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6화 (87/261)
  • #86화. 수상한 팬들

    이락의 무대가 끝나자 공개홀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몇몇 관객들의 훌쩍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락이 보여 준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그의 진심 그 자체였다.

    모든 걸 쏟아 낸 이락이 힘없이 무대 위에 주저앉았다.

    이락이 쓰러지는 것을 본 나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갔다.

    “괜찮아요?”

    “대표님.”

    이락은 온몸에 힘이 풀렸는지 물에 젖은 솜처럼 내게 안겼다.

    “미안해요. 대표님. 갑자기 앞이 안 보였어요.”

    “괜찮으니까 나한테 기대요.”

    “대표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면 안 되는데.”

    “하나도 안 힘드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기대서 일어나 봐요.”

    나는 이락을 일으켜 세웠다.

    관객들은 아직도 숨죽이고 이락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 모든 광경이 카메라를 통해 녹화되고 있었다.

    “관객들한테 인사하고 가야죠. 할 수 있겠어요?”

    “예. 해 볼게요.”

    나는 이락의 어깨를 잡고 서 있었고 이락은 내게 기댄 채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이락이 고개를 들고 관객들을 바라봤다.

    그는 울컥하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내뱉었다.

    “배우 이락이었습니다.”

    이락의 마지막 말과 함께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 명의 관객들은 오로지 이락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모인 팬들처럼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이락은 자신에게 열광하는 관객들을 보며 얼떨떨했고 나는 그에게서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봤다.

    * * *

    무대 위에 세 명의 배우들이 서 있다.

    방금 백 명의 관객들이 투표를 진행했으며 심사위원 세 사람이 그 결과를 받아 확인하고 있었다.

    윤희자가 미소 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내 손에는 결승전에 오를 최종 2인의 이름이 들려 있습니다.”

    이락, 박선호, 이하진이 떨리는 눈으로 윤희자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봤다.

    “최종 2인을 발표하기 전에 선배로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윤희자의 말에 세 배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스타메이커는 예능입니다. 여기에서 우승하거나 떨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나는 이미 여러분들이 배우라고 생각해요.

    배우라는 직업은 화려해 보이지만 외로운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길게 보고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오늘 여러분들이 관객들에게 보여준 연기는 훌륭했어요. 그러니까 오늘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겠죠?”

    윤희자의 후배들을 향한 진심 어린 충고가 끝나자 이락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예. 선배님.”

    “어머. 깜짝이야. 나 귀 안 먹었어.”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만하라고.”

    김건명이 이락과 눈을 마주치며 웃는 윤희자를 보며 물었다.

    “윤 선생님. 어서 발표하시죠.”

    “김 배우가 할래?”

    “왜요? 떨리세요?”

    “아니. 내가 악역이 되긴 싫어서.”

    “에이. 저도 싫습니다.”

    “그럼, 우리 윤 감독이 하자. 윤 감독 이거 받아.”

    가만히 있던 윤서혁은 윤희자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 들고 멍한 표정이 됐다.

    “윤 선생님. 김 배우님. 힘든 건 다 저한테 떠넘기시네요.”

    “이런 것도 못 해? 젊은 윤 감독이 좀 해 줘.”

    말이 많고 활달한 윤서혁 감독은 지금까지 윤희자와 김건명의 기에 눌러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심사만 봤었다.

    마지막이라고 윤희자와 김건명이 합세해서 윤서혁을 몰아주자 그는 웃으며 봉투를 열었다.

    “까짓거 제가 악역 하죠. 자, 최종 2인을 발표하겠습니다.”

    윤서혁은 시간 끌지 않고 바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스타픽의 박선호 그리고 스타탄생의 이락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최종 결선에서 봅시다.”

    이락은 이름이 불리자마자 무대 아래에서 기도하고 있는 나를 바라봤다.

    이락의 진심이 통했구나.

    박선호의 매니저 윤호상은 뛸 듯이 기뻐했다.

    “으아. 선호야.”

    나는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윤호상을 붙들고 말했다.

    “윤 매니저님 우리 올라갑시다.”

    “예?”

    “우리도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에요. 올라가서 축하해 줍시다.”

    윤호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습니다. 갑시다.”

    나는 무대 위로 달려가 이락을 있는 힘껏 안았다.

    * * *

    숙소에서 짐을 뺀 이락과 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두 사람을 위한 결승 무대는 한 달 후에 생방송으로 펼쳐지게 된다.

    나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며 얼떨떨해하는 이락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이곳을 나가면 아마 이 배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다시 락 군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이제는 내 배우니까 이락 배우님이라고 부를 건데요.”

    “자꾸 그러시니까 쑥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나와 이락이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드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LOK 이하진 배우와 김경진 매니저의 모습이 보였다.

    이하진은 우리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지만, 김경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하진이 싸늘한 표정의 김경진에게 물었다.

    “결국 못 찾은 거예요? 대체 뭘 잊어버렸길래 그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그냥 내 개인 물품이야. 이 배우는 몰라도 돼.”

    “김 매니저님이 계속 그렇게 저기압이니까 같이 있는 저도 좀 그렇잖아요.”

    “그냥 신경 쓰지 마.”

    일 층에 도착하자 우리는 짐을 들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이락이 이하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김경진의 곁으로 가서 물었다.

    “뭘 잃어버리셨는데요?”

    김경진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쪽은 알 거 없으니 관심 꺼.”

    “뭔지 알려 주면 내가 찾아줄 수도 있잖아요.”

    “원 대표는 절대 모르는 물건이니까 관심 끄라고.”

    LOK 밴 앞에 선 김경진이 이하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이 배우. 그만 수다 떨고 빨리 와!”

    LOK 밴이 떠나자 이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말했다.

    “어휴. 저기는 매니저가 너무 무서워요. 하진 형님도 김 매니저님이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고 하네요.”

    “중요한 걸 잃어버려서 신경이 쓰일 겁니다.”

    “예? 중요한 거요? 그게 뭔데요?”

    “그런 게 있습니다. 우린 그만 가죠.”

    * * *

    스타메이커의 첫 번째 공개 녹화 무대가 방송을 탔다.

    캐스팅 미션이라는 이름으로 이락과 윤이슬이 아이돌 마스터의 다온과 미녀의 조건의 최설아 역을 소화하자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다.

    - 이락 이쁘다 우쭈쭈 해 주고 싶다 ㅋㅋ

    - 대박 귀엽다.

    - 남자애 눈 왜 저렇게 이뻐?

    - 둘 다 너무 귀엽다 이락, 윤이슬 너무 이뻐.

    - 둘이 케미 너무 좋아ㅠㅠㅠ 같이 드라마 한 편 해 주면 안 되나?

    - 울 이슬이 꽃길만 걷길 ㅠㅠㅠㅠ

    - 윤희자 선생님 완전 반하셨는데??

    - 저 꽃 원세강이 준비한 거다. 미친 아저씨가 사람 홀리고 있네.

    이락과 윤이슬에게 이 배역을 몰아준 대형 소속사의 매니저들은 지금쯤 속이 꽤 쓰릴 거다.

    저런 류의 연기가 연기력을 드러내기에는 힘들어도 팬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함께 모니터링 중이던 강진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아이고. 우리 세강이 이런 놈이었냐? 저 꽃은 언제 또 준비한 거래?”

    “식당에 그렇게 꽃을 꽂아 둔 건 오디션에 사용하라는 거 아니겠어요? 아닌가요?”

    “참나. 이렇게 나온다고? 너 많이 컸다.”

    “원래도 키는 형님보다 컸어요.”

    “에이. 그걸로 놀리는 건 반칙이지.”

    강진석은 웃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하지만 이내 방금의 캐스팅 미션은 페이크고 미스 캐스팅이 진짜라고 뜨자 강진석은 흥분했다.

    “어라? 이게 뭐야? 이게 진짜 미션이라고?”

    나는 흥분해서 날뛰는 강진석을 보며 지금 방송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도 같은 상황일 거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 제작진 미쳤나? 미스 캐스팅이라니?

    - 아오. 우리 이락한테 왜 이러냐? 조폭이 뭐냐고?

    - 방금 아이돌 춤춘 사람이 망치 연기해야 함. ㅋㅋㅋㅋ- 스펙타클하네. 이래야 예능이지.

    - 윤이슬은 흥부네 딸들. 미친. 이거 누가 투표한 거냐?

    - 다른 배우들도 안 어울리는 역 해야 하는 건 맞는데 유독 스타탄생 소속 두 사람이 너무 극과 극이다.

    - 이걸로 스본 귀염둥이들 떨어지면 방송국 놈들 죽인다.

    결과를 알고 있는 강진석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세강아. 대체 어떻게 연기를 했길래 조폭이랑 귀여운 막내딸 연기로 살아남은 거냐?”

    “그냥 보세요. 이제 곧 이 배우, 윤 배우 차례네요.”

    “케이블이라서 중간 광고는 또 오지게 틀어 주네. 아이고 성격 급한 나는 못 기다리겠다.”

    목이 타는지 아래층으로 콜라를 가지러 간 강진석을 보며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윤이슬이 보여 주는 흥부네 딸들 홍소리 연기가 시작되자 강진석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와. 이거 대박이네. 우리 이슬 씨 대본 좀 다양하게 들어오겠다. 그렇지 세강아.”

    “그러게요. 보니까 들어온 대본이 다 액션이 주거나 쎈 배역들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스턴트맨 출신이란 특이한 이력도 그렇고. 우리 이슬이가 워낙 액션을 잘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지. 근데 저기 좀 봐라. 우리 이슬 씨가 이렇게 귀여운 연기도 찰떡같이 소화한다고. 크큭큭.”

    앙증맞고 귀여운 연기로 관객들을 초토화한 윤이슬이 쑥스럽게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사실 윤이슬이 보여 준 연기는 연기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연기다.

    하지만 이전에 보여 준 유도 소녀와 워낙 극을 달리하는 막내딸 연기에 사람들이 반응한 것이다.

    - 갭 쩌네.

    - 누가 액션 스타래? 내가 보기엔 큐티 스타인데.

    - 이 언니 매력 쩜.

    - 굿굿.

    - 미스 캐스팅 미션에 찰떡임.

    - 와. 이 캐릭터로 다른 극에서도 보고 싶다.

    윤이슬이 합격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이락만이 남은 상황이다.

    시청자들은 아이돌에서 조폭이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이락이 어떻게 소화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 이게 오늘의 핵심이네.

    - 뽑기 운도 좋아. 마지막이잖아.

    - 상큼한 조폭이 한 명쯤은 있을 수도 있잖아.

    - 여기서 떨어지진 않겠지?

    - 아.. 왜 또 광고야. NGB야 광고 좀 그만 틀어라.

    * * *

    24시간 해장국 집에서 누군가 텔레비전의 채널을 바꾸려고 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질 나쁜 사내들이 일시에 외쳤다.

    “좋은 말 할 때 손 떼라.”

    손님은 사내들의 외침에 놀라 급하게 리모컨을 던지고 자리로 돌아왔다.

    해장국집의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스타메이커가 방송 중이었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최용팔 일행이었다.

    민식이가 최용팔을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보스. 락이 떨어지는 거 보려고 하시는 거죠?”

    최용팔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당연하지. 저 새끼가 무슨 연기야. 떨어져야지.”

    최용팔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이락이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폭 연기이지 않은가?

    “시발. 저 새끼가 달건이 연기하고 떨어지면 그것도 좀 그런데.”

    “하긴 그렇죠. 이십 년간 보고 배운 게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는 붙었으면 좋겠네요. 다음에 떨어지면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오오. 합니다.”

    해장국을 먹던 사내들이 시선을 텔레비전을 향했다.

    “그렇다고 너무 응원은 하지 말아라.”

    “예. 보스.”

    회색 도시의 망치로 분한 이락의 눈빛이 돌변했다.

    방금까지 뒤에 꽃 배경이 보이는 듯 환하게 웃던 꽃미남은 사라지고 동네 양아치처럼 변한 그의 모습에 사내들이 일순 고요해졌다.

    “저거 보스 말투네요.”

    수하의 말에 최용팔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뭐? 나라고?”

    텔레비전 속의 이락은 부서진 나무 조각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부하들을 겁주고 있었다.

    [거지같이도 부숴 놨네. 봐 봐. 여기 못이 그대로 매달려 있잖아. 각목으로 맞으면 그냥 멍이나 들고 마는데, 이렇게 못 박힌 각목으로 맞으면 몇 달은 고생해. 잘못하면 파상풍 걸려서 절단해야 한다고. 알아?]

    수하들에게 자주 린치를 가하는 최용팔은 이락의 연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얘들아. 내가 정말 저렇게 말하냐?”

    “어휴. 걸음걸이도 똑같이 흉내 냈는데요. 락이가 연기를 좀 하는 것 같습니다.”

    “너 조용히 해. 아니지. 너희 다 눈 깔고 밥이나 먹어. 텔레비전 보지 마.”

    최용팔의 말에 수하들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텔레비전 속에는 뻔뻔하게 연기하는 이락이 보였다.

    최용팔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짜식. 연기는 좀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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