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4화 (85/261)

#84화. 명장면 미션

수줍게 그려 넣은 하트를 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쪽지를 펼치자 단정한 필체가 나타났다.

[요정 서이렌이에요. 저를 잊은 건 아니겠죠?

제가 보고 싶다면 촬영하다가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ㅎㅎ난 대표님이 보고 싶어서 힘들어요.

하지만 나 때문에 빨리 떨어지려고는 하지 마세요.

두 여자는 순항 중입니다.

이자현 선배는 대표님 말씀처럼 좋은 배우예요.

함께 좋은 작품 만들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며.

요정 서이렌.

추신: 대표님. 방송에 너무 멋있게 나오시던데 튀지 않게 뭐라도 좀 해 봐요.]

작은 쪽지에 예쁜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이렌의 쪽지를 다 읽은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내가 아는 이자현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이대로 스타메이커만 제대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승자는 아마도 스타픽의 박선호일 거다.

이락도 재능이 있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박선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결승전.

최종 2인까지 들고 시청자들에게 이락의 매력을 최대한 어필하고 떨어지는 것이다.

오늘 미션으로 두 명이 떨어지고 이제 남은 사람은 세 명이다.

내가 정한 목표까지 한 번만 더 버티면 된다.

나는 서이렌의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초승달이 홀로 외롭게 떠 있다.

달빛이 조용히 내려와 작은 내가 서 있는 발코니를 비추고 있다.

서이렌과 다시 만난 날은 오늘과 같은 만월의 밤이었다.

가득 찼던 달이 점점 기울고 있다.

나도 저 달처럼 점점 사그라들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내 사람들을 비추다 가고 싶다.

빛이 사라지면 그때가 내가 돌아갈 때다.

* * *

며칠 후, 스타탄생 사무실에 윤이슬이 나타났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오니 강진석과 빈선예가 그녀를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했어요. 이슬 씨. 푹 쉬었죠?”

“예. 가족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쉬었습니다.”

“어제 스타메이커 방송한 거는 봤어요? 이슬 씨 너무 잘하던데요.”

“감사합니다. 빈 팀장님. 최종 2인에는 들고 싶었는데……. 결국 못 했어요.”

윤이슬은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는지 울컥했다.

빈선예는 그런 윤이슬을 포근히 안아 주며 말했다.

“무슨 말이에요. 나는 이슬 씨가 너무 잘해 줘서 깜짝 놀랐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걸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이 층에서 강진석이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윤이슬 앞에 다가온 강진석이 윤이슬 앞에 한 꾸러미의 대본을 올려놨다.

“강 이사님. 이게 뭔가요?”

“뭐긴. 우리 윤 배우한테 쏟아진 대본이지.”

“저한테요?”

윤이슬이 놀란 눈으로 대본에 시선을 돌렸다.

한두 개도 아니고 족히 봐도 열 개는 넘어 보였다.

“그럼, 당연하지. 이것도 내가 추리고 추린 거야. 나중에 원 대표 돌아오면 윤이슬 배우 데뷔작을 결정할 거야. 그러니까 우선 윤 배우가 먼저 읽어 보라고.”

빈선예는 놀라서 당황하는 윤이슬의 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

“CF도 들어왔어요. 남은 스타메이커 촬영분이 방송 나가면 아마 더 들어올걸요?”

“이사님. 팀장님.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걸까요?”

“무슨 소리예요? 받아도 되는 게 아니라 받아야죠. 빨리 앉아서 대본 읽어 봐요.”

빈선예가 윤이슬을 자리에 끌어 앉혔다.

대본을 든 윤이슬이 손이 떨렸다.

윤이슬은 결국 참아 왔던 눈물을 쏟아 냈다.

* * *

이제 남은 사람은 세 사람이다.

스타픽 박선호.

LOK 이하진.

스타탄생 이락.

지난번 이인극 미션에서 박선호와 이락만이 유일하게 윤희자와 김건명의 애드리브를 받아쳐서 극을 제대로 끝냈다.

이하진은 떨어진 다른 배우들처럼 애드리브를 받아치지 못하고 극을 망쳐 버렸다.

똑같이 애드리브를 받아치지 못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하진보다는 윤이슬이 살아남았어야 한다.

윤이슬은 애드리브를 치지 못하고 버벅댔지만, 재빨리 페이스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하진은 실수해 놓고 그 자리에서 관객들에게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시 이인극을 이어 나갔다.

공개 녹화부터는 심사위원들의 점수가 빠지고 관객들의 점수로 탈락자가 결정된다.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하진의 행동에 관객들은 매력을 느꼈고 윤이슬이 떨어지고 그가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배우들과 함께 연습하는 이하진을 바라봤다.

이락과 이하진은 이미지가 꽤 비슷하다.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었다는 이하진도 아이돌처럼 상큼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이락과 나이도 같다.

키도 비슷하고 외모나 분위기도 같고 연기력도 솔직히 말하면 비슷하다.

하지만 이하진의 최대 무기는 그의 배경이다.

아버지는 한국건설 부사장이고 어머니는 유명 요리연구가.

이하진은 스타메이커가 끝나도 금수저 출신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조연출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대본 세 개가 들려 있었다.

배우들은 대본이 다음 오디션 과제일 거라는 생각에 그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여기 세 개의 대본이 있습니다. 보시죠.”

조연출이 내려놓은 대본을 본 배우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세 개의 대본은 모두 한국 영화사에 큰 기록을 남긴 천만 영화의 대본이었다.

드디어 그 미션인가?

이번 미션은 천만 영화에 나온 명장면을 연기하는 것이다.

공개 녹화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한번은 봤을 영화를 선택해서 그걸 그들 앞에서 연기하고 통과자, 탈락자를 결정하게 된다.

이번 미션의 핵심은 어떤 영화의 대본을 연기하게 될지다.

배우들은 천만 영화 대본을 눈으로 훑었다.

모두 쟁쟁한 작품들이지만 ‘이게 왜 천만이나 들었을까?’ 하는 작품도 있다.

‘가족’

이자현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최초의 작품이자 내가 그녀와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다.

영화 가족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남매를 키우기 위해 고생만 하던 어머니는 암에 걸린다.

그걸 모르는 네 남매는 이제야 세상에서 꽃을 피우는 그들의 인생에서 청소부인 어머니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자현은 이 영화에서 막내딸 선정이 역을 맡았다.

선정이는 길거리 캐스팅에 뽑혀서 아이돌 가수가 되지만 청소부인 어머니를 숨기려고 하고 그것이 어머니에게 큰 상처가 된다.

어머니는 자신만 죽으면 가족들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보험금도 남길 수 있다며 치료를 중단한다.

결국엔 모든 걸 알게 된 네 남매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뛰어다니고 어머니는 수술에 성공해서 눈을 뜬다.

가족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내용만으로도 눈물이 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런데 감독은 이미 충분히 감동적인 작품에 너무 많은 눈물의 함정을 심어 놨다.

흔히 말하는 신파.

당시에는 그게 먹혀서 천만 관객이 들었지만 많은 사람이 울라고 자리 깔아 놓은 신파 장면을 혐오하기도 했다.

배우들이나 매니저들이나 대본을 보며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족만 아니면 된다.

저건 너무 올드한 대본이야.

인터넷 밈까지 만들어져서 개그 프로에까지 나왔던 영화.

무조건 가족만 피하자.

LOK 김경진 매니저는 대본을 눈을 훑고는 곧바로 손을 들었다.

“대본은 어떻게 선택하는 거죠?”

“지금 여기서 고르게 되실 겁니다. 아주 공정하게요.”

“공정이라고요?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김경진이 공정이란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조연출이 재빨리 가지고 온 상자를 꺼냈다.

“이 안에 천만 영화의 이름이 담긴 세 개의 쪽지가 들어 있습니다.”

랜덤이라는 거구나.

그럼, 공정한 게 맞겠군.

나는 이락에게 주고 싶은 배역을 따내기 위해 여기 있는 두 매니저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하는 한편, 혹시나 이락이 가족을 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선호야. 어떻게 할 거야? 네가 뽑을 거지?”

“전 이런 거 할 때마다 꽝 뽑았습니다. 형님이 대신해 주세요.”

“하. 나도 이런 거 젬병인데.”

박선호가 못하겠다고 하자 결국 윤호상이 나섰다.

나는 이락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요? 이락 배우는 직접 뽑을래요?”

이락은 상자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전 제가 할게요. 뭐가 됐든 제 선택이어야 후회가 안 남을 거 같아요.”

“괜찮겠어요? 긴장되면 내가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걱정 안 해요. 세 작품 모두 엄청나게 성공한 천만 영화잖아요. 뭐가 되든지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신만만한 이락을 보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상자 앞에 세 사람이 섰다.

이락, 윤호상 그리고 김경진이었다.

김경진이 조연출을 보며 말했다.

“순서도 중요한 거 같은데. 뽑기 순서는 어떻게 하나요?”

“그건 세 분이 알아서 정하십시오.”

조연출은 말하며 뒤로 빠졌다.

윤호상은 알아서 하라는 말에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전 이런 건 잘 못합니다. 그냥 마지막에 남은 거 할게요. 두 분이 결정하세요.”

이락과 김경진 두 사람이 남자 김경진이 이락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 바닥 선배니까 내가 먼저 할게. 이의 없지?”

지금 이 순간에 선배, 후배를 따지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나서려는데 이락이 바로 김경진의 말에 답을 해 버렸다.

“예. 그렇게 하세요. 먼저 뽑으세요.”

“고마워. 사람이 됐네.”

김경진은 이락을 보며 야릇한 미소를 보냈다.

“그럼, 먼저 뽑을게.”

김경진은 상자 속에 손을 넣고 종이를 꺼내 손에 감췄다.

이후에 이락이 뽑고 마지막으로 윤호상이 남은 쪽지를 뽑았다.

“자, 그럼 하나씩 펼쳐 볼까요?”

김경진은 긴장이 되지도 않는지 웃으며 종이를 펼쳐 들었다.

[바람의 기록 ‘윤철’]

조연출은 바람의 기록 대본을 이하진에게 건넸다.

“빨리 펼쳐 봐. 뭘 연기하는지 보게.”

김경진이 닦달하자 이하진이 대본을 펼쳐 들었다.

대본을 본 이하진과 김경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람의 기록은 화가 윤철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대본 속의 장면은 윤철이 십 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그린 화첩이 불타자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울며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이라 관객들에게 연기력을 각인시키기 쉬울 거였다.

“됐어. 이거야.”

김경진은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을 드러내고 웃었다.

이락이 긴장해서 땀을 흘리는 윤호상에게 말했다.

“먼저 까 보세요. 전 마지막에 할게요.”

“그럴래?”

윤호상은 못 참겠는지 바로 쪽지를 펼쳤다.

[오발탄 ‘이준용 중위 법무장교’]

오발탄이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윤호상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가족은 자동으로 이락이 하게 된다.

윤호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조연출에게 대본을 받아 와 펼쳤다.

오발탄은 군대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재판을 그린 영화고 박선호가 맡을 역할은 신임 법무장교 역이다.

그가 연기할 장면은 신념과 정치 싸움 속에서 고뇌하다 결국 마지막 재판에서 모든 것을 밝히는 최종 변론 장면이었다.

누가 봐도 박선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 줄 수 있는 완벽한 장면이었다.

윤호상은 기쁜 나머지 환호성을 지를 뻔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족이 걸린 이락이 있기에 마냥 좋아하기 그랬다.

김경진이 조연출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가족 대본 줘 봐요. 내가 원 대표한테 가져다줄 테니까.”

김경진은 일부러 나와 이락의 기를 죽이려고 뻔한 행동을 했다.

김경진은 조연출의 손에서 가족의 대본을 낚아채 와 이락이 아닌 내게 건네며 말했다.

“지금 보니까 원 대표가 가족이랑 인연이 깊어. 이자현 배우도 이걸로 빵 떴잖아. 그런데 새로 키우는 신인 배우도 이걸로 오디션을 보니까 말이야.”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김경진을 응시하며 그의 손에서 가족의 대본을 채갔다.

“이락 배우가 먼저 볼래요?”

“예. 제가 볼게요.”

나는 가족의 대본을 보는 이락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설마, 이자현이 연기하고 울었던 그 장면은 아니겠지.

나는 긴장한 얼굴로 이락을 바라봤다.

그때 이락이 대본을 내게 들이밀며 외쳤다.

“대표님. 대박이에요. 제가 가족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이락은 나를 향해 가족의 대본을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이자현이 찍고 울었던 장면의 대사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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