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사인극
임태인이 놀라 외쳤다.
“대본을 고쳐도 된다고?”
강철구 매니저는 그제야 대본의 뒷장에 나온 글귀를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나세훈과 김도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이게 바로 미션의 숨겨진 비밀 아닐까요?”
강철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무슨 비밀을 말하는 겁니까? 그냥 입에 맞게 대사를 수정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속자는 주연이 확실한 대본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단역 수준의 분량이고요. 스타메이커에서 이렇게 분량이 차이가 나는 대본을 준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고 봅니다.”
강철구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대본을 갈아엎기라도 할겁니까?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떻게 생각해요? 김도관 매니저. 이대로 진행하는 게 맞아 보이지 않아요?”
김도관은 주역을 맡은 나세훈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이대로 버티면 나세훈이 주인공인데 굳이 모험을 감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때 임태인의 입이 열렸다.
“생각났어요.”
“뭘 말이야?”
“위대한 유산. 그 연극이 기억이 났단 말입니다.”
임태인은 대본을 펼치더니 다시 한번 말했다.
“맞아요. 위대한 유산에서 에피소드 한 꼭지를 따서 만든 대본입니다.”
나는 임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태인 배우님은 연극 무대에 많이 서 보셨죠. 이거 각색을 조금 하고 무대에 올리는 데 하루면 너무 짧은 시간일까요?”
임태인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가능합니다. 대신 대본을 고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그 하루를 잠도 못 자고 내내 대본에 매달려야 할걸요. 시간 내에 대본이 준비되지 않으면 더 큰 일이고요.”
임태인의 말에 강철구는 ‘그러면 그렇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임태인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극단 마루를 운영하시는 김영원 님이 대학교 선배님이십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가 연극을 좀 많이 보러 다녀서 어떻게 각색하면 좋을지 안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실래요?”
나는 다른 배우들과 눈을 마주쳤다.
나세훈과 김도관도 꺼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강철구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오케이 하려는 임태인을 가로막았다.
“그냥 원안대로 합시다. 시간이 이렇게 없는데 무슨 각색입니까?”
“강 매니저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임 배우. 잘 생각해 봐. 시간이 없다고.”
“대본에 이렇게 적어 놓은 걸 보면 원 대표님 말씀대로 제작진의 노림수 같습니다. 방송국에서 원하는 그림이 있는 거 같은데 원 대표님 말씀을 들어나 보죠.”
임태인이 내 편에 서자 나세훈과 김도관도 그러자고 의견을 보탰다.
졸지에 강철구만 빼고 5조의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돼 버렸다.
강철구는 하는 수 없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빨리 말해 봐요. 어설프거나 별로면 원안대로 가는 겁니다.”
어설플 리가 있겠습니까?
극단 마루의 김영원 단장한테 묻고 또 물어서 만든 이야기인데요.
* * *
다음 날 저녁, 대강당에 참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늦게까지 연습을 했는지 참가자 모두가 피곤해 보였다.
스태프들은 참가자들이 모두 도착했는지 확인했다.
“다 왔어?”
“아뇨. 5조는 아직입니다.”
“5조 찍는 VJ한테 연락해 봤어? 늦으면 안 돼.”
“지금 오고 있답니다. 어젯밤에 밤을 새웠나 봐요.”
“다들 그렇겠지. 운명이 달린 첫 번째 미션인데 다들 이 악물고 했을 거야.”
“아뇨. 다른 조는 그래도 쉬면서 연습하고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붙였는데 5조는 정말 한숨도 안 잤나 봐요. 5조 딸려 보낸 동규한테 밤에 살려 달라고 문자도 왔습니다.”
“그 정도라고?”
그때 대강당의 문이 열리고 5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좀비 같은 모습으로 강당에 들어선 5조를 보고 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임태인이 나세훈과 이락, 윤이슬을 바라보며 한소리를 했다.
“와. 젊은 놈들이랑 같이 못 해 먹겠다. 너넨 왜 그렇게 멀쩡하냐?”
“멀쩡하긴요. 저희도 피곤합니다.”
“웃지 마. 이 어르신은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이다.”
강철구와 김도관 매니저는 멀쩡해 보이는 나를 보며 눈을 흘겼다.
“배우들은 바뀐 대본 외우느라 뼈 빠지게 연습하는데 원 대표는 잠이 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잠을 충분히 자야 하거든요.”
사람 좋아 보이는 김도관도 잠을 못 자서 피곤한지 내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
“참나. 원 대표님 어젯밤에 대본 막 바꿀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혼자만 침실로 들어가서 주무시고 오고. 너무 하셨습니다.”
“그러게 좀 주무시죠. 우리야 배우도 아니고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게 훨씬 도움이 되죠.”
“아이고. 말이야 못하면.”
“됐습니다. 아침 점심 식사랑 간식이랑 커피 모두 원 대표가 다 챙겼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예. 제가 잘못했으니 그만하고 들어가세요.”
나는 입이 댓 발은 나온 매니저들을 데리고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 * *
회장 안에 MC 최혁이 등장했다.
“오늘 미션은 사인극입니다.”
최혁의 말과 함께 무대 뒤 화면에 ‘첫 번째 미션: 사인극’이라는 문구가 떴다.
참가자들은 그제야 실감이 나는지 멍한 눈을 번쩍 떴다.
“대본은 하루 전에 나눠 드렸고 모든 참가자가 잠도 포기한 채 밤새 연습에 매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지체하지 않고 심사위원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심사위원인 윤희자, 김건명, 윤서혁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대가 있는 반대편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참가자들을 내려봤다.
“오늘의 첫 번째 조부터 먼저 만나 보시죠. 1조는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십시오.”
1조가 무대 위에 오르자 무대 위로 조명이 쏟아졌다.
나는 5조와 함께 1조의 사인극을 관람했다.
1조는 받은 대본 그대로 무대를 꾸몄다.
신기하네. 저 친구가 연기를 제일 잘하는데 왜 주인공을 맡지 못한 거지?
오히려 연기가 가장 떨어지는 배우가 분량이 제일 많은데?
나는 1조의 배우와 소속 회사 매니저들을 확인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저렇게 배역이 정해진 거구나.
1조는 대형 기획사 소속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고 중소 기획사의 배우들이 분량이 없는 단역을 맡았다.
매니저들이 힘을 쓴 건가?
지금은 주연을 따낸 매니저들이 잘한 것 같겠지만, 아니다.
막상 스타메이커가 방송되면 연기와 상관없이 회사발, 인맥발로 주연을 따낸 것처럼 보여서 되레 독으로 돌아올 거다.
지금 결과물을 봐라.
분량은 많은데 연기력이 뒷받침이 안 되니 극 자체가 보기 싫어진다.
어설픈 1조의 무대가 끝나고 대강당에 불이 켜졌다.
참가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강당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심사위원인 윤희자가 입을 열었다.
“심사할 연기가 안 보이네요. 뭐가 있어야 심사를 하죠.”
처음부터 강도 높은 독설에 무대 위의 1조는 얼어붙었다.
“거기 변호사역 한 배우 나와 봐요.”
윤희자가 손짓하자 변호사 역의 박선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앞으로 나왔다.
“아까 마지막에 한 대사 연기와 함께 다시 보여 줄 수 있나요?”
“예? 여기서요?”
“아직 무대 위잖아요. 해 봐요.”
박선호의 입에서 마지막 대사가 울려 퍼졌다.
“안타깝게도 이번 상속은 없던 일이 됐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시죠.”
조금 전까지 윤희자의 카리스마에 눌려 고개를 숙였던 박선호는 순식간에 냉정하고 피도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작품 속의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대사를 마친 박선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호랑이 앞의 토끼가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좋아요. 나는 1조에서는 이 연기 하나만 건진 거 같네요. 박선호 씨만 통과예요.”
윤희자의 말에 김건명도 동의했다.
“눈빛이 좋더군요. 분량도 거의 없는데 마지막에 오만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다한 것 같습니다. 저도 박선호 씨를 뽑겠습니다.”
무대 위의 박선호는 자신이 통과했다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반대편에 서 있는 박선호의 매니저인 윤호상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스타픽 박선호.
나는 알고 있다.
스타메이커의 우승자는 박선호다.
나도 박선호의 통과를 축하하며 박수를 보냈다.
1조에서는 오로지 한 명의 합격자만이 나오자 참가자들이 긴장했다.
한 조에서 두 명은 반드시 합격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떨어질지 예상할 수 없다.
어느덧 4조까지 쉴 틈 없이 무대에 올랐다.
대본을 바꾼 조는 아무도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계속되는 똑같은 연기에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말이 많은 윤서혁도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MC 최혁이 5조를 호명했고 이락과 윤이슬이 나를 바라봤다.
“대표님. 꼭 통과해서 돌아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연습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잘하고 와요.”
이락과 윤이슬은 당당하게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 * *
[5조]
친구1: 임태인
친구2: 나세훈
동생: 윤이슬
변호사: 이락
윤서혁은 이락이 변호사 역인 것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점수를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분량이 많은 역을 하길 내심 바랐다.
“자, 그럼 5조의 연기를 감상하시겠습니다.”
드디어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떨어졌다.
시작은 다른 조와 똑같았다.
두 명의 남자가 유산을 상속받는다는 말에 친구가 요양하던 시골 별장으로 내려온다.
졸지에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게 된 친구들은 기뻐하지만 서로의 속내를 숨긴다.
초반 분량이 지나고 드디어 각색한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변호사 이락이 친구2인 나세훈을 별장의 후미진 곳에서 따로 만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 혼자만 받는 거라면서요?”
“사망하기 전날 유언장이 수정됐어.”
“그럼, 내가 받을 유산이 반으로 줄어드는 거잖습니까?”
“지금 화나는 게 당신뿐인 줄 알아? 내 몫도 줄어드는 거라고.”
변호사와 친구2는 전부터 알던 사이인지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지루해하던 심사위원들은 바뀐 극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드디어 나왔네요. 대본을 바꾼 조가.”
“흥미진진하네요. 변호사와 친구2가 한편이라.”
5조의 연극을 지켜보던 참가자들은 놀라서 수군거렸다.
“뭡니까? 5조는 왜 대본이 다르죠?”
“이거 차별 아닌가요? 다 같은 대본으로 연기를 해야죠.”
매니저들이 불만을 터트리자 누군가 대본 마지막 장에 쓰여 있는 글을 발견하고 외쳤다.
“이거 대본을 수정해도 되는 거 같은데요?”
“아니 그걸 그렇게 작게 쓰면 대체 누가 알고 대본을 바꾼다는 겁니까?”
“5조가 알고 바꿨네요.”
“이거 모 아니면 도네요. 잘못하면 극만 우스워지는 거죠. 고작 하루 줬는데 각색해 봤자 얼마나 대단한 게 나왔을까요?”
매니저들은 이게 잘될 리가 없다며 긴장한 채 5조의 극을 노려봤다.
변호사와 친구2는 유산을 얻기 위해 함께 뭉친 악당이었다.
그때 사망자의 여동생이 친구1과 2의 악행을 밝힌다.
친구1과 2는 사망자의 절친이 아니라 사망자를 따돌리고 괴롭혔던 일진이었다.
친구1은 변호사와 친구2가 한편임을 알게 되고 극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제가 잔 동안 연습을 정말 많이 했나 보네요. 다들 연기가 대단한데요.”
강철구와 김도관 매니저가 나를 째려봤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5조가 준비한 두 번째 반전이 터졌다.
원래 대본과 달리 친구들은 싸우다 둘 다 떨어져 사망하고 만다.
그들의 시체 앞에 변호사와 여동생이 나타난다.
“이제 아가씨 뜻대로 된 건가요?”
“아뇨. 이걸로는 오빠의 원한이 풀리지 않아요.”
내내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윤이슬의 얼굴이 분노와 절망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윤이슬이 아니었다.
몰입감이 뛰어난 배우였구나.
실전에서 강한.
지켜보는 심사위원들과 참가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십 분짜리 연극이 이십 분으로 늘었고 그 안에 반전을 두 개나 심어 놨다.
대본의 내용은 네 명의 배우에게 모두 스포트라이트가 가도록 영리하게 각색됐다.
5조의 극의 끝나고 강당에 불이 켜졌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고요한 강당 안에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윤서혁이 벌떡 일어나서 홀로 열렬하게 박수를 보냈다.
“대박이네요. 연기도 좋고 내용도 훌륭합니다. 대체 누가 각색한 겁니까?”
배우들은 윤서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무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갑자기 배우들의 시선을 받은 나는 뻘쭘하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