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3화 (84/261)

#83화. 애드리브 미션

윤희자는 무대에 올라온 이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당돌한 놈이야. 내 앞에서 대놓고 유명해지고 싶다는 놈은 또 처음이야. 그런데 또 스타가 되려고 날뛰는 놈치고는 반짝거린단 말이야.’

윤희자는 앞의 네 명의 배우들이 어떤 꼴로 돌아갔는지 모르고 무대 위에서 손을 흔들며 좋아하는 이락을 보며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번 장르를 휴먼에서 스릴러로 바꿔 볼까?’

윤희자는 미리 준비했던 애드리브 중에 이건 너무 심한가 싶어서 배제해 놓은 것을 떠올렸다.

‘저 당돌한 놈이라면 무슨 애드립을 쳐도 잘 받아 줄 거 같은데?’

* * *

노인이 문을 열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사내는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자 이상필의 노모가 분명했다.

사내는 품속에 감춰 둔 신문지로 둘둘 말은 식칼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상필 씨는 집에 아직 안 왔나요?”

노인은 맨발로 뛰쳐나와 사내의 손을 잡았다.

“상필아. 어찌 이리 살이 빠진 거야? 고생했지?”

사내는 자신을 살인자 이상필로 부르는 노모를 보고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군대 갔다 오느라 고생했다. 어린 나이에 그 힘든 걸 어찌 해냈을꼬.”

노모는 자식을 못 알아볼 뿐만 아니라 시간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는 이상필이 아닙니다. 이거 놔 주세요.”

사내는 노모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노모는 사내의 팔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상필아. 어미가 잘못했다. 내가 모두 잘못했으니 나가지 마라.”

이락은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고 사정하는 윤희자를 보며 가슴이 울컥했다.

“상필아. 네놈이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여 놨다. 이거라도 먹고 가렴.”

사내는 차마 힘없는 노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노인은 굽은 등을 하고 부엌으로 가 밥상을 차려 내왔다.

밥에 미역국, 김치만으로 차려진 단출한 밥상에 사내는 궁핍한 집안 사정이 떠올라 괴로웠다.

“네가 좋아하는 미역국이야. 어서 먹어.”

사내는 어쩔 수 없이 국을 한 모금 떠서 입에 넣었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끓인 미역국은 소금국이었다.

사내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내려놨다.

더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미가 상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못 넣었어. 미안해. 다음 주에 영세민 지원금이 나오니까 그때 소고기 넣어서 끓여 줄게.”

노인은 완전히 굽은 손으로 사내의 손에 다시 숟가락을 쥐여 줬다.

대본에는 사내가 치매 노인에게서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울컥한다고 나와 있었다.

이락은 이상필을 죽이러 온 사내의 감정은 잘 모르겠지만 노모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감정은 이해가 됐다.

“이거 놔요.”

사내가 노인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는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윤희자는 눈앞에서 감정 연기를 하는 이락을 보며 생각했다.

‘몰입도가 좋네. 잘하는구나.’

이락은 이인극 속의 사내에 감정을 이입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관객들은 꽃미남 이미지인 이락의 몰입력에 놀라 조용히 무대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럼, 이제 애드립을 시작해 볼까?’

순간 윤희자의 눈빛이 돌변했다.

조금 전까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치매 노인의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말짱한 정신을 가진 사람의 눈빛이었다.

이락은 윤희자의 눈빛이 ‘왜 저러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만 갑니다.”

일어서는 이락의 품에서 무언가 나와 무대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챙.’

이락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바라봤다.

신문지로 둘둘 말아 놨지만, 손잡이 모양과 떨어지며 난 쇳소리 때문에 누가 봐도 그것은 식칼이었다.

이락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허. 어쩌지? 사고 쳤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이락은 떨어진 식칼을 보고 어찌할 줄 모르다가 손을 드는 윤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윤희자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애드리브를 치려고 손을 들던 윤희자는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뭐지? 실수인가?’

윤희자는 놀라서 동작을 멈춘 이락을 보며 사고가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자신이 애드리브를 친다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윤희자가 들었던 손을 내리는데 이락이 갑자기 식칼을 주워 들더니 그걸 윤희자에게 들이밀며 외쳤다.

“꼼짝하지 마쇼. 노인장. 날 속일 생각은 하지 마.”

이락은 자신이 대사를 내뱉어 놓고도 속으로는 당황하고 있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방금 윤희자의 눈빛이 치매에 걸린 노인의 것이 아니라 정신이 돌아온 것 같다고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애드리브를 친 것이다.

순간 윤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당돌한 놈 같으니라고. 역시 네놈은 좀 달라.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맞춰 줘야겠지?’

윤희자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상필이를 죽이러 오셨소? 혹시 그때 삼거리에서 사고가 났던 최씨댁 아들이오?”

“다 알면서 왜 모른 척한 거야?”

윤희자는 정신이 돌아온 노모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락은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윤희자가 이끄는 대로 연기를 맞춰 가기 시작했다.

* * *

24시간 해장국 집에 질 나빠 보이는 사내들이 들어왔다.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장사해 온 사장은 그들의 험악한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자리를 안내했다.

“뭐 드실라우?”

“해장국 집에 해장국 먹으러 왔지? 그럼, 삼겹살 먹으러 왔겠어? 뼈다귀해장국으로 쫙 돌려 봐.”

“알겠수다.”

자리를 잡고 앉은 사내는 다름 아닌 이락의 상관이던 보스 최용팔이었다.

“야. 막내야. 텔레비전 좀 딴 데 틀어 봐라.”

“예. 보스.”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앳돼 보이는 소년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 리모컨을 찾았다.

일하는 아주머니는 혼잣말을 한 뒤, 리모컨을 찾아 소년에게 건넸다.

“어휴. 내가 보는 연속극인데.”

“뭐라고?”

“아닙니다. 받으세요.”

소년은 채널을 순회하며 보스의 의향을 물었다.

“보스. 이건 어떠십니까?”

“돌려.”

“보스. 이건요?”

“돌려.”

“보스. 이건 어떠십니까?”

“돌려.”

채널을 돌리라고 명령하던 보스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 막내야 방금 그게 뭐냐? 다시 원위치시켜 봐라.”

“예. 보스.”

막내는 채널다운 버튼을 눌렀고 이내 해장국집의 작은 텔레비전 안에 스타메이커의 오디션 현장이 나타났다.

“형님. 이거 재방인데요. 다른 거 틀까요?”

“그냥 놔두고. 소리 좀 키워 봐라.”

“예. 형님.”

텔레비전 속에는 일 년 전 골방에서 도망친 이락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나타나 PD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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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네요.”

“예.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장 땄고 지금은 방통대 다니고 있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른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인 사정이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작년까지는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 됐어요. 그러다가 스타탄생에서 일하게 됐고 대표님이 지원해 주셔서 검정고시도 따고 방통대도 다니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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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가 겁도 없이 방송에 나와? 야. 막내야. 이 프로그램이 뭐냐?”

“잠시만요. 보스.”

막내는 핸드폰으로 스타메이커를 검색했고 출연자 목록에서 이락을 찾아 보스에게 내밀었다.

“이 자식이 이름도 안 바꾸고 연예인질을 하려고 해?”

“막내야. 저기가 어딘지 좀 알아봐라. 지금 당장 가서 저놈 만나러 가야 쓰겠다.”

보스는 방금 나온 해장국에 숟가락을 처박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함께 온 중년의 조직원이 그를 막아섰다.

“용팔아. 그만 좀 해라. 너 계속 이러면 나 너랑 일 못 한다.”

“깡치 형님. 얘들 앞에서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락이 데려갔던 양반이 변호사랑 찾아와서 다 해결 보고 갔잖아. 우리가 나서면 저쪽은 가만히 있을까? 그러니까 해장국이나 먹고 가자.”

“형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십여 년간 먹여 주고 재워 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새끼잖습니까?”

“용팔아. 네놈이 그동안 락이 때린 건 기억 안 나냐? 그게 원수지. 은혜겠니?”

“깡치 형님이 너무 오냐오냐하고 키우셔서 그런 겁니다. 그러게, 골방에서 못 나가게 다리를 망가뜨려 버리자니까 괜히 막으셔서 최고의 기술자를 잃어버렸잖습니까?”

최용팔이 막 나가자 깡치라는 중년 사내의 눈빛이 돌변했다.

“네놈 말이 어찌 내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렇다고 들리는데?”

깡치의 말에 최용팔의 얼굴이 굳었다.

보스라 불리고 있지만, 이 지역을 담당하는 행동대장밖에 되지 않는 그는 최고 기술자인 깡치를 잃으면 당장 목이 떨어질 터였다.

“그만하고 해장국이나 먹어라. 알았어?”

“예. 형님.”

최용팔은 숟가락을 들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돌렸다.

환하게 웃는 이락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 * *

이락과 윤희자는 서로 얼싸안고 울고 있었다.

이락은 사내로 분해 분노에 차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 냈고, 노모 역시 아버지 없이 힘들게 살다 뺑소니 사고를 친 자식에 대해 미안함을 쏟아 냈다.

윤희자는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연기한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국민 엄마라고 칭송받지만 일흔 살 노인이 이렇게 쏟아 낼 수 있는 배역이 최근에 없었다.

윤희자는 무대 위에서 모든 힘을 다 쏟고 실신하듯 쓰러졌다.

이락은 모든 걸 다 쏟아 내고 지쳐 쓰러진 노모를 방 안에 뉘고 일어섰다.

이락 역시 기분이 홀가분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애드리브를 시작한 건데 윤희자가 잘 이끌어 줘서 속에 뭉친 응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주무세요. 어머니.”

사내는 방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자신이 방금 흘린 식칼이 떨어져 있었다.

이락은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보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더러운 신문지에 둘둘 말려 남의 칼로 살아오던 지난 과거가 떠오르자 갑자기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촬영장에서 우연히 캐스팅되어 연기를 시작했다.

유명해지면 어머니를 찾기 수월할 거라고 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남의 삶을 연기하며 행복을 느꼈다.

골방에 갇혀 살던 스무 해 동안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대리만족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속에 있는걸. 모두 쏟아 내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되어 연기하는 거였어.’

이락은 씁쓸히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고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락이 떠난 무대 위로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 * *

주차장에 스타탄생 식구가 모두 모였다.

윤이슬은 멀쩡해 보였지만 이락은 너무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누나. 가지 마요.”

“떨어졌는데 가야지.”

“그래도 가지 마요.”

이락은 윤이슬을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 미션은 이락을 위한 미션이었다.

이락와 윤희자는 갑자기 돌변하더니 대본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의 세계에 빠져 연기를 했다.

그들의 명연기를 객석에서 지켜보는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백 명의 관객 중 아흔아홉 명이 이락의 연기에 손을 들어 줬고 이락은 최고점으로 이 미션에서 통과했다.

그때 주차장으로 익숙한 차량이 들어왔다.

스타탄생 밴에서 강진석과 로드매니저 장우재가 내렸다.

“진석 형님이 직접 오신 겁니까?”

“그래. 이놈아. 내가 직접 우리 윤이슬 배우님을 모셔 가려고 왔다.”

“그쪽은 별일 없죠?”

“별일 많지. 두 여자가 얼마나 대박이…….”

“형님. 여기도 카메라 있어요. 외부의 일을 옮기면 안 됩니다.”

“내가 깜박했어. 미안해.”

장우재가 윤이슬의 짐을 차에 실었다.

강진석은 윤이슬을 보며 따뜻한 말을 건넸다.

“와. 우리 윤 배우. 대단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줄은 몰랐어.”

“고맙습니다. 강 이사님.”

“내가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우리 서울 가서 함께 풀어 보자고.”

“선물이라고요?”

“응. 윤 배우가 아주 좋아할 만한 선물이야.”

강진석은 마지막으로 내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짜식. 최대한 늦게 와라. 서울에 너 기다리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강진석은 포옹하며 내 옷 주머니에 쪽지를 집어넣었다.

“그럼, 수고해라.”

“예. 형님.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걱정하지 마. 우재가 운전은 또 기가 막히게 하잖아. 이 배우도 고생해라. 일찍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예. 이사님.”

이락은 퉁퉁 부은 눈으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석이 윤이슬을 데리고 사라지자 나는 이락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윤이슬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이락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발코니로 갔다.

발코니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나는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쪽지를 꺼냈다.

쪽지의 접은 부분에 펜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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