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80화 (81/261)
  • #80화. 기다렸던 첫 방송

    서이렌과 이자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자현은 놀라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서이렌은 침착하게 순식간에 끝난 문제의 장면을 찾아 재생했다.

    ‘스타메이커에서 피어나는 사랑? 우정?’이라는 유치한 자막과 함께 원세강이 떠나는 서유림을 포옹하는 장면이 다시 화면에 재생됐다.

    서이렌은 예고편 영상이 끝나자마자 영상을 내려 댓글을 확인했다.

    - 이게 바로 K 오디션이지. 예능, 개싸움, 사랑 다 들어 있다고. ㅋㅋ- 배우 오디션인데 매니저가 연애 관찰 카메라 찍고 있네.

    - 저 매니저가 내 최애인 듯.

    - NGB는 이렇게 예고 내보낼 거면 인간적으로 매니저도 투표하게 해야 한다.

    - 팩트: 저 사람 매니저 아님. 서이렌 소속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임. 재작년까지는 LOK에서 이자현 담당했고 이자현 톱스타로 키운 능력충이고 한국대 컴공과 출신의 엘리트임.

    - 대체 이 오디션은 뭐를 위한 거냐? 배우가 아니라 매니저가 돋보이는 이상한 배우 오디션 큭큭.

    - 매니저 그만두고 연예인 하려는 수작인가?

    - Who is he? Eng sub plz.

    댓글을 본 서이렌이 고개를 들어 보니 이자현은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표정이 괜찮아 보였다.

    “선배는 화 안 나요?”

    “대표님 이러는 거 한두 번 보나? 이제는 화내는 것도 지치네.”

    “대표님이 이러고 다녔다고요?”

    “본인은 모를걸?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한테 여지를 두는 행동을 하는지. 사람 마음 흔드는 행동은 서슴지 않고 하면서 눈치는 더럽게 없어요.”

    이자현은 그동안 맺힌 것이 많았는지 속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놨다.

    서이렌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원세강이 촬영장에 올 때마다 스태프들이 좋아했는데 특히 여자 스태프들이 좋아했던 거 같았다.

    “난 또 우리 대표님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잘생겨서 인줄 알았죠.”

    “잘생긴 남자가 일도 잘하고 나한테 매너 있게 구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암튼, 스타메이커인지 뭔지 거기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부터 기분이 쎄했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오디션 끝나도 우리 대표님은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일만 하실 분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현미는 서이렌과 이자현이 자연스럽게 만담을 나누는 걸 묘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진짜 소울메이트네.’

    * * *

    합숙소의 식당에 배우와 매니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스타탄생과 스타픽 그리고 LOK, 숲 엔터로 나뉘어 따로 앉아 식사했다.

    스타픽 윤호상 매니저와는 그동안 대화가 없어서 몰랐는데 알면 알수록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와 스타픽의 윤호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 가져올게요.”

    “대표님. 제가 할게요. 대표님은 앉아 계세요.”

    “배우님은 먼저 식사하세요. 나 윤 매니저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이락이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알았다고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물을 가지러 정수기로 걸어가며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LOK와 숲 엔터 소속의 배우와 매니저들을 확인했다.

    이렇게 내외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저들이 우리와 엮이려고 들지 않았다.

    스타픽의 윤호상이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역시 대형 기획사라 그런지 우리는 무시하나 봅니다.”

    윤호상은 일차 미션인 사인극에서 대형 기획사 매니저들에게 밀려 박선호를 단역을 시킨 것 때문인지 저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대형 기획사 매니저들은 이미 커넥션이 형성된 건지 자기들끼리 밀어주더라고요. 나같이 연줄 없는 매니저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박선호 씨가 잘해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우리 선호는 요즘 말로 자영업자예요.”

    “그게 뭔가요?”

    “회사가 못나서 배우가 멱살 잡고 끌어간다고요.”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나는 윤호상의 기가 죽은 거 같아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이 첫 방송이죠?”

    “그래요? 벌써 그렇게 됐나요? 여기 와서 핸드폰도 빼앗기고 당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방송이 어떻게 편집되어 나갈지 모르니까 윤 매니저님처럼 잊어버리고 있어도 될 거 같아요.”

    “배우들이야 오디션에 몰입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치는데 왜 우리까지 핸드폰을 뺏는 건지.”

    핸드폰 이야기가 나오니 나도 바깥의 상황이 궁금했다.

    그동안은 핸드폰이 없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는데 이번 주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두 여자가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와 윤호상은 물을 가지고 우리 자리로 돌아갔다.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LOK와 숲 엔터 소속의 매니저들이 우리를 보고 뒷담화를 하기 시작했다.

    숲 엔터의 박동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경진 매니저님은 원세강 대표에 대해 잘 아세요?”

    김경진은 돈가스를 입에 넣으며 답했다.

    “그럼요. 잘 알죠.”

    “원세강 대표는 대체 여기에 왜 나왔을까요? 이자현 톱스타로 띄우고 서이렌까지 발굴해 낸 사람이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예능까지 발을 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LOK 내에서도 착한 척은 다 하고 다니던 인물입니다. 이번 예능도 착하고 선한 척 자신을 포장하려고 나온 거겠죠.”

    “그래요?”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모르는 사람들만 원세강을 돌부처네 뭐니 떠드는데 저 사람이 저렇게 알랑방귀 뀌고 다니면서 알게 모르게 선의의 피해자가 많았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네요. 사실 숲 엔터에서도 요즘 원 대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대표님께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원 대표가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숲 엔터 윤동진 대표님이요?”

    “원세강 대표가 어떻게 우리 대표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대표님이 만날 때마다 원세강 대표 좀 배우라고 하십니다.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라니까요.”

    “힘드시겠네요. 윤 대표님이 원세강의 실체를 아셔야 할 텐데요.”

    김경진은 소속 배우들이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리를 떠난 것을 확인하고 박동현을 보며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말입니다. 박 매니저만 알고 계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김경진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원세강이 스타탄생 차린 일 말입니다. 그거 사실은 이자현한테 버림받고 어쩔 수 없이 LOK 나와서 회사 차린 겁니다.”

    “진짜요? 이자현한테 버림을 받아요? 왜요?”

    “왜긴요. 이자현도 원세강의 본 모습을 안 거겠죠. 자신을 스타로 키워 줬는데도 불구하고 더는 같이 못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참나.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를 일이네요.”

    김경진은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스타탄생 일행을 보며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온다고 했으니 원세강도 언제까지 승승장구할 수는 없겠죠.”

    * * *

    일찍 촬영을 끝낸 서이렌이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서이렌과 이자현이 합심하여 NG 없이 일사천리로 촬영을 일찍 마쳤다.

    샤워를 끝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는 서이렌이 광고를 확인하고 세이프를 외쳤다.

    맥주를 들고 나타난 빈선예가 그런 서이렌을 보며 웃었다.

    “두 여자 첫 방송 때는 하나도 안 떨더니 원 대표님이 텔레비전에 나온다니까 왜 그렇게 호들갑입니까?”

    “말도 마세요. 지금 제 심장이 터질 거 같아요.”

    서이렌은 자리에 앉은 빈선예의 손을 낚아채 그녀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어머. 뭐 하는 거예요?”

    빈선예는 서이렌의 떨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재빨리 손을 빼냈다.

    “놀랬잖아요.”

    “어때요? 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 느끼셨죠?”

    “내 심장이 터질 거 같네요. 이런 건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지 마요.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든다고요. 알겠죠?”

    “어. 이제 시작하네요.”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드디어 스타메이커의 첫 방송이 시작했다.

    스타메이커의 초반은 배우들에게 집중했다.

    스타메이커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스타메이커 관계자들과 미팅하는 모습이 마치 오디션의 한 장면처럼 흘러나왔다.

    다른 오디션 예능과 마찬가지로 사연이 있거나 이슈 몰이가 가능한 배우들의 인터뷰가 조금 더 길게 편집되어 나왔다.

    “어! 락이네요.”

    인터뷰하러 회의실에 쭈뼛거리며 들어온 이락을 보고 빈선예가 소리쳤다.

    “역시 화면빨 잘 받아.”

    빈선예는 인터뷰 당일에 이락을 위해 최대한 깔끔하고 귀엽게 스타일링 했는데 그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진짜 귀엽게 나오네요. 아이돌 같아요.”

    최욱환 PD가 이락의 프로필을 보며 물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네요.”

    “예.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장 땄고 지금은 방통대 다니고 있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른 이유가 있나요? 개인적인 사정이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락이 쑥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작년까지는 학교에 다닐 형편이 안됐어요. 그러다가 스타탄생에서 일하게 됐고 대표님이 지원해 주셔서 검정고시도 따고 방통대도 다니게 된 겁니다.”

    “방통대 공부가 생각보다 힘들다던데 일과 병행하기 어떤가요?”

    “할 만합니다. 컴퓨터과학과 다니고 있는데 제가 컴퓨터를 좋아하거든요.”

    최욱환은 이락의 프로필에 나온 가족관계를 보고 그가 부모님이 없는 고아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최욱환 PD는 구김살 없이 웃는 이락을 보며 왠지 모를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욱환이 느끼는 이 감정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빈 팀장님. 우리 락이 인터뷰 많이 나오는데요?”

    “그러게요. 조곤조곤 말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게 나오고. 이걸 대표님이 보셔야 하는데.”

    빈선예와 서이렌이 원세강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화면에 윤이슬이 나타났다.

    최욱환 PD는 윤이슬의 프로필을 보고 놀라워했다.

    “스턴트맨 출신이시네요. 어떻게 연기를 할 생각을 했나요?”

    윤이슬은 카리스마 있게 생긴 외모와 달리 단아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액션도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했습니다.”

    “프로필을 보니 유명 여배우들의 스턴트는 도맡아서 하셨네요.”

    “기회가 좋았습니다.”

    “이렇게 스턴트맨으로 잘나가는데 어떻게 배우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원래 배우가 꿈이었습니다. 스턴트를 할 때도 저 자신은 배우라고 생각했었지만 나를 드러내고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우리 회사 대표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대표님이 은인이시겠네요.”

    윤이슬은 강해 보이는 인상처럼 똑 부러지게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 중간중간 윤이슬이 최근에 한 스턴트라면서 영화 나비의 촬영 장면이 자료 화면으로 나갔다.

    고강도 액션 장면을 소화하는 윤이슬의 모습과 중간중간 깨알처럼 등장하는 서이렌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열광했다.

    빈선예는 자신의 자료 화면을 보고 놀라는 서이렌에게 말했다.

    “저 자료 화면 원세강 대표님이 미리 준비해 놓고 간 거 알아요?”

    “그래요? 몰랐어요.”

    “이슬 씨가 스턴트 하는 영상이 있으면 분명히 자료 화면으로 틀 거라고 엔진이랑 고르고 골라서 액션 뽕 차는 장면으로 편집한 거예요.”

    “그럼 이슬 씨뿐만 아니라 나비도 홍보하는 거네요.”

    “이렌 씨까지 홍보하는 꼴이니 일석삼조죠.”

    “역시 우리 대표님이시네요.”

    배우들의 인터뷰 장면이 끝나자 서이렌은 두 손을 모았다.

    이제 매니저들의 인터뷰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면이 전환되며 강원도 속초의 리조트 전경이 나타났다.

    “어라? 대표님은 인터뷰 안 하시나요?”

    “그러게요. 매니저들은 단독 인터뷰가 없나 봐요. 근데 지금 벌써 끝날 시간이에요.”

    “예? 벌써요?”

    “5분 정도밖에 안 남았어요.”

    “그럼, 오늘 대표님 안 나오는 건가요? 안 돼요. 나 대표님 부족 증상을 겪고 있다고요. 예고편 돌려 보는 것도 이제 지쳤어요.”

    그때 속초 리조트에 도착한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배우와 매니저들이 인산인해인 가운데 스타탄생 식구들도 보였다.

    “저기 대표님이에요.”

    “대표님 옆에는 락이랑 이슬 씨예요.”

    수십 명의 참가자들이 숙소 건물로 이동했다.

    숙소로 들어온 그들은 말도 없이 사라진 스태프들에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메라가 숙소를 쫙 훑었는데 객실의 상태도 제각각이었고, 공사 중이라서 심지어 방 하나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일부러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놓고 참가자들이 좋은 방을 얻기 위해 싸우라고 판을 깔아 놨다.

    “이거 시작부터 전쟁터를 만들어 놨네요. 어떻게 해도 욕을 먹을 거예요. 매니저들이 좋은 숙소 차지하려고 나서면 욕심부린다고 욕먹고 그렇지 않으면 일 못 한다고 욕먹을 것이고.”

    빈선예는 초반부터 어그로를 끈다며 PD 욕을 했다.

    그때 화면 가운데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가 뒤돌아서자 화면이 필터를 켠 듯이 환해졌다.

    참가자들 앞에 나선 원세강의 아래 자막이 떴다.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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