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8화 (89/261)

#88화. 대표 vs 대표

“저기 저 사람 원세강 대표 아니야?”

“어머. 진짜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 맞아.”

“미쳤어. 여기서 원세강을 볼 줄이야.”

다큐멘터리 스태프들이 나를 보며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렸다.

강진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너도 이제 스타야.”

“스타는 무슨요. 형님도 매니저 참견 시점에 나와서 인기 많으셨잖아요.”

“그거야 이제 다 지난 일이지. 이젠 이름표 붙이고 대로변에 서 있어도 아무도 몰라볼 거다.”

“저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은 스타메이커가 방송 중이니까 그런 거죠.”

“내가 보기엔 넌 좀 오래 갈 거 같은데? 내기할까?”

“그런 거 안 합니다. 빨리 갑시다. 이렌 씨 기다리겠어요.”

“짜식. 부끄러워서 그러냐? 같이 가.”

* * *

누군가 이자현이 타고 있는 밴의 창문을 두들겼다.

앞자리에 있던 로드매니저가 누군지 확인하고 황급히 문을 열었다.

“이 배우. 나 왔어.”

대본을 보고 있던 이자현은 난데없이 나타난 한지욱과 록 이사를 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이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인터뷰하는 날이잖아. 잊었어?”

“아. 그거요.”

이자현은 메이크업에 의상과 헤어에 잔뜩 힘주고 나타난 한지욱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샵에 다녀오셨나 봐요?”

“당연하지. 방송 출연인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누가 보면 대표님이 드라마 찍는 줄 알겠어요.”

“하하. 그렇게 멋있어?”

이자현은 비꼬는 것도 못 알아듣는 한지욱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유학은 대체 어떻게 간 거야? 혹시 기부로 입학한 거 아닐까?’

이자현은 대본을 가리키며 냉정한 표정을 말했다.

“저는 촬영 준비를 해야 해서요.”

“그래. 난 이만 가 볼게. 이따 인터뷰 촬영할 때 보자고.”

한지욱이 문을 닫자 얼굴이 일그러진 현미가 이자현을 보며 말했다.

“한 대표님은 대체 왜 저러고 다니는 거래요?”

“몰라. 저럴 거면 배우를 하지. 왜 대표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현미는 로드매니저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에게 부탁했다.

“오빠. 언니 마실 물이 떨어졌는데 지금 좀 사다 주실래요?”

“배우님이 항상 마시던 그 브랜드로 사 오면 되지?”

“꼭 그거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다른 것도 괜찮아요.”

“알았어.”

로드매니저가 물을 사러 나가자 밴에 이자현과 현미 두 사람만이 남았다.

현미는 진지한 눈빛으로 이자현에게 물었다.

“언니 조금 있으면 계약이 끝나잖아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자현은 보던 대본을 접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스타탄생에 가고 싶지만 그건 안 되겠지? 차마 염치가 없어서 원 대표님께 가고 싶다고 못 하겠어.”

“원 대표님은 착하셔서 언니가 오고 싶다면 받아 줄걸요?”

“아니야. 한성제 대표님이 계시잖아. 안 된다고 하실 거야.”

“그럼 이대로 재계약하시려고요?”

“아니. 그건 절대 아냐. 아무리 봐도 한지욱은 아니야. 사실 이 드라마도 원 대표님 때문에 하게 된 거나 다름이 없잖아.”

“맞아요. 한지욱 대표는 이상한 표절작이나 물어 왔잖아요. 원 대표님 아니었으면 거기에 발목 잡혀서 이년 넘게 작품 못 했을 거예요.”

이자현은 고민이 많은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조금 더 고민해 보자. 접촉해 오는 회사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예. 언니. 그래요.”

그때 밴의 문이 열리고 로드매니저가 물병을 안고 들어왔다.

“이거 받으세요.”

“오빠 고마워요.”

“그런데 현미야. 너 원세강 대표님이랑 함께 일해 봤다고 했지?”

“예. 맞아요. 그건 갑자기 왜요?”

“촬영장에 원세강 대표님 오셨던데?”

“진짜요?”

* * *

촬영장에 나타난 한지욱과 록 이사는 눈앞의 상황에 심히 당황했다.

“스타탄생 원세강 아닌가요? 맞죠? 록 이사님?”

“그러네요. 지금 한창 스타메이커 찍고 있는 거 아니었나? 여긴 왜 나타난 걸까요?”

한지욱의 짜증 섞인 음성이 들렸다.

“지금 그걸 나한테 물어보는 겁니까? 록 이사님? 설마 원 대표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대본에는 한지욱 대표님 인터뷰만 있었습니다.”

“내가 록 이사님을 믿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필요할 거 같네요. 다큐도 안 찍는 원 대표가 지금 우리 눈앞에 얼쩡거리고 있잖습니까?”

한지욱은 갑작스러운 원세강의 출현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록 이사도 짜증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원세강 저놈은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네.’

* * *

나는 오늘 두 여자 촬영장에 처음 오는 거라서 준비해 온 것이 많았다.

나와 강진석이 자양강장제와 핫팩을 나눠 주자 스태프들이 몰려들었다.

“원 대표님. 고마워요.”

“꺄. 원세강 대표님 맞으시죠?”

스태프들은 나를 보며 놀라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세강아. 저기 김경록이 오고 있는데.”

“저도 보입니다. 옆에 한지욱 대표도 있네요.”

록 이사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나는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강진석에게 말을 걸었다.

“강진석이 오늘 여긴 웬일이실까?”

“이렌 씨가 스타탄생 소속이에요. 몰라요? 대표와 이사가 배우 보러 왔지, 그럼 촬영장에 왜 왔겠어요?”

“정말 그것뿐이야?”

강진석은 록 이사에게 지지 않고 날이 선 태도로 답했다.

“그럼 뭐가 또 있는데요?”

“오늘 다큐멘터리 촬영하잖아. 거기 출연하려고 온 거 아니냐고?”

“LOK가 기획한 다큐멘터리잖습니까? 우리한테는 출연 의사도 묻지 않아서 촬영 날짜도 모르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진석은 이번 다큐멘터리가 기획부터 록 이사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강진석에게 자세한 내용을 들었기에 그들과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피하려는데 갑자기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시죠?”

나는 내게 손을 내미는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내게 명함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박강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다큐멘터리 제작을 맡은 PD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두 여자와 우리 서이렌 배우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MBS 사장님께서 이번 다큐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크십니다. 당연히 잘 찍어야지요.”

록 이사는 나와 박 PD가 명함을 주고받고 인사를 나누자 마음이 급한지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박 PD님. 여기 한지욱 대표님도 와 계십니다.”

“오신 거 봤습니다. 그런데 잠시만요.”

박 PD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한지욱에게 인사를 하고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다큐멘터리 주제가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인데요. 원 대표님도 인터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LOK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 주긴 싫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스타메이커 촬영 중이라서요. 다른 방송에 겹치기 출연하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박 PD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예. 이해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안타깝네요.”

한지욱과 록 이사는 우리 대화를 듣고 얼굴이 굳었다.

어느새 우리 주위에는 박 PD 일행뿐만 아니라 촬영장의 다른 스태프도 몰려들었다.

“원세강 대표님. 텔레비전에서 볼 때랑 어쩜 그렇게 똑같으세요?”

“텔레비전보다 훨씬 잘생기셨는데요?”

“사인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촬영장에 모인 스태프들이 갑자기 내 팬이 되어 달려들자 나는 당황했다.

방송의 파급력이 이 정도라니.

내가 당황하자 강진석이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세강아. 빨리 사인해 줘.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어.”

“아. 예. 알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사람들의 사인 요청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 * *

사인을 마치고 잠시 밴에 피해 있던 나는 촬영이 재개되고 나서야 촬영장에 돌아왔다.

밴 안에서 서이렌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깔깔대며 웃었다.

서이렌의 촬영이 시작되자 스태프들도 일하느라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자현 배우는 없네요.”

“이렌 씨 촬영하는 동안 저기 세트장에서 다큐멘터리 인터뷰 찍고 있을걸. 세강아 우리 인터뷰 구경하러 갈까?”

평소 같으면 관심 없겠지만 갑자기 나도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럴까요? 무슨 인터뷰일지 궁금하네요.”

“가자. 세강아.”

나와 강진석은 촬영장을 빠져나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세트장으로 갔다.

우리는 스태프 속에 섞여서 제일 구석에서 촬영을 구경했다.

베테랑 아나운서 김윤희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자현과 한지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여자 속의 여성 사업가 정유진으로 분한 이자현은 역할에 맞게 화장기도 없고 수수한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이자현은 원세강이 왔다는 소식에 촬영장으로 달려갔지만 나를 만나지 못하고 인터뷰장에 끌려와 있었다.

이자현은 나를 발견하고 놀랐으나 이내 얼굴에서 놀란 기색을 지워 냈다.

이자현의 옆자리에는 화려하게 꾸민 한지욱이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 서 있던 다큐멘터리 촬영 스태프들이 그걸 보고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가부키 화장을 하셨네. 왜 저렇게 힘을 주고 나온 거지? 이자현 씨랑 비교되게.”

“어떤 인터뷰인지 전달 안 했어?”

“했어. 그냥 단정하게 입고 오라고 전했다고.”

강진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한지욱이 너처럼 스타가 되고 싶은가 보다.”

“매니저가 무슨 스타입니까? 우리는 스타를 케어하는 사람들이지 자신이 스타가 되려고 하면 안 되죠.”

“한지욱은 그걸 모르나 보네.”

김윤희 아나운서의 질문에 이자현이 성실하게 답했다.

문제는 한지욱이었다.

“대표님.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해 미국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관심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시는 LOK의 수장이시니까요. 어릴 때부터 내가 대한민국 연예계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러시군요.”

“제가 사실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엘리트에다 수재였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 했습니다. 저 같은 인재가 고작 엔터 사업을 한다니 낭비라고 말입니다. 하하하.”

김윤희는 뻔뻔한 얼굴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한지욱을 보며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질문마다 한지욱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제가 다닌 예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앞으로 바빠지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Fun하고 Cool하게 대처하겠습니다.”

“이럴 수가. 대단히 촌스러운 질문을 하시네요. 그럼, 대답도 촌스러워지는 겁니다.”

“이자현 배우가 스타인 이유는 인기가 많아서겠죠.”

김윤희 아나운서와 이자현은 한지욱이 개똥 같은 답변을 해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한지욱 대표 왜 저래? 술 마셨어?”

“동문서답에 지 자랑만 하고 가네. 대체 여기 왜 나온 거야?”

“저 사람 예일대 나온 거 맞아? 확실해? 뭐 스펠링이 비슷한 이상한 대학교 아니야?”

스태프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에 세트장 제일 뒤에 있던 나와 강진석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지욱 저 또라이 같은 놈. 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그러게 왜 밖에 내보낸 거냐고.”

“록 이사도 이 정도일 줄을 예상하지 못했나 봅니다.”

나는 제일 앞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록 이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록 이사는 긴장되거나 초조할 때마다 한쪽 발을 떠는 버릇이 있는데 그는 지금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발을 떨고 있었다.

김윤희 아나운서가 속으로 긴 한숨을 내뱉으며 한지욱에게 마지막 질문을 했다.

“한지욱 대표님. 앞으로 어떻게 이자현 배우님을 서포트하실 계획이신가요? 또한 TOP 수장으로서의 포부도 말씀해 주시죠.”

김윤희는 자신이 할 임무를 완수하고 편한 얼굴로 한지욱을 바라봤다.

한지욱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답했다.

“TOP는 이자현 배우만큼 좋은 배우를 영입하고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기대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이자현 배우는 제가 앞으로도 잘 케어하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대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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