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악당에겐 악당을
김경진과 이정호 사이에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미래에서 기사로 나왔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전화로 상세한 미션 내용까지 알려 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이후, 김경진을 행동을 살폈고 이 핸드폰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명장면 미션 당시, 대기실에 찾아온 이정호 국장을 김경진이 배웅하러 따라갔을 때 이 핸드폰을 챙겼다.
오늘 같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보험이 필요했다.
이정호는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랐고 빠른 판단력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린 손요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표정을 갈무리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손요원이 내빼려고 하자 이정호가 놀라 외쳤다.
“손 PD? 그냥 가려고?”
“제가 낄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전 이만 갈게요.”
손요원은 나와 이정호의 싸움에서 불똥이라도 튈까 봐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는 손요원이 떠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이정호를 노려봤다.
이정호는 순간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내게 말했다.
“원세강 많이 컸네.”
“편집은 최욱환 PD님이 하실 겁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병원에 있는 최 PD가 무슨 수로 편집을 한다는 거야?”
“다행히 수술 경과도 좋고, 오늘 바로 퇴원하신다고 하시더군요.”
이정호는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봤다.
“원세강 너 미쳤어?”
“LOK 김경진이랑 아주 친하시던데 그래서 이하진을 이렇게 띄워 주는 겁니까?”
LOK 이야기가 나오자 이정호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이하진만 띄우면 됐지. 왜 이락 배우한테 악마의 편집을 하는 겁니까?”
“원 대표 이제 보니까 상황을 제대로 못 보네. NGB랑 척져서 어쩌려고 그래? 네가 그렇게 잘났어?”
“저는 NGB랑 척 질 마음이 없습니다. 이정호 국장님이 NGB는 아니지 않습니까?”
“나랑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다행히 저는 보험이 있어서요.”
나는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었다.
이정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주머니에 챙겼다.
“하. 지금 이러기야? 고아라고 여론몰이해 줘서 이락 인기 올라가게 해 준 게 나잖아. 안 그래? 원 대표?”
“이제 시작하는 배우한테 불쌍한 이미지를 심어 줘 놓고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배우는 고착된 이미지를 가지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고아란 기사가 나고 이락이 별 볼 일 없는 연기를 보여 줬다면 어땠을까?
대중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매몰차다.
이락에게 측은지심을 가질 수는 있어도 배우로서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 알았어. 이번 편집 건은 내가 잘못했어. 됐지?”
이정호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신경이 쓰였는지 나를 회유하려고 나섰다.
“사실 이 정도는 악마의 편집도 아니지. 그냥 살짝 분위기만 조장하는 거잖아.”
“본인 입으로 악마의 편집이라고 털어놓으셨네요.”
“원 대표.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마.”
“시청자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그동안 최욱환 PD님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이만 손 떼시죠. 곧 최욱환 PD님이 오실 겁니다.”
이정호는 답답한지 편집실에 있던 생수를 까서 단숨에 마셨다.
나는 그의 행동을 주시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이 바닥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는 거야? 어떻게 NGB 국장인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예능국이라서 무시하나? 국장인 내가 스타탄생 어떻게 못 할 거 같아?”
회유가 먹히지 않자 이정호는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NGB 예능국 국장에 오른 뒤로는 매니저든 대표든 누구 하나 그에게 함부로 구는 사람이 없었다.
배우도 예능에 출연해서 득을 보는 시대다.
예능국이 배우 눈치를 보며 캐스팅하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는 반대편 주머니에 넣어 놨던 내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켜서 그에게 보였다.
화면에 나온 [녹음 중]이라는 표시를 본 이정호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야! 너 미쳤어?”
“이 바닥에서 오래 할 생각이 없다고 물으셨죠? 예. 맞습니다. 제가 어차피 오래 못합니다.”
“뭐?”
“제가 그만두기 전에 이정호 국장님을 먼저 옷 벗게 만들어 드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너 진짜 미쳤구나. 왜 기자한테 제보라도 하려고? 그럼, 스타탄생 이름도 오르내릴 텐데? 잘 생각해 보라고. 배우한테 이상한 이미지 생기면 안 된다면서?”
“글쎄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이정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정호는 내 표정을 잃을 수 없어 답답했다.
‘이렇게 막 나간다고? 대체 왜?’
그때 편집실 문이 열리고 최욱환 PD가 들어왔다.
이정호는 최욱환을 보자 얼굴이 사색이 됐다.
“최 PD?”
최욱환은 수술한 옆구리가 불편한지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최 PD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원 대표님.”
“여기 앉으세요.”
최욱환은 수술한 곳이 쑤시는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최욱환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정호를 쳐다봤다.
“국장님. 아니. 선배. 오면서 예고편 봤어. 그거 대체 누구 작품이야? 조연출도 모르던데?”
이정호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최욱환의 물음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최 PD. 예고편으로 양념만 치고 본방송은 제대로 내보내려고 했어. 겨우 그것 때문에 이렇게 달려온 거야?”
최욱환은 이정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지 머뭇거렸다.
“그러지 말고 직접 보시죠. 최 PD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편집기기 앞으로 이동했다.
이윤기 감독이 편집할 때 자주 구경하러 가서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이거 누르면 재생되는 거 맞죠?”
“원 대표!”
이정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황급히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모니터에 방금 손요원이 편집한 악마의 편집이 흘러나왔다.
이락이 이하진을 뒤에서 음해하려는 듯한 장면이 재생되자 최욱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선배 미쳤어? 이런 거 이제 안 먹힌다고요.”
“안 먹히긴. 이 정도 MSG는 다 치는 거야.”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야. 너 선배한테 대든다.”
“선배면 선배답게 굴어요.”
“너 NGB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직하고 싶어?”
“하. 정말.”
최욱환의 뒤에 서 있던 나는 이정호를 향해 녹음 중이라는 표시가 뜬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이정호의 얼굴이 굳었다.
“아. 씨발. LOK 이것들은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정호가 화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최욱환은 이정호가 자리를 비키자 바로 편집실 의자를 꿰차고 기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편집실을 나서던 이정호는 문을 닫으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나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돌렸다.
이정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쾅 닫고 그곳을 나갔다.
* * *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편집하는 최욱환을 근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좀 더 쉬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잘 와 놓고 끝에 가서 다 어그러뜨릴 뻔했습니다.”
가편집을 마친 최욱환은 소스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나머진 내일 해야겠네요. 아무래도 오래 앉아 있기는 힘드네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택시 타고 오신 거죠?”
나는 최욱환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최욱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예고편 나온 건 어쩔 수 없고 당장 다른 예고편으로 바꿔서 송출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 고맙습니다.”
“이락 씨가 고아인 거 언플한 것도 제가 막지 못했어요. 저 양반이 원래 저런 분이 아닌데 왜 자꾸 시청률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악마의 편집으로 나온 부분 편집하지 말고 통으로 실어 주실래요?”
“무편집으로요?”
최욱환은 고민이 되는지 바로 답을 못했다.
“그거 방송 타면 LOK 김경진 매니저가 되레 욕먹을 텐데요.”
사실 악마의 편집에 쓰였던 그 영상은 이락이 문제가 아니라 김경진이 문제였다.
“김경진은 욕 좀 먹어도 됩니다.”
“예? 뭐라고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때 지하 주차장을 진입하는 무시무시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난폭 운전으로 지하 주차장에 들어온 차를 확인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LOK 차량이었다.
차에서 내린 김경진을 알아본 최욱환이 깜짝 놀랐다.
김경진은 우리가 그곳에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위로 올라갔다.
조용히 생각에 빠져 있던 최욱환이 놀라 외쳤다.
“혹시 악편이 LOK랑 이 국장님의 합작품입니까?”
내가 말이 없자 최욱환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 그런 거였군요.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는 건 아니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최욱환에게 모든 걸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놔두면 자연스럽게 세상에 공개될 내용이다.
최욱환은 내가 본 미래처럼 이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피해자 역을 하면 된다.
결심을 굳힌 최욱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원 대표님 말씀대로 할게요. 무편집본으로 풀겠습니다.”
* * *
스타메이커 비하인드 쇼의 예고편을 본 시청자들은 당황했다.
- 엥??
- 이락 뭐냐?
- 이락 왜 저래?
- 미친 거 아님?
- 방송 안 나가는 줄 알고 저런 표정 지은 건가?
- 뭔가 쎄해 보인다.
- 이하진 금수저인고 알고 질투하나?
- 이거 악편 같은데? 이락이 저렇게 싸가지 없이 군다고?
- 지금까지 최 PD는 악편 같은 거 없었음.
- 역시 NGB네. 지금까지 너무 힐링이다 했다. ㅋㅋㅋ
- 다음 주에 생방송인데 이락 표 다 떨어져 나가게 생겼네.
몇 시간 후, 인터넷에 올라온 예고편이 갑작스럽게 내려갔다.
- 예고편 짤렸다.
- 스본이 항의했나?
- 지들도 악편 쩌는 거 알아서 내린 거 아냐?
- 내리면 뭐 하냐? 이미 이락이랑 이하진 짤 엄청 돌아다니는데.
-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한 거 같음.
└악마도 울고 갈 댓글이네.
나는 인터넷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태블릿을 닫았다.
악편을 들어낸 예고편이 떴지만, 사람들은 이전 예고편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최욱환이 해당 장면의 편집하지 않은 무편집본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낸다고 약속했으니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을 거 같다.
나는 강진석과 빈선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락이 당분간 인터넷을 못 하게 막아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걸 정리한 나는 깡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아. 밤낮이 완전히 바뀌었다니까.”
저녁 아홉 시에 일어난 천재용은 기지개를 켜더니 커피를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커피를 타가지고 온 천재용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의 미튜브 채널인 ‘독설피디’는 인기 순항 중이었다.
이미 구독자 사십칠만 명에 육박했고 영상을 내보내는 족족 오십만 뷰. 대박은 백만 뷰가 넘었다.
“더 재미있는 기획안이 없나?”
천재용은 다음 방송에 뭘 내보낼까? 고민하며 커피를 마시며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인터넷 게시판마다 스타메이커 예고편 이야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스타메이커라. 저건 원세강 새끼가 꼴 보기 싫어서 패스.”
천재용이 스타메이커 게시글을 닫으려는데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스타탄생이 욕먹고 있네?”
천재용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스타탄생 욕먹는 거라면 나도 숟가락 올릴 수 있지.”
대본을 쓰기 위해 메모장을 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대학 후배이자 톱뉴스에 다니는 기자에게 온 전화였다.
“웬일이야? 뭐 제보할 거라도 있어?”
[선배 여전히 촉은 귀신같네.]
“무슨 일인데? 말해 봐. 내가 영상 수입금 3분의 1 떼 줄게.”
[이번 건은 좀 커. 반 정도는 줘.]
“아. 뭔데 그래.”
[깡기자 알지?]
깡기자라는 말에 천재용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깡기자가 재미있는 기사를 준비하고 있더라고. 내가 그거 소스 줄게.]
“깡기자 기사 뺏는 거라는 거지? 나야 좋지. 대체 뭔데 그래?”
[내가 깡기자 노트북 모니터 몰래 찍은 거 보낼 테니까 그거 보고 얘기해.]
“오케이. 알았어.”
전화를 끊은 천재용은 이를 갈았다.
“준비하던 기사 빼앗기면 얼마나 화가 날까? 어디 한번 당해 봐라.”
마친 후배가 보낸 사진이 도착했고 천재용은 웃으며 그것을 클릭했다.
그런데 깡기자가 쓰고 있던 기사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스타메이커, 이정호 국장과 LOK의 커넥션 파헤치기]
천재용은 놀란 눈으로 사진을 확대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뭐야. 이정호랑 LOK가 그런 사이였다고?”
천재용은 한창 불타고 있는 스타메이커 예고편 댓글을 확인했다.
“아하. 그렇구나. LOK 밀어주느라 스타탄생에 악마의 편집을 한 거였구나.”
천재용은 키보드 위에 올린 손가락을 톡톡 쳤다.
“아. 이거 대어긴 한데. 내가 이거 쓰면 스타탄생에 좋은 거잖아. 이거 좀 고민되네.”
천재용은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모니터를 노려보기만 했다.
결국 결심을 굳힌 천재용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우선 깡기자 먼저 물 먹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