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2화 (83/261)
  • #82화. 첫 번째 공개 녹화

    이자현의 신작이라는 말에 박주오의 눈빛에 이채가 맴돌았다.

    “이자현 배우가 그걸 하겠대?”

    [회사에서 제작하는 첫 번째 작품인데 당연히 해야지. 한지욱 대표가 이자현 때문에 제작에 손을 대는 것 같던데. ]

    “한지욱, 한지욱, 하는데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TOP 대표야. LOK 한성제 아들인데 미국에서 경영학 전공한 엘리트라고.]

    박주오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그나저나 스타메이커라는 예능 봤어?]

    “응. 봤어.”

    [원세강 진짜 웃기는 놈이야. 원세강은 말만 많지 진짜 배우를 위하는 대표는 바로 한지욱이라고. 지금도 봐 봐. 원세강 대표는 두 여자 찍고 있는 서이렌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예능 찍으러 갔던데. 그게 말이 되나?]

    ‘이 사람아. 원 대표는 가기 전에 서이렌이나 신인 배우들 홍보를 어떻게 할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써 놓고 간 사람이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쯧.’ 박주오는 시계를 보고는 마지막 인사를 내뱉었다.

    “박 감독. 이만 끊자. 나 회의 들어가 봐야 해.”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데 시간이 없다니 어쩔 수 없네. 다음 주에 록 이사랑 지난번에 갔던 거기 갈 건데. 그때 연락할게.]

    ‘나는 인제 그만 잊고 영혼의 단짝인 록 이사랑 지지고 볶고 잘들 해 보라고.’

    “그래. 들어가.”

    전화를 끊은 박주오가 일어서며 혼잣말을 했다.

    “TOP가 제작이라……. 잘될까?”

    * * *

    참가자들 앞에 두 개의 대본이 놓여 있다.

    하나는 ‘이방인’ 그리고 나머지는 ‘어머니’.

    최욱환 PD가 참가자들을 보며 말했다.

    “저녁 8시에 하는 공개 녹화에서 여러분들이 연기하실 이인극 대본입니다. 어떤 걸 연기하게 될지 모르니 모두 숙지하셔야 합니다.”

    배우들 뒤에 포진해 있던 매니저들이 이인극이라는 말에 수군거렸다.

    LOK 김경진이 최욱환 PD에게 물었다.

    “이인극이면 두 사람이 연기한다는 건데 상대 배역은 어떻게 뽑죠?”

    김경진은 남은 배우들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이인극이면 연기력이 너무 출중한 배우는 피해야 한다.

    ‘박선호는 안 되고 이락이 제일 좋은 상대겠네.’

    김경진이 이락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데 최욱환이 입을 열었다.

    “상대 배우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연기파 배우 두 분이 상대역을 해 주실 테니까요.”

    심사위원들과 연기를 하는 건가?

    국민 어머니라 불리며 전 세대의 호감과 존경을 받는 윤희자.

    출연하는 작품마다 천만을 기록한 명품 조연 김건명.

    배우들은 윤희자, 김건명과 함께 무대에 올라 연기할 생각에 긴장했다.

    내가 본 미래에서 윤이슬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이락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백 명의 관객들 앞에서 대선배와 함께 펼치는 이인극 무대.

    하지만 나는 이 이인극 미션의 부제를 알고 있다.

    내가 힌트를 준다고 해도 윤이슬과 이락이 잘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번 미션만은 요령이나 행운을 바랄 수 없다.

    나는 긴장하는 이락과 윤이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디션 이전에 대선배님께 한 수 배울 기회예요.”

    떨리는 눈동자로 어찌할 줄 모르던 이락과 윤이슬이 나를 쳐다봤다.

    그들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느껴지던 떨림이 잦아들었다.

    “자, 한번 해 봅시다.”

    “예. 대표님.”

    * * *

    녹화장의 대기실에 들어간 참가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기실에 모니터가 없네요?”

    지금까지는 대기실에서도 다른 배우들의 오디션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대기실에는 의자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뭡니까? 아무것도 못 보는 겁니까?”

    매니저들이 스태프를 찾아가서 묻자 스태프들은 긴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윤이슬과 이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연기는 배우가 하는 겁니다. 다른 배우 연기를 보면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잘됐다고 생각하세요.”

    “예. 대표님. 그렇지 않아도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이락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고, 윤이슬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때 스태프가 들어와 우리에게 연기 순번을 전달했다.

    사전에 랜덤하게 뽑은 순서란다.

    1번 스타탄생 윤이슬.

    2번 숲 엔터의 하재윤.

    3번 LOK의 이하진.

    4번 스타픽의 박선호.

    5번 스타탄생의 이락.

    순번 표를 본 윤이슬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무리 윤이슬이 무대 체질이라지만 공개 녹화에서 첫 번째로 연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스태프를 붙들고 말했다.

    “매니저도 같이 올라가도 되는 거죠?”

    “그럼요. 배우들 케어하셔야 하니까요. 대신 스타탄생은 배우가 두 명이니까 한번 이 대기실을 나가면 다시는 못 들어옵니다. 아셨죠?”

    “예. 알겠습니다.”

    스태프와의 대화를 들은 윤이슬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대표님. 나오지 마세요. 락이는 마지막이잖아요.”

    “누나.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린앤가? 나 혼자서도 잘해요.”

    “그래도 너 혼자 여기 있어야 하잖아.”

    “내가 무슨 혼자예요? 난 선호 형이랑 놀면 돼. 그렇죠. 선호 형?”

    이락이 묻자 그새 친해진 박선호가 이락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며 말했다.

    “뭘 놀아. 연기 연습이나 해.”

    “배우가 배우 얼굴을 치네. 형. 여기 카메라 설치되어 있어요. 이거 나가면 형 안티 생겨.”

    “웃기는 놈이네. 네 얼굴은 정수리에 박혔냐?”

    박선호와 티격태격하는 이락을 보며 윤이슬이 웃었다.

    녹화장에 온 후로는 긴장해서 내내 얼굴이 굳었는데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스태프가 대기실로 들어와 말했다.

    “1번 대기해 주세요.”

    * * *

    나는 윤이슬과 함께 무대로 향했다.

    공개홀 문이 열리자 그곳에 모인 백 명의 관객이 우리를 맞이했다.

    선별해서 모인 백 명의 관객들은 무대 위로 올라오는 윤이슬을 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스턴트맨 출신이라는 배우지?”

    “응. 5인까지 살아남았나 보네. 연기도 잘하나 보다.”

    “피지컬 쩐다. 키도 엄청 크고 팔 근육 좀 봐.”

    윤이슬이 무대에 오르기 전, 나는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이슬 씨. 대본 다 외웠죠?”

    “목숨 걸고 달달 외웠어요. 툭 치면 대사가 나올 거 같아요.”

    “김건명 배우나 윤희자 선생님이나 연기 습관이 있으신데요. 그게 뭔지 알아요?”

    “아뇨. 몰라요.”

    “애드립.”

    “애드립이요?”

    “두 분 모두 기존 대본을 그대로 하지 않고 약간씩은 비틀어서 하는 걸 좋아하세요. 그러니까 꼭 대본의 대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 그럼, 안 되는데요.”

    “아뇨. 이슬 씨는 실전에 강하니까 잘할 거예요.”

    나는 떨고 있는 윤이슬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5인에 오른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었죠? 저도 기뻐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즐기면서 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대선배님께 배우는 황금 같은 기회예요. 누구도 누리기 힘든 호사라고 생각해요.”

    내 조언을 곱씹던 윤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잘할 자신은 없어요. 하지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래요. 이제야 평소의 이슬 씨다운데요.”

    윤이슬은 내게 미소를 보이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MC 최혁이 윤이슬을 소개하고 이내 무대 뒤가 갈라지며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자그만 어깨를 가진 실루엣을 보며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하얗게 센 머리에 몸빼 바지를 입은 윤희자가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윤희자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나는 노인 분장을 하고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관객들도 윤희자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 윤희자 배우님 아우라가 장난 아니다.”

    “윤희자 앞에서 어떻게 연기하냐. 나는 못 하겠다.”

    윤이슬은 윤희자를 보자마자 ‘어머니’의 대본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어머니의 대사를 완벽하게 떠올린 윤이슬이 윤희자 앞으로 다가왔다.

    윤이슬이 대선배님께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윤희자는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연기를 시작했다.

    * * *

    이인극 어머니.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뺑소니 사고를 내고 감옥에 간 외아들을 기다리며 홀로 살고 있다.

    그런 어머니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뺑소니 사고에서 가족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은 사내다.

    피해자의 가족은 품에 식칼을 숨기고 노인의 집에 찾아왔다.

    그 이유는 하나. 오늘 출소하는 살인자를 그의 손으로 직접 죽이기 위해서다.

    치매에 걸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노인은 복수를 위해 찾아온 남자를 자기 아들이라 오해한다.

    노인은 굽은 손으로 힘겹게 음식을 만들어 그에게 대접하고 사내는 품 안에 식칼을 품은 채 진짜 상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네가 좋아하는 미역국이야. 어서 먹어.”

    사내는 의심을 피하고자 국을 한 모금 떴다가 기함한다.

    치매에 걸린 노인이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서 소금국이다.

    사내가 숟가락을 상에 내려놓자 노인이 묻는다.

    “어미가 상필이가 좋아하는 소고기를 못 넣었어. 미안해. 다음 주에 영세민 지원금이 나오니까 그때 소고기 넣어서 끓여 줄게.”

    노인은 완전히 굽은 손으로 사내의 손에 다시 숟가락을 쥐여 줬다.

    사내는 치매 노인에게서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오열한다.

    결국 복수를 포기한 사내가 치매 노인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밖으로 나오며 이인극이 끝난다.

    이 감동적인 이인극 미션의 부제는 ‘애드리브’다.

    윤희자와 김건명은 준비된 두 개의 대본을 중간에 바꿔 버린다.

    애드리브의 원래 뜻은 ‘하고 싶은 대로’라는 뜻의 라틴어 표현으로 즉흥 연기라고도 한다.

    노련하지 못한 신인 배우들의 상당수가 이인극 미션에서 무너지고 만다.

    사내로 분한 윤이슬에게 밥상을 내온 윤희자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다.

    “상필이니?”

    숟가락을 들던 윤이슬은 갑작스러운 윤희자의 대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다.

    하지만 무대 위에는 그녀와 윤희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윤이슬은 이게 대표님이 말했던 그건가? 싶었지만 윤희자의 애드리브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윤희자의 애드리브를 받아치지 못하고 대사가 완전히 꼬여 버린 윤이슬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윤이슬이 자신의 애드리브를 받지 못하자 윤희자는 태연하게 치매인 척 연기를 해서 다시 원래 극으로 돌아온다.

    윤이슬은 간신히 페이스를 회복했지만, 지금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인극이 끝나자 윤이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최혁의 멘트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윤이슬에게 다가가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괜찮아요. 잘했어요. 울지 마요.”

    “대표님. 죄송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윤이슬 씨 연기 정말 좋았습니다. 내가 다 봤잖아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대표님.”

    내가 윤이슬의 눈물을 닦아 주고 함께 내려가려는데 윤희자가 우리를 잡아 세웠다.

    “거기 매니저 양반.”

    “예. 윤 선생님.”

    “매니저 양반 말대로 이슬 양 잘했어.”

    윤희자는 훌쩍거리는 윤이슬의 어깨를 토닥여 줬다.

    “배우가 되면 이것보다 더한 일이 많아. 고작 이런 거로 울지 마.”

    “예. 선배님.”

    “이제 보니 이슬 양이 마음이 여리네. 매니저 양반이 잘 챙겨 주고. 뭐,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 같지만.”

    “명심하겠습니다. 윤 선생님.”

    나는 윤이슬을 데리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관객들은 극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쉬고 있는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이지?”

    “뭐야. 방송이라 좀 꾸며진 게 있나 했는데 실제는 더 멋있잖아.”

    “스타탄생 원세강. 원세강 대표래.”

    “윤이슬 배우는 좋겠다. 대표가 뭐 저렇게 친절해?”

    관객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 무대 위로 두 번째 배우가 올라왔다.

    숲 엔터의 하재윤은 김건명을 상대로 이방인을 연기했다.

    김건명 역시 중간에 대사를 비틀었고, 그의 애드리브에 놀란 하재윤은 그 이후 대사를 완전히 까먹은 건지 아무것도 못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빈 객석에 앉아서 하재윤과 김건명의 이인극을 보던 윤이슬도 놀라 말했다.

    “와. 저 애드립은 저라도 아무것도 못 했겠는데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이슬 씨는 정말 잘 대처한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저 이제 안 울어요. 운 표시 안 나죠?”

    “표 좀 나면 어때요?”

    “락이가 놀릴 거라고요. 그건 싫어요.”

    윤이슬이 안정을 되찾고 있는 동안 우리 옆에 패잔병이 쌓여만 갔다.

    박선호를 제외하면 윤희자와 김건명의 애드리브에 모두 무너져서 무대를 망치고 말았다.

    드디어 마지막 참가자인 이락이 무대에 올랐다.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낸 이락이 객석에 쪼르르 모여 있는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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