메울 대책이 없었다.

    “지금부터 시청률 곤두박질쳐서 반 토막 나도 선방한 거야.”

    “그렇겠죠?”

    “잘 만하면 원세강 대표가 낸 아이디어가 먹힐지도 모르겠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대책 회의 때문에 어젯밤 한숨도 못잔 최욱환과 조연출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 *

    박선호의 첫 번째 오디션이 시작됐다.

    배우들은 오늘을 위해 총 세 가지의 연기를 준비해 왔다.

    박선호는 첫 번째 연기로 진설 주연, 박찬영 감독의 불새를 선택했다.

    박찬영 감독은 진설의 남편이자 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끈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진설과 함께 공동 대표로 레전드 필름을 이끌어 가고 있다.

    박찬영 감독은 자신은 영화와 결혼했다며 평생 혼자 살 것을 천명하고 오십 평생 홀로 살았다.

    하지만 쉰한 살이 되는 해에 마흔 중반이 된 진설과 결혼하게 된다.

    듣기로는 이미 오래전에 둘은 사랑에 빠졌고, 진설의 연기 인생을 위해 박찬영 감독이 희생했다고 했다.

    연애와 결혼이 여배우에게 치명적이던 과거를 떠올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대 뒤에서 박선호의 연기를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지난날 영화 시사회에서 진설과 만난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진설 배우님이 조만간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 했었는데.

    대체 그게 뭐였을까?

    레전드 필름은 최근 작품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

    박찬영 감독의 몸이 아프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레전드 필름에서 제작한 작품이 없는 거지, 투자와 외국 영화 수입은 계속 진행하고 있다.

    진설이 안목이 좋은 건지 투자하는 작품마다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고 들었다.

    진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박선호가 첫 번째 오디션 연기를 끝냈다.

    관객들은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박선호의 연기를 감상하고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객석이 떠나갈 정도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박선호가 연기를 끝내고 무대를 떠나자 MC 최혁이 마이크를 들었다.

    “박선호 배우님의 첫 번째 연기 잘 봤습니다. 그럼, 이제 이락 배우님의 연기를 봐야겠죠.”

    이락이라는 말에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이락 오늘 못 온다며?”

    “지금 온 건가?”

    “뭐지?”

    관객들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 고개를 돌려 가며 확인했다.

    최혁은 그런 관객들의 반응에 미소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락 배우님은 여기 못 오셨지만, 오늘 오디션을 위해 준비했던 연습 영상이 도착했습니다.”

    연습 영상이라는 말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젯밤 이락의 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내가 한 일이 이거였다.

    나는 곧바로 최욱환 PD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설명했고 이락이 생방송 무대를 준비하며 촬영해 놓은 영상을 전달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최욱환도 내가 보낸 영상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이락이 없어도 생방송 분량은 어느 정도 때울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제작진들이 밤을 새워 가며 편집한 연습 장면이 흘러나오자 객석이 고요해졌다.

    마치 생방송이라고 가정하고 카메라와 조명을 세팅해 놓고 찍은 영상이었다.

    이락이 첫 번째로 준비한 연기는 미스 캐스팅 미션 때 짧게 선보였던 회색 도시의 망치였다.

    갱생이 불가능한 인간쓰레기 조폭의 찌질한 최후 장면을 준비한 것이다.

    비록 영상이었지만 이락의 연기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락의 연기를 보던 김건명이 윤희자를 보며 물었다.

    “역시 연기는 박선호가 더 좋죠?”

    윤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박선호는 준비된 신인이니까. 그런데 난 이락 연기가 더 좋다. 이락의 연기는 딱 봐도 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짜들 연기거든. 그런데 가끔 말도 안 되게 보는 사람 감정을 이입하게 할 때가 있어.”

    “가족처럼요?”

    “맞아. 명장면 미션 때 그 연기 좋았지?”

    윤희자는 이락이 했던 가족의 연기를 떠올렸고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때 조용히 이락의 연기를 감상하던 윤서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럼, 오늘 제 영화도 볼 수 있겠네요.”

    윤서혁은 큐시트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이락이 준비한 마지막 연기가 바로 윤서혁 감독의 287일이었다.

    윤희자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윤서혁을 보며 혀를 찼다.

    “아주 좋겠어. 부러워 죽겠네.”

    * * *

    두 배우가 준비한 모든 연기가 끝이 났다.

    생방송 오른쪽에 실시간 문자 투표 진행률이 표시되고 있었는데 무려 삼백만 표에 육박하고 있었다.

    무대 위로 나와 박선호가 올라왔다.

    나는 아무 문제 없이 오늘 생방송 무대를 끝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무대 뒤에서 스태프에게 물어보니 상황실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윤서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원세강 대표님.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이락 배우가 연기하신 위대한 작품 287일 잘 봤습니다.”

    윤서혁의 말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287일의 하이라이트는 밴드 One Year가 노래 부르는 씬인데 그 장면이 아니네요.”

    “그건 다른 밴드 멤버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이락 배우님이 주인공인 강준성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고뇌하는 장면을 고른 거 같습니다.”

    “저는 강준성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보고 싶은데요.”

    “예?”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윤서혁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서이렌 씨랑 영화 촬영하면서 들어 보니 원 대표님이 노래를 꽤 하신다면서요.”

    “제가요?”

    “예. 이렌 씨가 그렇게 말해 줬습니다.”

    서이렌이 내가 노래 부르는 장면을 어디서 본 거지?

    그때 내 뇌리에 과거의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중고등학생일 때 부른 거 말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꽤 노래를 잘 부르던 소년이었다.

    어머니는 손님이 없으면 나를 양장점에 앉혀 놓고 노래를 따라 해 보라고 하셨다.

    윤희자가 재빨리 마이크를 들고 윤서혁을 도왔다.

    “노래 잘하면 해야지. 원 대표 뭐 하고 있어? 배우가 생방송을 펑크 냈는데 대표가 그깟 노래하나 못 해? 엠씨 양반. 아직 문자 투표 진행 중이지?”

    최혁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오 분 남았습니다.”

    “됐네. 나왔으면 뭐라도 하고 가야지.”

    이 사람들이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내가 노래 부르기를 쳐다보는 멘토 군단과 관객들의 표정에 당황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 아까 개소리라고 했던 사람 나와 ㅋㅋㅋㅋ

    └왈왈. 죄송합니다.

    - 윤 감독 잘한다. 방송 내내 멘토 군단에 기 눌려 있다가 마지막에 터트리고 가네. ㅋㅋㅋㅋㅋ- 나 아직 투표 전인데 원세강 노래 듣고 결정해야지.

    - 노래 못 불러도 한 표 주고 싶다. ㅋㅋㅋㅋ

    - 노래해. 노래해.

    관객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합세해서 내가 노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무대 아래 조연출이 흔드는 푯말이 보였다.

    [5분 정도 시간 끌어 주세요.]

    스태프는 최혁을 향해 푯말을 흔들었지만 그걸 보는 나는 마치 내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내 삶에 흑역사 하나를 쌓고 가는 건가?

    나는 체념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내가 마이크를 들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신다면 하겠습니다. 대신 일 절만 부르겠습니다. 마지막 후렴 애드립은 절대 못 합니다.”

    “우와!!!”

    MC 최혁과 박선호는 웃는 얼굴로 무대 가운데에서 멀찌감치 비켜섰다.

    그때 갑자기 무대 위에 핀 조명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287일의 주제곡이자 주인공 강준성이 부른 노래 ‘굿바이’의 전주가 깔리기 시작했다.

    윤서혁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MR을 빠르게 제작진에게 넘긴 것이다.

    제작진이 합세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멍석을 깔아 주니 갑자기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깟 흑역사.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전 국민 앞에서 노래 정도는 부를 수 있지.

    나는 웃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287일을 찍는 내내, 마치 내 미래를 미리 엿보는 거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One Year의 노래 굿바이도 마찬가지다.

    [일 년에 열두 장의 편지를 써.

    매번 같은 이야기만 쓰여 있지만

    너는 그걸 보물처럼 간직해.

    너와 내가 닮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해.]

    내가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이 고요해졌다.

    - 와. 노래 잘한다.

    - 목소리 좋다 했더니 노래도 깔끔하게 잘한다.

    - 프로가수급은 아닌데 목소리가 좋네.

    - 스타메이커 최고의 아웃풋 ㅋㅋㅋ

    [슬픈 얼굴 하지 말아.

    무심하게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해 줘.

    고마워. 잘 지내.]

    노래를 부르는데 지난 이 년 동안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운명처럼 서이렌을 만났다.

    그녀가 내 인생의 마지막 배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락과 윤이슬이라는 반짝이는 배우들도 만났고 내 옆에서 나를 지켜 주는 스타탄생 식구들도 점점 늘어 갔다.

    빈선예, 강진석, 우연미, 장우재, 이선아.

    모두 내겐 가족 같은 사람들이다.

    이제 내게는 일 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기적이란 게 있지 않을까?

    서이렌이 내게 온 것처럼 다시 기적이 찾아오지 않을까?

    [슬픈 얼굴 하지 말아.

    무심하게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해 줘.

    고마워. 잘 지내.

    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뒤돌아봐.

    다시 만날 거야.

    안녕. 잘 지내. 고마웠어.]

    나는 일 절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노래를 부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건지 스태프들도 웅성거렸다.

    상황실의 최욱환은 이 절까지 듣고 싶었지만, 무대 위에서 울망한 표정을 짓는 내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반주를 멈췄다.

    반주가 사라지고 조명도 원래대로 돌아오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정도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흑역사겠지.

    내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 미쳤다.

    - 이 정도면 음원 내야 하는 거 아님?

    - 원세강 내원픽.

    - 왜 일 절만 하냐? 이 절 없음?

    - 으아 첫 소절 듣고 소름 돋았어ㅋㅋㅋ 매니저가 이렇게 잘해도 되는 거임?

    - 윤서혁 칭찬해.

    - 원세강도 투표에 넣어 달라. 당장 일 위 가능

    └쌉가능

    └ㅇㅈ

    그때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 카운트다운 표시가 떴다.

    60

    59

    …….

    시청자투표를 마감한다는 신호였다.

    “자, 이제 스타메이커 투표를 마감합니다.”

    중간 광고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박선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한 말이 있습니다. 이락 배우님이 오늘 못 와서 죄송하다고, 박선호 배우님께 제일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락이가 가족을 찾았다니 제일 처럼 기쁩니다.”

    박선호의 진심이 느껴지자 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중간 광고가 끝나고 MC 최혁이 마이크를 들었다.

    “투표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온라인에서 이백칠십만 표, 문자 투표로 오십만 건해서 대략 삼백이십만 건의 소중한 한 표가 모였습니다.”

    무대 위에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 그럼 결과를 보여 주세요.”

    최혁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이락과 박선호의 득표수가 떴다.

    이락: 1,596,619

    박선호: 1,59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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