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93화 (94/261)
  • #93화. 마지막 무대(1)

    창원에 있는 병원 로비에 나와 강진석이 서 있다.

    강진석은 떠나려는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형님만 믿습니다. 이락 배우님 잘 부탁드려요.”

    “알았어. 넌 혼자 올라갈 수 있겠어?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잖아.”

    “그렇지 않아도 졸음운전 할까 봐 장거리 대리운전 알아봤습니다. 조금 있으면 기사님 오실 거예요.”

    여기는 창원이다.

    어젯밤 이락의 어머니 소식을 들은 우리는 곧바로 이곳에 달려왔다.

    이락은 지금 어머니가 계신 응급 병동에서 이모 가족들과 함께 있다.

    이곳에 왔을 때 사진 속의 이락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고 가족도 이모와 이모부가 전부였다.

    그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락의 가족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갈게요.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

    * * *

    “손님. 다 왔습니다. 일어나세요.”

    대리운전 기사가 뒷자리에서 곤히 자는 나를 깨웠다.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스타메이커 마지막 오디션이 열릴 드림아트홀의 야외 주차장이었다.

    굳은 어깨를 펴고 일어난 나는 대리운전 기사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운전을 잘해 주신 건지 한 번도 안 깨고 편히 왔습니다.”

    “차가 워낙 잘 관리돼서 운전할 맛이 나던데요.”

    나는 대리운전 기사에게 비용을 냈다.

    아직 생방송을 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드림아트홀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백미러로 확인해 보니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기에 차 밖으로 나가려고 겉옷을 챙기는데 누군가 차창을 두들겼다.

    놀란 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대표님. 나오지 말고 문이나 열어 줘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차 문을 열었고 빈선예가 들어왔다.

    빈선예는 다짜고짜 내게 모자와 선글라스를 건넸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밤새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빈선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괜찮아요. 여기 오는 길에 내내 잤습니다.”

    “밥은 드셨고요? 약은요? 맨날 챙겨 먹는 영양제 있잖아요.”

    “아. 그거.”

    어젯밤 급하게 내려가느라 약을 못 챙겨 갔다.

    항상 소지하고 있는 약은 오늘 아침에 다 먹고 점심 이후로는 약을 못 먹었다.

    그때 빈선예가 내게 약병을 건넸다.

    “이거 맞죠?”

    “어? 이거 어떻게 찾았어요?”

    “대표님 책상 서랍에 두신 거 들고나왔어요.”

    “고마워요. 이런 것까지 챙겨 주고.”

    “대표님이 쓰러질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휴. 그때 겨우 한번 쓰러진 거잖아요.”

    빈선예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꾹 참았다.

    “오늘 락이 대신 대표님이 무대에 올라갈 거라면서요?”

    “예. 그렇게 됐네요.”

    어젯밤 나는 스타메이커 제작진에 이락의 이야기를 알렸다.

    최욱환은 오디션보다 어머니 일이 중요하다며 걱정하지 말고 가 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달간 준비한 생방송인데 오디션 참가자 한 명이 나오지 않으면 방송에 차질이 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스타메이커에 출연한 내가 이락 대신 출연해서 이락이 할 인터뷰를 대신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이 선글라스 쓰고 모자도 푹 눌러쓰세요. 지금 이대로 나가면 팬들한테 붙잡힐 겁니다.”

    “내가 이락 배우님도 아니고 설마 나를 붙잡겠어요?”

    “인터넷 모니터링 안 하세요? 요즘 대표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요.”

    빈선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요.”

    “엊그제 엔진에 회의하러 갔을 때도 직원들이 사인해 달라고 모여들어서 고생했다면서요.”

    “몇 장 안 해 줬어요.”

    “암튼 이대로는 안 되니까 그거 쓰고 나랑 같이 들어가요. 대기실에 대표님 옷이랑 메이크업 도구도 다 준비해 뒀어요.”

    “메이크업요?”

    “그럼, 생방송에 다크서클이 가득한 쌩얼로 나가셔야겠어요? 빨리 나가요.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그래도 제가 메이크업까지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예요? 구질구질한 지금 모습으로 방송 나가는 건 절대 못 봐요. 빨리 그거나 써요.”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나는 빈선예에게 떠밀리다시피 차에서 나왔다.

    스태프 전용 출입구로 가는 길에서 나는 수많은 스타메이커 팬들과 마주쳤다.

    그들이 모두 박선호와 이락의 팬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내 팬도 있는 거 같았다.

    “봐요. 대표님 팬도 있죠?”

    “하. 전혀 몰랐어요. 강진석 이사님도 매니저 참견 시점에 나와서 화제였잖아요. 나도 그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강 이사님은 웃겨서 인기가 많았던 거고요. 대표님은 케이스가 좀 다르죠.”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지나가다 앞에 있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실례했습니다.”

    “뭐 하는 거요? 앞 좀 잘 보고 다닙시다.”

    나와 어깨를 부딪친 검은 양복의 사내가 짜증을 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최용팔?

    최용팔의 곁에는 그의 수하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대형 현수막이 들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대연동의 자랑 이락. 우승하자!’이라고 쓰여 있었다.

    * * *

    “야. 이 새끼들아. 이거 잘 준비한 거 맞아? 현수막은 우리밖에 안 들었잖아. 다들 귀엽게 생긴 야광봉 들었는데?”

    최용팔은 현수막을 들고 있는 민수와 부하들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민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최 씨 아저씨가 이게 제일 먹힌다고 하셨는데요. 신림동 고시원 현수막도 다 그 아저씨가 해 주신다고요.”

    “됐어. 그거 저기 나무에 걸어 놓고 우리는 맨손으로 들어간다.”

    “예. 보스.”

    최용팔이 앞서 걷고있는 깡치에게 다가갔다.

    번잡한 곳을 싫어하는 깡치가 이곳까지 따라온다고 할 줄 몰랐던 최용팔은 그를 보며 물었다.

    “깡치 형님이 이런 시끄러운 곳에 왕림하시고. 대단하십니다. 락이가 보면 좋아하게 수다.”

    “시끄러워. 수틀리면 나 혼자만 들어갈 거다.”

    “아. 형님.”

    “이거 티켓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것도 매크로 만들어서 간신히 구한 거라고.”

    “왜 이러십니까? 오십 장 넘게 사게 짭짤하게 장사하신 거 민수한테 다 들었습니다.”

    “남은 것도 현장에서 다 팔아 버리고 나 혼자 들어갈 수도 있어.”

    “아. 그건 아니죠. 방송국 놈들 혼내 준 게 누굽니까? 우리가 손쓰자마자 본방송은 제대로 나왔잖습니까?”

    깡치는 하소연하는 최용팔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잘했어.”

    “당연한 걸 그러시네.”

    깡치는 개심한 최용팔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스타메이커 최종 오디션이 열리는 드림 아트홀에 MC 최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천 명의 관객들은 최혁을 보자마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 달 만에 뵙습니다. 스타메이커 최종 오디션의 MC를 맡은 최혁입니다.”

    객석 한가운데 만들어진 단상 위에는 스타메이커의 심사위원이자 멘토 군단이 앉아 있었다.

    윤희자, 김건명 그리고 윤서혁이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멘토들의 인사말이 끝나자 MC 최혁이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 오디션을 치를 두 배우를 모시기에 앞서 먼저 공지드릴 일이 있습니다.”

    최혁이 갑자기 진중해지자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이락 씨는 오디션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날벼락 같은 선언에 삼천 명의 관객들은 화들짝 놀랐다.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멘토 군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윤희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엠씨 양반. 뭐 그렇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드는 거야. 여러분. 이락 배우는 좋은 일로 못 오는 겁니다.”

    윤희자의 말에 객석은 더 알쏭달쏭한 분위기로 변했다.

    “이락 배우의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대요. 그래서 지금 이 배우는 가족들을 보러 갔습니다. 이깟 오디션이 중요하겠어요?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안 그래요?”

    객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생방송을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 대박. 가족 찾았나 봐.

    - 아휴 왜 눈물이 나지ㅠ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락아.

    - 스타메이커 진심 레전드. 락이 엄마 찾아 줬어 ㅠㅠㅠㅠㅠ- 넘좋다 넘좋다ㅠㅠㅜㅠㅠ진짜 좋은 프로그램이야ㅠㅜ최혁은 관객들의 충격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마이크를 들었다.

    “오늘을 위해 한 달 동안 멋진 무대를 준비해 주신 한 분을 무대 위로 모셔 볼까요? 박선호 배우님을 나와 주세요.”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와 함께 박선호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기실에서 이 사실을 들은 박선호는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고 지금도 그의 눈이 살짝 빨갰다.

    - 미친 박선호도 울었나 봐.

    - 선호야 ㅠㅠㅠㅠㅠㅠ

    - 선호랑 이락 꽁냥대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 박선호 아직도 울컥하는지 울망울망하네.

    최혁은 박선호와 인터뷰를 진행했고 박선호는 홀로 나왔지만 준비한 연기를 최선을 다해 선보일 거라고 소감을 말했다.

    “역시 긍정 에너지 박선호 배우답네요.”

    관객들은 박선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오늘 관객들은 이락과 박선호의 치열한 연기 배틀을 보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락이 가족을 찾았다는 말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런데 박선호 배우님 혼자 모시기에는 너무 적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한 분 더 모시겠습니다. 이락 배우님을 옆에서 보살펴 주는 우리의 매니저님. 스타탄생 대표인 원세강 씨를 모십니다.”

    ‘끼야야야야야!’ 바로 무대로 나가려고 대기하고 있던 나는 관객들이 질러 대는 익룡 소리에 흠칫 놀랐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던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아무 일도 없겠지.

    괜찮을 거야.

    그냥 편하게 하고 내려오자.

    나는 주문을 외듯 괜찮다 괜찮다고 속으로 반복했다.

    “대표님. 어서 나가세요.”

    “예.”

    스태프가 재촉하자 나는 떨리는 걸음으로 무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표님!”

    “끼야야야!”

    “오빠. 사랑해.”

    최혁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놀라운지 눈동자가 커졌다.

    멘토 군단도 최혁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희자가 마이크를 들더니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랑 비교해서 환호성이 너무 차이 나잖아.”

    옆에 있던 김건명이 웃으며 윤희자의 말을 받아쳤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윤 선생님도 원 대표 좋아하시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건명 씨보다 인기가 많겠는데?”

    “지금 저 놀리시는 겁니까? 윤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윤 감독?”

    “그러네요. 선생님이 너무 하셨네요.”

    멘토 군단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최혁이 내게 물었다.

    “원세강 대표님. 오늘 어떻게 무대 위에 올라오시게 된 겁니까?”

    나는 굳은 얼굴로 마치 로봇처럼 준비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오늘 부득이한 사정으로 오디션에 참가하지 못한 이락 배우님을 대신해서 제가 나왔습니다.”

    간신히 대본을 다 읊은 나는 긴장한 얼굴로 관객들을 바라봤다.

    “원세강 대표님도 긴장을 다 하시는군요.”

    “예…….”

    - 대표님 긴장하는 것도 개기여움.

    - 저 얼굴로 왜 연예인 안 했나 했는데. 이유가 있었어. ㅋㅋㅋㅋ- 카메라를 못 쳐다보네 크크크- 대박 ㅈㄴ기여워.

    - 저 방황하는 눈동자 봐라ㅋㅋㅋㅋㅋㅋ

    - 서른여섯 살 먹은 아저씨가 저렇게 귀여운 건 또 뭐냐고 ㅋㅋㅋㅋ첫인사를 마친 우리는 무대 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럼, 지금까지 방송했던 오디션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무대 양옆의 전광판에 지금까지 스타메이커에서 진행한 미션이 편집돼서 나오기 시작했다.

    사인극 미션부터 액션 미션, 캐스팅/미스캐스팅 미션, 애드리브 미션 그리고 마지막인 명장면 미션까지.

    내가 본 미래의 스타메이커와 지금의 스타메이커는 전혀 다르다.

    이락과 윤이슬 그리고 나라는 변수가 스타메이커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VCR 속의 이락과 윤이슬을 보며 생각했다.

    성장했구나.

    박선호는 스타메이커를 하기 전에 어느 정도 완성된 연기력을 갖췄다면 이락과 윤이슬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의 배우들이 놀랍도록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관객과 시청자들도 동감하고 있었다.

    - 와. 이렇게 보니까 이락이랑 윤이슬 연기 엄청나게 늘었다.

    - 이락은 완전 다른 사람인데?

    - 오늘 이락이랑 박선호랑 찐으로 붙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 그래도 박선호지. 이락은 아직 부족함.

    - 명장면 미션 못 봤어? 이락도 잘해.

    - 어차피 이락 안 와서 텄어.

    - 그럼, 박선호만 연기하는 건가?

    - 연기할 사람이 없잖아. 박선호만 하겠지.

    - 없긴. 저기 있는데.

    - 누구?

    - 원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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