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76화 (77/261)
  • #76화. 스타 예감

    “원세강 대표님이 이걸 직접 각색했다고요?”

    윤서혁이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앉는 윤희자가 김건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원세강이 누구야?”

    “글쎄요. 매니저인가 본데요?”

    윤희자는 안경을 고쳐 쓰고 무대 아래서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매니저 하기엔 너무 잘생겼는데?”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게 어색했다.

    역시 이런 건 진석 형님이 하셔야 하는 건데.

    MC 최혁이 무대에 올라와 감탄사를 연발했다.

    “5조의 연기가 끝났습니다. 대단하네요. 고작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극으로 각색하셨네요. 정말 놀라운 무대였습니다.”

    5조 조원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심사위원들을 바라봤다.

    심사위원들은 상의를 마쳤고 제일 먼저 윤희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5조는 밸런스가 좋네요. 임태인 배우와 나세훈 배우가 중심을 딱 잡아 줬어요.”

    윤희자의 칭찬에 임태인과 나세훈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강철구, 김도관 매니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지.’라며 작게 속삭였다.

    “이락과 윤이슬 배우는 앞의 두 사람보다는 확실히 못 한 실력이에요. 하지만 극을 방해하진 않았어요.”

    심사평을 하던 윤희자가 이락과 윤이슬의 프로필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두 분 다 경력이 특이하네요.”

    나는 이락을 보고 앞으로 나서서 말하라고 눈짓을 했다.

    내 눈빛을 읽은 이락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더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저는 서이렌 배우님의 로드매니저였고, 여기 제 옆에 계신 윤이슬 배우님은 서이렌 배우님의 스턴트맨이셨습니다.”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락 배우가 다 말해 주셨네요.”

    MC 최혁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윤희자는 이락의 돌발행동에 미소 지으며 질문을 계속했다.

    “스턴트도 연기자니까 배우를 할 수도 있는데 이락 씨는 특이하네요. 원래 꿈이 연기자였나요?”

    “원래 꿈은 파일럿이었습니다.”

    “꿈이 바뀌었군요. 그럼, 지금은 왜 배우가 되고 싶은 거죠?”

    “서이렌 배우님 영화를 촬영하다가 현장에서 배우가 필요해서 즉석 캐스팅된 걸 계기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럼, 떨어져도 괜찮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죽을 각오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이락은 윤희자의 의미심장한 발언에도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반드시 유명한 배우가 될 겁니다. 저도 죽을 각오로 이 프로그램에 임할 겁니다.”

    “유명한 배우라……. 뭐, 알겠어요. 난 이제 다 물어봤는데 다른 사람들도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윤희자가 마이크를 내려놓자 김건명이 마이크를 들고 5조의 극에 대해 극찬을 했다.

    뒤이어 마이크를 잡은 윤서혁은 무대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세강 대표님. 이거 각색하셨다고 했는데. 노리고 각색하신 거죠?”

    나는 갑작스러운 윤서혁의 질문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무대 전광판에 놀란 토끼 눈을 한 내 얼굴이 크게 보이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윤서혁은 고개 숙인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질문을 이었다.

    “배우들을 모두 살리는 쪽으로 각색을 했던데. 의도한 거죠?”

    나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얼굴을 푹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배우분들 연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극 구성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명이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모두 극을 이끌어 가잖아요.”

    심사위원들의 극찬이 이어지자 주위에 있는 참가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통과한 조는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다 붙을 수 있지 않을까?

    윤희자 선생님을 제외하곤 연기도 극찬을 받았다.

    나는 긴장하며 마이크를 든 윤희자의 얼굴을 바라봤자.

    윤희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임태인, 나세훈 배우는 앞으로 나와 주세요.”

    임태인과 나세훈이 떨리는 얼굴로 무대 앞으로 나왔다.

    “두 분은 통과예요.”

    임태인과 나세훈은 통과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서로 기뻐하며 좋아했다.

    하지만 곧 뒤에 남은 이락과 윤이슬을 떠올리며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밤새 함께 연습하여 동료애가 쌓인 것이다.

    “윤이슬 배우는 초반에는 어색했는데 갈수록 좋아지더군요. 아마 실전 체질이라서 그럴 거예요. 통과니까 다음번에도 잘해 봐요. 여기까지는 심사위원 모두 만장일치였습니다.”

    윤이슬까지 통과하자 무대 아래 있는 참가자들의 얼굴을 굳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이락이 어찌 되는 건지 긴장하며 윤희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발, 첫 오디션은 다 통과하자.

    아무도 떨어지지 말자.

    나는 윤희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락 배우는 두 분은 좋다고 하시네요. 난 아닌 거 같지만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통과예요. 5조는 전원 통과입니다.”

    됐다. 전원 통과.

    나는 순간 긴장이 풀려서 의자에 축 늘어졌다.

    강철구와 김도관 매니저는 힘 빠진 나를 잡아끌며 기뻐했다.

    “원 대표님. 됐어요. 우리 다 통과했다고요.”

    “아. 진짜. 십년감수했네.”

    고개를 들어 보니 이락, 윤이슬, 임태인, 나세훈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 * *

    첫 번째 미션이 끝나고 대강당의 문이 열렸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참가자들이 반으로 갈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마흔 명의 배우 중, 총 스무 명이 살아남았다.

    천국에 속한 나는 5조의 배우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불합격된 사람들은 이제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그럴 수도 없다.

    개인 인터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스태프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배우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인터뷰 따야 합니다. 매니저분들은 저기 계신 저분들 따라가시면 되고요.”

    매니저들이 한데 어우러져 스태프를 따라 인터뷰를 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원 대표가 작정하고 나온 거였네. 대본 바꿔도 되는 건 또 언제 알았대?”

    “혹시 윤서혁 감독이 다 알려 준 거 아닌가요? 보니까 원세강이랑 친분 있어 보이던데?”

    첫 미션에서 떨어져서 짐을 싸야 하는 매니저들이 나를 보며 질투 섞인 원망을 늘어놨다.

    그들 중에도 대본을 바꿔도 된다는 글귀를 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배우가 주인공 역을 맡았기에 그걸 모른 척한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에 상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대응하지 않았다.

    그때 같은 5조였던 강철구와 김도관 매니저가 앞으로 나서더니 그들을 바라보며 한소리를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원 대표가 윤서혁 대표 보고 놀라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거 못 봤어요?”

    “용수철은 무슨. 놀란 척한 거지.”

    “각색하는 건 쉽게 되는 줄 아나 보네요. 밤새 대본 고치고 그거 연습하느라 진짜 한숨도 못 잤다고요. 모르면 좀 가만히 있어요.”

    한 덩치 하는 강철구와 김도관 매니저가 뭐라고 하니까 뒷담화를 하던 매니저들이 입을 싹 다물었다.

    어느새 우리는 인터뷰 방에 도착했고 내가 제일 처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욱환 PD님. 배우 쪽 인터뷰하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최욱환 PD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은 조연출이 가 있어요.”

    그가 내 눈을 뚫어지라 응시하자 어색했던 나는 시선을 돌려 인터뷰 대본을 확인했다.

    오늘 어땠냐는 감상과 어느 배우와 매니저가 눈에 띄었냐는 평범한 질문들 사이로 특이한 질문이 보였다.

    ‘오늘 떨어진 배우들에게 매니저로서 할 말이 있다면?’

    매니저들한테만 물어보는 질문이겠구나.

    나는 질문의 의미를 간파하고 머릿속에 오늘 탈락한 배우들을 떠올렸다.

    스무 명이나 돼서 생각할 게 많았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그 스무 명 중에 내년에 잘되는 배우들이 별로 없었다.

    몇몇은 스타메이커로 얻은 작은 관심으로 캐스팅된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는 마지막 질문을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늘 떨어진 배우들에게 매니저로서 한 말씀 해 주세요.”

    나는 내내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스무 명이나 돼서 할 말이 많은데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다른 분들 먼저 인터뷰하시면 어떨까요?”

    “그렇게 고심할 질문이 아닌 거 같은데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마지막이니까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털어서 조언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내가 직접 참가해 보니 알겠다.

    저들은 지금 실력이 모자랄 뿐이지 열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앞으로 단 일 년의 미래였지만,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요. 그럼, 이따가 인터뷰 끝나면 그때 부를게요. 두 시간쯤 걸릴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 * *

    편집실에 있는 최욱환 PD는 오늘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며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모니터에는 웃고 있는 원세강의 얼굴이 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을 위해 다시 부른 원세강은 세 장짜리 A4 용지를 들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오늘 탈락한 스무 명의 배우들에 대한 조언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마치 그들이 원세강과 함께 일한 매니저인 것처럼 상세하고 진심 어린 조언들로 가득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최욱환은 매니저 참견 시점이란 프로그램을 하며 만났던 강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 이사님. 저 최욱환입니다.”

    [어. 최 PD. 웬일이야? 이렇게 나한테 전화해도 돼? 지금 강원도에 있는 거 아니었어?]

    “첫 번째 예고편 편집할 겸 서울에 왔어요.”

    [그런 건 다른 사람 시킬 때도 됐잖아.]

    “아시잖아요. 첫 번째 예고편은 항상 제가 편집하는 거.”

    [그래. 잘 알지. 최 PD가 꼼꼼하잖아. 그런데 왜 전화한 거야? 설마 우리 스타탄생 배우들 다 떨어진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오디션 다 떨어져서 나한테 우리 배우들 데리고 가라고 전화한 거 아냐?]

    놀란 강진석의 말이 빨라졌다.

    “그런 거 아닙니다. 놀라시기는.”

    [그럼, 대체 뭐야? 뭔데 첫 방송 편집을 하다가 전화를 해?]

    “원세강 대표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세강이는 왜? 걔가 거기서 문제 일으켰어? 세강이가 그럴 캐릭터는 아닌데?]

    “왜 갑자기 강 이사님이 출연 포기하고 원 대표가 대신 나온 겁니까? 그게 궁금해서요.”

    [내가 말했잖아. 원 대표가 원했어. 자기가 대표고 두 배우 모두 자기가 이쪽 세계로 끌고 왔기 때문에 자신이 책임지는 게 맞다고 하더라고.]

    “그렇군요.”

    [무섭게 왜 그래? 나 모르는 큰일 있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아마 다음 주에 스타메이커 첫 번째 예고편 뜰 거예요.”

    [그래. 이런 부탁 한다고 해서 들어주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부탁할게. 우리 원 대표랑 스타탄생 배우들 잘 부탁할게. 물가에 내놓은 자식들처럼 걱정이 앞선다. 그럼, 고생하고 끊는다.]

    강진석이 전화를 끊자 최욱환이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서 혼잣말했다.

    “스타탄생이나 원세강 대표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겠는데요. 스타메이커가 배출하는 최고 스타는 배우가 아니라 원세강 대표일 거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 *

    두 여자의 촬영이 한창인 MBS 녹화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고편 떴다면서요?”

    스태프뿐만 아니라 배우들도 감독의 앞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강진석 이사는 서이렌에게 다가가 MBS로부터 입수한 두 여자 메인 예고편을 재생했다.

    격동의 시대인 칠십 년대.

    이란성 쌍둥이로 보육원에서 키워진 두 여자가 한날한시에 입양된다.

    언니는 동생을 부잣집에 보내기 위해 차를 바꿔 타지만 동생이 간 부잣집은 망하고 자신이 대신 입양 간 집은 가지고 있는 땅이 재개발지역에 포함이 되어 부자가 된다.

    시작부터 틀어지는 두 여자의 인생이 짧은 예고편에 모두 녹아 있었다.

    배우들을 아름답게 찍어 주기로 유명한 강진완 감독의 미장센이 돋보였다.

    “와우. 괜찮은데? 영화 같아.”

    강진석은 잘빠진 예고편을 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빈선예도 예고편을 보며 좋아했다.

    “감독님이 시청자들이 보고 싶게 예고편을 만드셨네요.”

    서이렌은 예고편이 잘 뽑혀서 기분이 좋았지만,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원세강이 없어서 쓸쓸했다.

    “강 이사님. 스타메이커는 왜 소식이 없어요? 그건 예고편 같은 거 없어요?”

    “그것도 오늘 예고편 뜰 거야.”

    “오늘이요?”

    “잠깐만 떴는지 확인해 볼게.”

    강진석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검색했다.

    미튜브 영상 사이로 스타메이커 예고편이 보였다.

    “예고편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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