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78화 (79/261)
  • #78화. 캐스팅 미션

    캐스팅 미션의 오디션 순서가 결정됐다.

    이락과 윤이슬은 두 번째와 세 번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초반에 오디션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리는 무대 뒤 대기실로 가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첫 번째 순서는 스타픽의 박선호다.

    박선호는 섬마을 선생님이란 영화의 순진한 선생님인 고주현 역을 맡았다.

    섬마을 선생님은 위대한 배우 진설이 이십 대 초반에 찍은 영화로 섬마을 처녀와 그곳에 부임한 선생님 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영화 입장권 통합 전산망이 없던 시절이라 정확한 관객 수를 계산하기 어렵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천만 영화라 불릴 정도로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영화다.

    박선호는 순한 그의 인상만큼이나 순수한 고주현이라는 역을 훌륭하게 재현해 냈다.

    이락이 박선호의 연기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박선호 씨는 진짜 잘하네요.”

    “락아. 너 어쩌냐. 박선호 씨 다음이 너야.”

    “누나는 참. 누나 걱정이나 해요. 나 다음이 누나야.”

    이락과 윤이슬이 티격태격하는 가운데 드디어 박선호가 연기를 마쳤다.

    심사위원은 만장일치로 박선호의 연기를 극찬하며 그를 통과시켰다.

    시작부터 합격자가 나오자 대기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락 씨 준비해 주세요.”

    “예. 갑니다.”

    이락은 긴장도 하지 않는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요. 락 군.”

    나는 나가려는 이락에게 꽃 한 송이를 쥐여 줬다.

    “이게 뭡니까? 대표님?”

    “식당에서 가져온 겁니다.”

    “저도 알아요. 아까 같이 밥 먹었잖아요. 그런데 이걸 왜요?”

    “혹시나 필요할까 해서요.”

    * * *

    “아이돌 마스터? 이건 또 뭐죠?”

    윤희자는 처음 들어 보는 작품과 캐릭터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드라마예요.”

    “건명아. 나 이래 봬도 텔레비전 많이 봐. 시대에 안 뒤떨어지려고. 그런데 이런 드라마는 본 적이 없다고.”

    “선생님. 이거 웹드라마라고요. 텔레비전만 보지 마시고 인터넷도 좀 하세요.”

    “웹드라마? 그럼 유플릭스인가? 그런 거야?”

    “유플릭스는 아니고 미튜브입니다.”

    윤서혁이 윤희자를 위해 유플릭스와 미튜브 독점 드라마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아. 어렵네.”

    윤희자는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이어 무대에 올라온 이락에게 MC 최혁이 말했다.

    “참가자들이 이락 배우님께 아이돌 마스터의 다온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럼,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 화면을 함께 보실까요?”

    MC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아이돌 마스터에 나오는 가상의 꽃미남 그룹 드림월드의 노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화려한 무대 매너를 보여 주며 가요 프로그램을 마친 그들은 대기실로 돌아오자마자 돌변했다.

    “야! 너 2절 싸비에서 춤 틀렸어.”

    “방송에는 안 나갔어. 걱정하지 마.”

    “너 지금 장난하냐? 생방에는 안 나가도 나중에 직캠 뜨면 너 틀린 거 다 보인다고.”

    “누가 꼰대 아니랄까 봐. 작작 좀 해.”

    “누가 꼰대야? 나 너보다 겨우 두 살 많아.”

    “두 살이면 세대 차이가 얼마야?”

    “야. 너 미쳤냐? 넌 리더라는 사람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 리더 하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꽃미남 그룹이 가면을 벗고 그 나이대 친구들처럼 치고받고 싸우자 윤희자가 기함을 했다.

    “무슨 연기가 저래요?”

    “진짜 아이돌이 연기하는 거라서 선생님이 보시기엔 부족해 보일 겁니다. 그래도 처음인데 저 정도면 잘하는 거죠. 카메라 울렁증은 안 보이잖아요. 난 처음에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너무 떨려서 카메라를 못 쳐다봤다고요.”

    떠들썩한 VCR이 끝나자 MC 최혁이 말했다.

    “이락 배우님. 할 수 있겠어요?”

    “잠시만요.”

    이락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추리닝을 벗고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윤희자는 이락의 이름 옆에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놈’이라고 쓰고 이락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다 했습니다.”

    이락이 뒤돌아서자 MC 최혁이 놀라 외쳤다.

    “와우, 방금 무대에 올라왔던 이락 씨는 어디에 있나요?”

    편하게 머리를 뒤로 넘겼던 이락은 앞머리를 내리고 입고 있던 추리닝도 벗어 던졌다.

    “안녕하세요. 아이돌 마스터의 리더 다온입니다.”

    이락이 상큼하게 웃으며 심사위원들에게 윙크를 날렸다.

    대기실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내가 미쳐. 대표님. 락이 왜 저러는 거예요?”

    윤이슬은 기함하며 이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왜요. 귀엽잖아요. 진짜 아이돌 같은데요.”

    이락은 그 뒤로 무대 위를 날아다니며 아이돌 마스터에 나오는 무개념 아이돌 다온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락이 연기를 마칠 때쯤 윤희자는 이락의 이름 옆에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놈’이라고 쓴 걸 지우고 ‘당돌하게 연기하는 놈’이라고 적었다.

    그런데 연기를 끝낸 이락이 갑자기 심사위원석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MC 최혁이 외쳤다.

    “이락 배우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심사위원석에 도착한 이락은 허리춤에 꽂아 넣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윤희자에게 건넸다.

    “아이돌 마스터의 상큼 리더 다온을 기억해 주세요.”

    오글거리는 멘트를 친 이락이 손가락 하트를 날리며 장미꽃을 윤희자에게 건넸다.

    윤희자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그가 내민 꽃을 받고 미소를 지었다.

    대기실에 모인 참가자들은 이락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나도 놀랐다.

    이락이 아이돌 연기를 잘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뻔뻔하게 해낼 줄 몰랐다.

    심사위원석을 초토화하고 내려온 이락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리를 다시 뒤로 넘기고 추리닝 상의를 입은 채 얌전하게 심사를 기다렸다.

    윤희자는 얼떨결에 받은 장미꽃과 이락을 번갈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캐릭터에 빠르게 동화하는 거 같네요. 나쁘지 않았어요.”

    윤희자의 긍정적인 심사평을 시작으로 김건명과 윤서혁도 좋은 점수를 줬다.

    졸지에 이락까지 통과하자 대기실에 모인 참가자들의 얼굴이 굳었다.

    다섯 자리 중에 벌써 두 자리가 찼다.

    이제 남은 TO는 세 개뿐이다.

    모두 긴장하는 와중 다음 오디션 참가자인 윤이슬의 이름이 호명됐다.

    “대표님. 저는 뭐 주실 거 없어요?”

    나가려던 윤이슬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그런 윤이슬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슬 씨는 그런 거 없이도 잘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 주세요. 알죠? 이슬 씨 장점이 액션이라는 거.”

    * * *

    윤희자는 장미꽃을 한쪽 구석에 치우고 다음 참가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스턴트맨 출신인데 힘쓰는 캐릭터를 맡았네. 뭘 보여 주려나?”

    무대에 올라온 윤이슬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윤희자는 스턴트맨 출신인 윤이슬이 그녀의 장기인 액션 연기를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MC 양반. 궁금하니까 빨리 시작해 봐요.”

    “우리 윤 선생님께서 마음이 급하신가 봅니다. 그럼, 바로 VCR을 볼까요?”

    미녀의 조건 VCR을 틀자마자 최설아의 시원시원한 액션이 시작됐다.

    여주와 길을 가던 최설아는 길을 걷다가 술에 취한 취객들을 만난다.

    취객들은 그녀들이 밀치고 지나갔다며 시비를 걸었고 최설아가 여주를 지키기 위해 취객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장면이었다.

    VCR이 끝나자 사람들은 윤이슬이 어떤 연기를 할지 기대하기 시작했다.

    마침 취객 연기를 도와주기 위해 무대 위로 김건명이 올라왔다.

    “이건 내가 도와줄게요. 액션이니까 합을 맞춰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윤이슬은 자신을 도와주러 온 김건명을 위해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김건명의 진상 취객 연기가 시작됐다.

    충무로의 카리스마라고 불리는 그답게 취객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윤희자는 무대를 보며 생각했다.

    ‘윤이슬이 무대 체질에 상대방 연기에 따라 반응하는 타입인데. 김건명이 잘 올라갔네.’

    윤희자의 예상대로 윤이슬은 순식간에 최설아로 돌변해 김건명을 막아섰다.

    “술 취하셨으면 곱게 집에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충고질이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이게 진짜.”

    이때 최설아가 뒤돌려차기로 취객을 저 멀리 날려 버려야 하는 타이밍이다.

    김건명은 설마 연기인데 자신에게 발차기를 할까 싶었는데 갑자기 윤이슬이 뒤로 가더니 무대 아래 놓인 의자를 가져오는 게 아닌가?

    ‘뭐야? 의자로 때리려고?’

    김건명이 놀라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사실 아저씨 정도는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내가 몸이 흉기라서요.”

    김건명은 윤이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느끼고 입을 벌렸다.

    “허.”

    갑자기 공중에 붕 뜬 윤이슬이 잡고 있던 의자를 공중에 날렸다.

    김건명은 놀라 저 멀리 도망간 상황.

    윤이슬은 공중에 뜬 상태로 뒤돌려차기로 의자를 찼다.

    ‘팍!’

    윤이슬의 발차기를 맞은 의자가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져 내렸다.

    김건명은 떨어지는 의자 파편을 피해 도망치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

    바닥에 착지한 윤이슬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유지한 채 MC 최혁을 여주 삼아 대사를 쳤다.

    “집에 가자.”

    “아. 예.”

    MC 최혁은 윤이슬의 카리스마에 눌러 자신도 모르게 그러자고 했다.

    연기를 끝낸 윤이슬은 그녀의 본모습으로 돌아와 우렁차게 외쳤다.

    “김건명 선배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대 위에는 엉거주춤하게 선 김건명과 산산조각이 난 의자가 나뒹굴고 있었다.

    갑자기 윤희자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윤이슬 씨. 대단하네. 이렇게 멋있는 사람인 줄 몰랐어.”

    윤희자는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김건명도 윤이슬의 연기에 감탄했다.

    “아까 윤이슬 씨 눈빛 보고 무서워서 혼났어요. 잘하셨습니다.”

    윤이슬은 긴장하며 김건명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람들은 액션은 연기가 아니라며 깎아내리는데 모르는 소리지. 몸 연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윤희자와 김건명은 윤이슬의 연기를 칭찬했고 그녀를 다음 단계로 보냈다.

    윤이슬까지 통과하자 대기실에 남은 참가자들의 얼굴이 일시에 굳었다.

    “뭐야. 스타탄생은 또 둘 다 뽑히는 거야?”

    “이제 5인 중에 두 자리밖에 안 남았잖아.”

    매니저들이 나를 흘겨보며 질투와 원망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LOK의 김경진, TOP의 김철 매니저는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나를 째려봤다.

    “아이돌 연기나 액션 연기 모두 오디션에서 하면 망하는 연기라면서요?”

    “원래는 그게 맞는 건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떡합니까? 스타탄생은 이번에 떨구고 가야 한다고 점수 받기 어려운 연기로 몰아주자고 해서 간신히 만든 기회인데 다 망했어요.”

    “누가 이렇게 잘 해낼 줄 알았나?”

    “아오. 진짜 원세강 저 새끼. 웃는 얼굴 좀 그만 보고 싶은데.”

    드디어 대기실에 모인 열 명의 배우들이 연기를 모두 마쳤다.

    유스케이 윤세라 배우과 LOK의 전성호가 최종 다섯 명으로 뽑히고 드디어 캐스팅 미션이 끝나는가 싶었다.

    떨어진 배우와 매니저들은 이제 다 끝이라며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아직 안 끝났다.

    이제부터가 진짜 미션이다.

    MC 최혁이 무대 한가운데로 걸어오더니 일어서는 심사위원들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직 미션이 안 끝났습니다.”

    “응? 캐스팅 미션 끝난 거 아닌가요?”

    “우리 다섯 명 다 뽑았는데?”

    MC 최혁은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아직 안 끝났으니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대기실을 나가려던 배우와 매니저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오늘의 진짜 미션을 공개합니다.”

    화면 위에 다시 오늘의 미션 명이 떴다.

    [세 번째 미션: 캐스팅]

    아까와 변함없는 미션 명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캐스팅 앞에 다른 글자가 두 개가 추가되었다.

    [세 번째 미션: 미스 캐스팅]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도 미스 캐스팅이란 말에 당황해 MC 최혁을 바라봤다.

    “아까 인터뷰 방에서 참가자들에게 어울리는 배역과 함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역도 함께 투표해 주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몇몇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그런 것도 물어봤어?”

    “예. 안 어울리는 역을 뽑아 보라고 해서 했죠.”

    “헛. 그럼, 이게 진짜 미션이라고?”

    매니저들은 진짜 미션이라는 말에 기함했다.

    떨어져서 짐을 싸려던 배우와 매니저들은 기뻐했고 최종 5인에 들었던 배우와 매니저들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여러분들이 골라 주신 미스 캐스팅 역을 함께 보실까요?”

    화면에 참가자들이 뽑은 어울리지 않는 배역의 이름이 떴다.

    나는 재빨리 이락과 윤이슬을 확인했다.

    이락, 회색도시의 망치 역.

    윤이슬, 흥부네 딸들 홍소리 역.

    이락은 조직폭력배이자 인간쓰레기인 망치 역이고 윤이슬은 귀여운 막내딸 역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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