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시 현장으로
남은 해장국 국물을 원샷한 최용팔이 일어섰다.
“난 먼저 간다.”
민수가 계산하고 나가려던 최용팔의 곁에 딱 붙어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방송국에 제보라도 할까요?”
“뭐라고?”
“이락 저놈이 저렇게 승승장구하게 그냥 두실 겁니까?”
민수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텔레비전 속의 이락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냥 놔둬.”
“예?”
“그냥 놔두라고. 우선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저놈 운이 궁금해서 그래.”
“아. 이제 알겠습니다. 정상에 있을 때 내려오게 하시려는 거죠?”
“무슨 미끄럼틀 타냐? 내려오게? 넌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민수는 지난번과 달리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최용팔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조심해. 그렇게 락이 욕하다간 깡치 형님께서 가만히 두시겠어?”
“!!!”
민수는 깡치라는 말에 입을 닫았다.
조직 내에서 최용팔보다 더 끗발이 살아 있는 양반이 깡치였다.
합죽이가 된 민수를 보고 최용팔은 비웃으며 해장국집에서 나갔다.
* * *
오랜만에 내 집에서 달게 자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여섯 시였다.
합숙소에서 매일 여섯 시에 일어나다 보니 몸이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약부터 챙겨 먹었다.
어제 합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사무실로 가서 강진석 이사와 함께 스타메이커 방송을 모니터링했다.
강진석의 말로는 방송이 되면 될수록 이락과 윤이슬의 인기가 올라간다고 했다.
쏟아지는 기사와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을 보면 강진석이 설레발을 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자현을 피해 스타메이커 촬영장으로 도피한 거나 다름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잘한 선택이었던 거 같다.
이자현도 이제는 만날 수 있을 거 같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난 어차피 몸이 아프지 않았더라도 내 배우랑 사귈 생각은 없으니까.
씻고 나온 나는 이른 아침이지만 일찍 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익숙한 밴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놀라서 차에서 내렸다.
내 차 옆에 주차한 벤에서 서이렌과 빈선예가 내렸다.
로드매니저 없이 빈선예가 직접 운전해서 온 거였다.
“빈 팀장님.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에요? 오늘 두 여자 촬영 있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촬영장에 가지 않고 왜 우리 집에 온 겁니까?”
“이렌 씨가 대표님 꼭 보고 가야 한다고 해서요.”
차에서 내린 서이렌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서이렌의 손에는 하얀 종이와 수성펜이 들려 있었다.
“스타메이커에 나오는 원세강 대표님 아니세요? 저 팬이에요. 여기에 사인해 주세요.”
서이렌은 팬이라며 내게 달려들었다.
“이렌 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대표님 팬이에요. 스타메이커 나오시는 분 맞죠?”
나는 오랜만에 서이렌을 보자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닌데요.”
“어머? 요즘 난리라는 원블리, 스님이시잖아요.”
“원블리는 뭐 러블리 그런 거 같은데 스님은 또 뭡니까?”
“스타탄생 대표님이요. 팬들이 줄여서 스님이라고 부르던데요?”
“뭐라고요?”
생불, 돌부처도 모자라서 스님이라니.
기막힌 내 신상 별명에 당황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 사인 같은 거 함부로 해 주는 사람 아닙니다.”
내가 서이렌이 내미는 종이를 조심스럽게 밀쳐내자 서이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요정 서이렌 사인 열 장 줄 테니 대표님 사인이랑 바꿀래요?”
“이렌 씨 사인이 더 값진데 무슨 내 사인 한 장이랑 바꾸나요?”
“지금은 나보다 대표님이 더 핫하시잖아요. 사인은 만드셨죠?”
“사인은 무슨 그런 거 없습니다.”
“아닐 텐데. 대표님 보고 달려들 사람들이 한 트럭일 텐데 빨리 예쁜 사인 만드세요.”
서이렌한테는 못 당하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빈선예가 서이렌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아이고야.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침부터 힘들게 와서 이런 꼴을 보는 겁니까? 두 분 너무 하시네요. 내가 이럴 줄 알고 로드매니저 떼어 놓고 직접 운전해서 온 거라고요.”
서이렌이 쑥스럽게 웃었다.
“미안해요. 빈 팀장님. 너무 반가워서 그만.”
“촬영 늦겠으니까 그만 가요. 빈 팀장님 부탁합니다.”
빈선예에게 떠밀려 차를 타는 서이렌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두 여자 촬영장에는 언제 오실 거예요?”
“이번 주에는 처리할 일이 산더미고요. 다음 주에 갈게요.”
“정말이죠? 거짓말하면 대표님 비밀 다 불어 버릴 거예요.”
“알았으니까 빨리 가요.”
주차장을 떠나는 밴을 보며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스님이라니.
진짜 미치겠다.
* * *
스타탄생에 도착한 나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건 역시 이락과 윤이슬이라는 루키의 발견이다.
스타메이커 출연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들에게 대본과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강진석이 1차로 골라 놓은 대본을 먼저 확인했다.
윤이슬의 경우에는 스타메이커 초반에는 액션 장르의 대본이 주로 들어왔지만 미스 캐스팅 오디션 이후로는 다른 대본도 많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대본은 케이블에서 하는 범죄드라마 ‘해피 스릴러’였다.
어릴 때 연쇄살인범에게 납치당해 뇌를 다친 이후로 웃는 표정만 지을 수 있는 주인공이 프로파일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드라마다.
윤이슬은 조연인 경찰대 수석졸업자 이하늘 역으로 제의가 왔다.
이하늘은 폭력을 극도로 싫어해서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을 택한 이로 남주과 티격태격하며 연쇄살인범을 잡는다.
로맨스가 있는 여주는 따로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캐릭터가 주연보다 훨씬 좋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시청률 1%로 시작해서 최종회에는 9%가 넘는 인기작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윤이슬의 데뷔작으로 ‘해피 스릴러’를 고르고 이락에게 온 대본을 살폈다.
이락에게 온 대본은 연하남, 꽃미남 역이 많았다.
이제 곧 애드리브 미션과 명장면 미션의 방송이 남았으니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내가 대본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 층으로 강진석이 뛰어 올라왔다.
“세강아. 락이 기사 떴어.”
“무슨 기사요?”
오늘 아침에도 이락의 기사를 확인했지만 별것이 없었다.
강진석이 저렇게 놀라서 뛰어온 걸 보면 기사의 내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태블릿 PC에서 이락의 이름을 검색했다.
[“저는 고아입니다.”라며 솔직히 밝힌 스타메이커 출신 대세 배우, 이락]
자극적인 기사의 제목을 본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기사 내용을 클릭해 정독했다.
기사의 내용은 이락이 고아고, 스타메이커 인터뷰 도중에 이 사실을 밝혔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에 기사의 내용처럼 이락이 먼저 고아라고 밝힌 적이 없다.
“왜 하필 이런 기사가 뜬 거야? 아침까지 분위기 좋았는데.”
“강 이사님. 기사 반응은 어때요?”
“다들 불쌍하다고 하지. 그런데 몇몇은 표 잘 받으려고 고아인 거 털어놓은 거 아니냐는 말이 있긴 해.”
이락이 고아라는 사실은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다.
“강 이사님. 그때 이렌 씨랑 이락 씨가 함께 보육원 가서 봉사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럼, 당연하지. 이슬 배우도 다 같이 갔었잖아. 두 여자 아역들이 촬영하는 보육원으로 스타탄생이 다 같이 가서 봉사했는걸.”
“그거 기사로 좀 내보냅시다.”
“지금? 타이밍이 너무 뻔하지 않아?”
“이 배우를 앞에 내보내지 않고 이렌 씨 이름으로 내보내요. 대신 사진은 이락 배우 위주로 해서요.”
“오. 그것도 방법이겠네.”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습니다. 불쌍한 이미지보다는 힘든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잘 자란 아름다운 청년 이미지로 나가 봐요.”
“오케이. 알았어. 내가 깡기자한테 바로 연락할게.”
일어서려던 강진석이 ‘해피 스릴러’ 대본을 보고 멈춰 섰다.
“이슬이 작품 골랐구나. 그렇지?”
나는 강진석을 보며 말없이 웃었다.
“나도 대본 읽자마자 저거다 싶었다. 오케이. 그럼, 이거 처리하고 바로 캐스팅 자리 마련해 보자.”
“예. 고마워요. 강 이사님.”
강진석이 떠나고 나는 이락의 기사가 더 뜬 건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후속 기사 같은 건 없었다.
이정호가 이 정도에서 언플을 끝내야 할 텐데.
그때 포탈 페이지를 보던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금수저 ‘스타메이커 이하진’ 아버지는 한국건설 부사장, 어머니는 유명 요리연구가 김진숙]
기사가 올라간 시간을 보니 십 분 전이었다.
이락이 고아 출신이란 기사가 뜨자마자 올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면 이락의 기사와 묶여서 이슈가 되긴 할 거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양아치 같은 LOK의 언론플레이에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 * *
LOK 회의실에서 누군가 전화 통화 중이었다.
“형. 나야. 경진이.”
[나 이제 회의 들어가야 해. 빨리 말해.]
김경진과 전화 통화 중이던 사람은 다름 아닌 TOP 이사인 김경록이었다.
“형 말대로 이락 기사 뜨자마자 하진이 기사도 같이 풀었어.”
[반응은 어때?]
“넌씨눈이라고 욕을 먹긴 하지만 확실히 이슈는 되네.”
[그것도 다 잠시다. 사람들 뇌리에는 이하진 금수저만 남게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형은 정말. 어디서 이런 소식을 얻어온 거야?”
[내가 이정호 국장이랑 친해져야 한다고 했잖아. 넌 대체 거기 가서 뭘 한 거야?]
“국장한테 나온 소스였어? 대박이네.”
[야. 이만 끊어. 나중에 집에서 얘기해.]
“알았어. 끊을게.”
전화를 끊은 김경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최종 2인에 못 들어서 짜증 났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3인에 든 것도 나쁘지 않아. 이하진 좀 잘 띄워서 형 테크 좀 타 보자고.’
* * *
전화를 끊은 록 이사는 곧바로 회의실로 갔다.
넓은 회의실에는 MBS 다큐멘터리 제작 관련자들이 모여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박 PD님.”
“지난번 회의 때 보고 다시 뵙네요. 김경록 이사님.”
“그냥 편하게 록 이사라고 불러 주세요.”
“이제 TOP 이사님이신데 아직도 록 이사입니까?”
“하하하. 제가 한성제 대표님께 은혜를 입은 게 많아서요.”
박 PD는 록 이사에게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내밀었다.
[스타를 만드는 사람들: 두 여자 제작 일지]라는 제목의 기획서는 TOP에서 MBS와 손잡고 만드는 다큐멘터리였다.
두 여자가 대박이 나서 들떠 있던 MBS 사장은 김경록이 제시한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바로 오케이했고 급하게 제작진이 꾸려졌다.
“촬영은 내일부터예요. 두 여자의 제작 일지부터 드라마를 만든 모든 사람을 재조명할 겁니다.”
기획안을 읽어 내려가던 록 이사는 이자현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할 한지욱 대표의 이름을 확인하고 희미한 미소를 내비쳤다.
“배우 인터뷰는 다음 주네요?”
“예. 한지욱 대표님도 오실 거죠?”
“그럼요. 이자현 배우를 위한 일인데 당연히 가야죠.”
“한지욱 대표가 바쁠 텐데 배우를 위해 참 열성적이시네요.”
“하하하. 한성제 대표님 아드님이 아니십니까. LOK를 대한민국 삼대 기획사로 만든 분의 아드님인데 당연한 거죠.”
“그렇긴 하네요. 하하하.”
록 이사와 박 PD는 서로를 추켜세우며 다큐멘터리에 대한 회의를 끝냈다.
“그럼, 다음 주에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죠.”
박 PD가 나가자 록 이사는 아무도 없는 회의실을 거닐며 생각했다.
‘스타메이커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난 원세강 너와 그릇이 다르다고. 난 이제 킹메이커야.’
* * *
두 여자 촬영장으로 향하는 카니발에 나와 강진석이 타고 있다.
운전하는 강진석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형님. 기분 좋아 보이네요.”
“당연하지. 우리 락이가 완전 활화산처럼 인기가 타오르고 있는데 그럼, 웃지 울겠냐?”
지난주에 방송한 애드리브 미션의 시청률이 무려 6.4%였다.
이정호 국장의 언플이 통했는지 스타메이커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고아라며?’, ‘부모님 없이 힘들게 컸다던데?’라며 호기심에 스타메이커를 본 시청자들은 윤희자와 함께 무대를 휘저어 놓은 스물한 살의 어린 배우에 매료됐다.
“락이가 아주 복덩이야. 이슬이 ‘해피 스릴러’도 이 배우가 카메오로 출연하는 거로 좋은 조건에 계약했고 말이야.”
“그러게요. 다 잘 풀리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근데 넌 어떻게 거기서 락이를 카메오에 출연시킨다고 배팅하냐. 작가는 적극 찬성인데 감독이 우리 이슬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 캐스팅 엎어질 뻔했잖아.”
“제가 괜히 스님이겠습니까?”
“뭐? 스님? 큭큭큭. 그 별명 이제는 마음에 든 거냐?”
강진석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두 여자의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드라마가 아닌 다른 제작 차량이 보였다.
“형님. 저게 뭐죠?”
“아. 오늘부터 촬영인가 보네. MBS에서 두 여자로 다큐멘터리 찍는다고 했거든. 그건가 봐.”
나와 강진석이 차량에서 내리는데 다큐멘터리 제작진들이 나를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