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5화 (86/261)
  • #85화. 진심이 담긴

    “역시 내 말이 맞다니까. 원 대표가 가족이랑 아주 인연이 깊어. 하하하.”

    김경진이 심각해진 나를 보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나는 대본을 보며 기뻐하는 이락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고 해산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이 대본으로 오디션 보니까 다들 열심히 준비해 주세요.”

    조연출이 우리를 남겨 두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우리를 보며 이죽거리는 김경진에게 다가갔다.

    “그만하시죠. 이하진 배우가 좋은 대본 받은 건 알겠는데 왜 다른 배우를 깎아내리며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언제? 난 그냥 이락 배우가 운이 좋은 거 같아서 축하해 준 거라고. 이자현 배우가 가족 찍고 얼마나 떴어. 이제 이락 배우도 그렇게 될 거라고.”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김경진 매니저님의 그 발언을 정말 곧이곧대로 받아들일까요?”

    “뭐라고?”

    “나중에 이 장면이 하나도 안 빠지고 방송에 그대로 나갔으면 좋겠네요. 시청자들도 김경진 매니저님과 같은 생각인지 궁금하니까요.”

    내가 세게 나오자 김경진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대표님. 그만하고 연습하러 가시죠.”

    이락이 내게 다가와 내 팔을 흔들었다.

    나는 눈빛을 풀고 이락을 바라봤다.

    “갑시다. 이 배우님.”

    나와 이락이 문을 열자 김경진이 우릴 보며 뭐라는 소리가 들렸다.

    “원세강. 네가 무슨 천사표야? 웃기지도 않아. 사람들이 너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일부러 큰소리 나게 대기실 문을 닫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이락이 놀라 물었다.

    “대표님. 그렇게 화내는 거 처음 봤어요.”

    “그래요?”

    “예. 언제나 웃고 다니시잖아요.”

    “김경진 매니저가 이락 배우뿐만 아니라 이자현 배우도 놀리는 거 같아서 화가 좀 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게 나가도 되나요?”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아마 이거 방송 나가면 김경진 매니저가 욕먹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락은 내 말에 안심이 되는지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대표님.”

    이락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사실 가족이 제일 하고 싶었어요.”

    이락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하자 내 눈이 커졌다.

    “왜요?”

    “뭔가 내 지금 상황이랑 묘하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감정 이입이 더 돼요.”

    “아…….”

    나는 그제야 이락이 가족의 대본을 받고 기뻐한 이유를 알았다.

    “제가 나중에 유명한 배우가 돼서 어머니와 다시 만나게 되는 걸 상상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이런 상황도 있지 않을까 했어요. 제가 제작 발표회를 하는데 어머니가 찾아오시는 거죠. 그럼, 저는 기자들을 헤치고 어머니에게 달려가 안기는 거예요. 되게 뻔하죠?”

    “아니에요. 멋지기만 하네요.”

    “에이. 아닙니다. 다들 유치하다고 할 거예요. 알아요. 엄마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제작 발표회에 찾아오신 엄마를 알아봐요? 말도 안 되는 거 잘 알아요.”

    이락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가족만은 절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이락이야말로 가족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 * *

    녹화장에 들어서자 배우들은 긴장했다.

    오늘 이곳을 나갈 때는 스타메이커의 결승에 오르는 단 두 명의 배우만 남게 된다.

    이락과 박선호는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었지만 LOK 이하진은 홀로 대본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의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배우들은 그가 누군지 몰랐지만, 김경진은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LOK 김경진 매니저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갔다.

    “이정호 국장님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오. 김경진 매니저군요. 오랜만에 봅니다.”

    이정호와 김경진이 악수를 하자 윤호상 매니저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이정호가 누군가요?”

    “NGB 예능국 국장입니다.”

    “예?”

    윤호상이 놀라 두 눈이 커졌다.

    “원 대표, 우리도 김경진 매니저처럼 가서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우리 쪽으로 오고 계시네요.”

    “예?”

    이정호 국장이 다가오자 윤호상은 몸이 굳어 버렸다.

    나는 우리 앞에 다가온 이정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입니다. 이락 배우의 매니저로 스타메이커에 참가했습니다.”

    “저…… 저는 스타픽의 윤호상이라고 합니다. 저기 있는 박선호 배우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윤호상은 긴장해서 버벅거리며 간신히 인사를 마쳤다.

    김경진은 이정호 국장의 곁에 찰싹 붙어서 듣기 좋은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현장에 나오시기도 하고. 이 국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이정호는 배우들과도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눴다.

    대기실 모두와 인사를 마친 이정호가 갑자기 뒤 돌아 우리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국장님?”

    이정호는 의아해하는 김경진을 무시하고 나와 이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락 배우는 나 좀 따로 볼까요?”

    김경진은 이정호가 이락을 따로 보고 싶다고 하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나는 이정호가 왜 이락을 보자고 하는지 알지 못해 긴장했다.

    하지만 이락 혼자 보내는 것보단 내가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음. 뭐 그래요.”

    이정호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이정호가 나가고 나는 옷걸이로 걸어갔다.

    매니저들의 옷이 걸린 옷걸이에서 내 옷을 챙긴 나는 이락에게 말했다.

    “갑시다. 배우님.”

    * * *

    녹화장에 만들어진 은밀한 공간에 나와 이정호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이락은 방금 이정호와 대화를 나누고 최욱환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이정호는 이락이 부모도 없는 천애 고아로 힘들게 자란 것을 알고 찾아왔다고 했다.

    최욱환은 배우의 과거를 팔아서 시청률을 올리고 싶지 않다고 일부러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정호가 그걸 알고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카메라까지 대동하고 말이다.

    방금 이정호와 이락의 대화는 아마도 방송에 나갈 거다.

    국장이라는 사람이 힘들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이락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러 온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이정호는 이락에게서 스타메이커의 시청률을 견인해 줄 냄새를 맡은 거다.

    “원 대표는 나와 둘만 대화하고 싶다는 게 뭐죠?”

    이락과 최욱환과 함께 카메라까지 사라지자 이정호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그의 표정이 돌변하는 것을 보고 내 촉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물었다.

    “이락 배우님을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한테 감사할 게 뭐가 있나. 다 이 배우가 열심히 해서 그런 거겠지.”

    이정호는 카메라가 있을 때와 달리 내게 편하게 말을 놨다.

    나는 뻔한 말을 하는 이정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 배우의 가정사를 이용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이정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이용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네. 오디션 한두 번 해 보나? 원래 오디션 참가자의 가정사는 단골손님이야. 시청자들도 연민을 가지는 참가자들한테 더 좋은 점수를 줄 거라고. 우리만 좋은 게 아니야. 이락 배우한테도 득이 될 텐데 원 대표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라고.”

    “적당한 언플은 괜찮지만, 도를 넘어가면 안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장사 한두 번 하나? 우리도 적정 수준을 지켜 가며 할 테니 원 대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웃는 이정호를 보며 말을 아꼈다.

    “악마의 편집. 저는 그런 거 못 참습니다.”

    “걱정하지 마. 나는 편집으로 양념을 좀 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최욱환이 머리가 커서 내 말을 안 들어.”

    “그럼, 국장님 말씀을 믿겠습니다.”

    “그래. 믿으라고. 하하하.”

    * * *

    세 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새로 뽑힌 관객들은 처음 보는 배우들을 보며 낯설어했다.

    “마지막 3인에 뽑힌 거 보니까 연기를 잘하나 보다.”

    “저기 제일 오른쪽에 서 있는 배우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누구?”

    “저기 흰 티에 청바지 입은 사람.”

    “진짜네. 이름도 이락이래. 예쁘다.”

    “가운데 남자도 잘생기지 않았어?”

    “누구? 박선호 말하는 거야?”

    “저 배우 알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후배야. 학교에서도 연기 천재라고 소문났다던데.”

    “와. 대박이네.”

    “왼쪽 배우도 낯이 익다.”

    “저 사람은 이하진이잖아.”

    “이하진은 누구야?”

    “강하나랑 뮤직비디오 남주로 같이 나온 사람이잖아. 몰라? 쟤도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었어.”

    “그 화가로 나왔던 남자구나. 와! 다시 보니까 다르게 보인다. 방청 신청하길 잘했다.”

    녹화가 시작되고 무대 위에 오늘의 미션명이 떴다.

    [네 번째 미션: 명장면 따라 하기]

    MC 최혁이 오늘 미션에 대해 설명했고 이내 세 배우들이 연기할 명장면이 화면에 등장했다.

    박선호, 오발탄 ‘이준용 중위 법무장교’.

    이하진, 바람의 기록 ‘윤철’.

    이락, 가족 ‘박선정’.

    모두 천만 영화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작품의 배역이었다.

    관객들은 작품과 역의 이름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영화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재생됐다.

    “박선호 대박이네. 저거 제대로 연기하기만 하면 우승은 떼 놓은 당상이다.”

    “바람의 기억도 명장면이잖아.”

    “아이돌같이 생긴 배우는 이번에 탈락하겠다. 가족은 좀 그렇지 않아? 그냥 질질 짜다가 들어가겠네.”

    “심지어 여자 역인데 남자가 하는 거잖아.”

    “진짜 그러네.”

    * * *

    대기실에 나와 이락이 홀로 앉아 있다.

    박선호와 이하진이 차례대로 먼저 무대로 올라갔고 우리가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다.

    나는 긴장하는 이락을 보며 말했다.

    “이자현 배우는 가족이란 작품을 싫어했어요.”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무조건 성공하는 영화니까 꼭 하라고 했죠.”

    “그럼, 잘된 거네요. 천만 영화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사람들한테 욕만 먹잖아요. 저 영화가 왜 천만이냐며 말입니다. 이락 배우는 떨리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좋아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심이 마음에 들어요.”

    “이 배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입니다.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고 모든 걸 보여 주고 와요.”

    “예. 대표님.”

    이락은 내 손을 꼭 잡아 주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아이돌그룹 제작 발표회에서 갑자기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는 박선정으로 분한 이락이었다.

    이락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마치 제작 발표회에 와 있는 기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싸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

    기자들은 이락이 뭐라고 말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관객들은 다르다.

    ‘아. 그 즙 짜는 장면이구나.’라며 이락이 어떻게 연기할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할 말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기사로 써 주세요.”

    자리에서 일어선 이락은 잠시 숨을 골랐다.

    머릿속에 대사를 떠올리니 갑자기 심장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지금 수술실에 계십니다.”

    이락은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고 다시 감정을 추슬렀다.

    관객들은 그들이 그 현장에 와 있는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저는 엄마의 수술 날에도 가지 않고 이곳에 온 불효자입니다.”

    이락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의 심장이 아팠다.

    이락의 그런 마음이 멀리서 지켜보는 내게도 온전히 느껴졌다.

    “우리 엄마는 청소부셨어요. 제가 연습하는 회사의 청소부요. 저는 그런 엄마가 미웠고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아이돌이 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너무 미워서 내가 고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이락의 떨리는 목소리가 녹화장을 가득 채웠다.

    이락은 박선정이 이해됐다.

    그도 한때는 어머니를 증오한 적이 있었다.

    왜 나를 그런 곳에 버리고 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철이 들었고 이제는 자식을 버릴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을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웠다.

    “기자분들이 기사를 많이 써 주시면 좋겠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제가 불효자인 거 알게 돼도 좋아요. 엄마가 수술 후에 깨어나시면 제 사진이 가득 찍힌 기사를 보고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습니다.”

    이락의 진심을 다한 연기에 나는 갑자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은 발작이 없었는데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쓰러지는 것은 아닌지 잠시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관객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이락의 연기에 감동해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보였다.

    박선호와 이하진이 했던 연기처럼 압도적이거나 카리스마 있는 연기는 아니었지만, 진심을 담은 연기가 통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만 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이락은 입을 열다가 울컥하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이란 영화 속에서 박선정은 이 장면에서 내내 눈물을 흘렸지만, 이락은 절대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사를 내뱉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락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대사를 내뱉었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엄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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