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74화 (75/261)
  • #74화. 미션의 숨겨진 비밀

    “윤서혁 감독님?”

    이락이 놀란 표정으로 윤서혁을 보며 외쳤다.

    윤서혁은 단상 아래 모여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내가 본 미래와 달라졌다.

    그때는 윤서혁이 아니라 김기하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고명수 감독이었다.

    나는 윤서혁과 눈인사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서유림 매니저가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원 대표님은 윤서혁 감독과 친하시겠네요. 서이렌이 출연한 287일 감독이 윤서혁이죠?”

    “예. 맞습니다.”

    “참나. 이렇게 인맥을 심사위원으로 앉히면 어떡하자는 건지. 형평성이 없잖아.”

    뉴스타의 강철구 매니저가 내 뒤에서 불만을 드러냈다.

    이건 나 들으라는 건가?

    나는 의도가 다분한 강철구의 말을 듣고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때 스타메이커의 MC 최혁이 단상으로 올라와 심사위원단을 소개했다.

    “다들 놀라셨죠? 생방송 심사를 맡아 주실 심사위원단이 여러분들을 보기 위해 방문해 주셨습니다.”

    최혁은 능수능란한 진행 솜씨로 심사위원 세 명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누가 봐도 심사위원의 수장은 원로 배우 윤희자였다.

    윤희자가 제일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젊고 패기가 넘치는 신인 배우들을 보니까 기분이 좋네요. 내가 원래 예능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인 배우를 뽑는다니 관심이 가지 않겠어요?”

    윤희자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시원시원한 화법을 구사했다.

    배우들은 선배님의 말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명품 조연으로 이름난 김건명도 유머러스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드디어 윤서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윤서혁이 얼마나 말이 많은 남자인지 아는 나는 기대하며 윤서혁을 바라봤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간단히 마이크 테스트를 끝낸 윤서혁이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십 년 전쯤에 타 방송국에서 스탠바이라는 신인 배우 오디션을 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나를 포함한 몇몇 참가자들이 손을 들었다.

    “역시 본 사람이 많지 않네요. 그럴 겁니다. 그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별로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프로그램의 애청자였습니다. 배우들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진심으로 연기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여러분 중에 스탠바이를 본 사람이 많지 않지만, 이분들은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윤서혁의 입에서 스탠바이에 나왔던 배우들의 이름이 불렸다.

    참가자들은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선배들을 떠올리며 눈이 커졌다.

    “다들 대단한 분들이죠? 이분들이 그때 당시 스탠바이에 나왔던 분들입니다.”

    윤서혁의 말에 놀란 참가자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우연한 기회에 스탠바이에 출연했던 모 배우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스탠바이에 출연한 게 처음에는 흑역사같이 느껴졌다. 배우가 뜨기 위해 인기도 없는 예능에 출연해서 연기하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때 다른 배우들과 부딪히며 치열하게 연기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입니다. 그 배우님의 말씀을 듣고 스타메이커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참가자들은 윤서혁의 말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윤서혁 감독. 말이 늘었네.

    내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윤서혁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여러분들이 만들어 낼 흑역사. 제가 지켜봐 드리겠습니다. 잘해 봅시다.”

    “어휴. 윤 감독 말이 너무 많아.”

    윤희자 배우가 한소리를 하자 윤서혁이 웃으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귀가 좀 따가우실 수도 있어요. 제가 원래 말이 좀 많거든요.”

    “MC 양반. 나 시끄러운 거 딱 질색이니까 윤 감독은 멀리 떨어뜨려 줘요.”

    “윤희자 배우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 드려야죠. 하하하.”

    화기애애한 첫 인사가 끝나자 참가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스타메이커라는 예능에 참가하며 고민이 많았는데 방금 윤서혁의 말에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분위기 좋게 첫 만남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무대 위로 스태프들이 의자와 대본 더미를 옮기기 시작했다.

    심사위원 세 명은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아 참가자들을 바라봤다.

    갑자기 심사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되자 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마 첫날부터 미션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됐는데 무슨 미션입니까?”

    아니다. 미션이 맞다.

    스타메이커는 촬영 첫날 바로 미션을 수행하고 미션이 끝나면 마흔 명의 배우 중에 절반인 스무 명만 남게 된다.

    그때 MC 최혁이 외침이 들렸다.

    “자, 그럼 첫 번째 미션을 발표합니다.”

    최혁이 손을 들자 무대 위의 전광판에 커다란 글자가 떴다.

    [사인극 미션]

    * * *

    참가자들은 긴장한 얼굴로 랜덤하게 뽑은 공을 손에 들고 무대를 바라봤다.

    네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

    이제부터 사인극을 연기할 조가 결정된다.

    매니저들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의 배우들이 어떤 조가 될지 지켜보고 있다.

    서유림 매니저가 내 옆에서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하고 있었다.

    “서 매니저님. 이윤석은 어쩌고 매니저님이 스탠바이에 나온 겁니까?”

    내 질문에 서유림이 웃으며 답했다.

    “대표님이 부탁하셔서요. 우리 윤세라 배우님이 낯도 많이 가리고 좀처럼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거든요.”

    나는 어젯밤, 서유림과 방을 쓰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던 윤세라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 매니저님이 차출되신 거군요.”

    “그런데 대표님은 왜 여기에 나오신 거예요? 여기에 실장이나 이사급은 있어도 대표는 원 대표님밖에 없어요. 다들 그걸 고깝게 여기고 있을걸요.”

    서유림이 말을 마치며 뒤를 슬쩍 돌아봤다.

    뉴스타의 강철구 매니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나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염치없는 짓인 거 알지만 제가 지금 남의 눈치를 보고 그럴 때가 아니거든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MC 최혁이 1조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이락과 나라는 변수가 생겼다.

    멤버가 달라졌으니 조원도 내가 본 것과 다르겠지.

    나는 긴장하며 이락과 윤이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5조의 조원이 불렸다.

    “뉴스타의 임태인 배우님.

    네온의 나세훈 배우님.

    스타탄생의 이락, 윤이슬 배우님.”

    이락과 윤이슬의 이름이 동시에 불리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소속사 배우가 한 조가 됐네요. 이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후자겠지.

    사인극 미션으로 두 명이 떨어진다.

    이락과 윤이슬이 같은 조가 됐으니 둘 중 하나는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나는 재빨리 같은 조가 된 사람들을 훑었다.

    뉴스타의 임태인.

    대기업 부장 출신의 잘나가는 샐러리맨이지만 어릴 때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휴직하고 연기에 도전한 사람이다.

    대학 생활 내내 연극을 해서 기본기는 확실한 배우로 조만간 영화판에서 조연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릴 거다.

    네온의 나세훈.

    네온은 숲 엔터 출신의 매니저가 나와서 차린 회사다.

    어찌 보면 이번 참가자 중에 제일 소속사가 부실한 배우다.

    연기도 아직은 부족하다.

    이락과 동갑인 나세훈은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서 매니저님도 건투를 빕니다.”

    “원 대표님도요. 화이팅입니다.”

    * * *

    대강당의 한쪽 구석에 5조가 모여 있다.

    임태인은 강철구 매니저 옆에 서 있고, 나세훈은 김도관 매니저 옆에 서 있고 이락과 윤이슬은 내 옆에 딱 붙어 서 있다.

    정확하게 세 개의 진이 구성된 모습을 보며 나는 우선 친해져야겠다고 느꼈다.

    “다들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자리에 앉으시죠. 우리 이렇게 빙 둘러앉읍시다.”

    내가 앉자 눈치 빠른 이락이 옆에 있는 나세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앉아서 얘기해요.”

    여전히 같은 소속사끼리 앉았지만, 나란히 빙 둘러앉으니 아까보다는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때 연극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임태인이 입을 열었다.

    “대본을 먼저 보고 이야기합시다.”

    임태인은 스태프가 나눠 준 대본을 우리에게 돌렸다.

    매니저들 대본은 없어서 배우와 함께 대본을 봐야 했다.

    이락은 내가 보기 편하게 대본을 내 쪽으로 돌렸지만 내가 사양했다.

    나는 이미 대본의 내용을 다 알고 있다.

    사인극의 제목은 ‘상속자’다.

    어린 나이에 병이 들어 죽은 한 남자가 친구 두 명에게 유산을 상속한다.

    친구가 요양하던 시골 마을의 별장으로 떠난 두 명의 상속자.

    그들은 그곳에서 죽은 친구의 동생과 유산 상속을 처리해 줄 변호사를 만난다.

    두 명의 친구는 사실 죽은 이와 절친이 아니다.

    그들은 사망한 친구가 왜 그들에게 유산을 상속한 건지 이유는 모르지만, 각자의 사정 때문에 돈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두 친구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서로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한 친구가 절벽에서 떨어져 실족사한다.

    남은 친구는 이 사고로 자신이 받을 상속분이 늘어날 것이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유언장을 까 보니 반드시 두 명의 친구에게 동시에 유산을 상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산을 못 받게 된 남은 친구가 오열하며 극이 끝난다.

    십 분 정도의 짧은 극이었으나 누가 봐도 상속자인 두 친구가 주연이고, 죽은 친구의 동생과 유산 상속을 진행할 변호사는 들러리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대본을 다 읽은 배우들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주인공이 정해져 있음을 알고 당황한 눈치였다.

    그때 임태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습할 시간이 스물네 시간밖에 없어요. 당장 배역을 나누고 연습에 들어갑시다.”

    대기업 과장인 그는 자연스럽게 5조를 이끌기 시작했다.

    임태인의 매니저인 강철구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우리 임 배우가 오랫동안 연극을 해 온 경험이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을 잘 이끌어야겠어.”

    졸지에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들이 된 배우들이 임태인과 강철구를 바라봤다.

    네온의 김도관 매니저는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임태인과 강철구에게 물었다.

    “배역은 어떻게 정할 건가요?”

    임태인이 네 명을 천천히 돌아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상속인 동생 역은 윤이슬 씨가 해 줘야겠어. 대본에는 여자라고 나와 있지 않지만, 말투나 그런 걸 보면 천상 여자잖아?”

    윤이슬은 분량이 없는 역할을 맡으라는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변호사 역은 이락 자네가 해야 할 거 같아.”

    “제가요?”

    “연기 공부를 제대로 시작한 게 얼마 안 됐다며? 그럼, 큰 역을 맡기기엔 좀 힘들 거 같아.”

    나세훈은 자동으로 주인공을 하게 됐으나 기쁜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했다.

    “역시 임 배우가 경험이 많으니까 역도 잘 나눠 줬네. 다들 괜찮지?”

    나는 독불장군처럼 구는 임태인과 강철구를 보며 헛웃음이 났다.

    다른 조도 같은 대본을 받은 건지 모두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누가 주연을 맡을지 신경전을 벌이며 고성이 오가는 조도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결정하고 연습합시다.”

    임태인이 그의 손목에 찬 시계를 두드렸다.

    짧은 대본이었으나 하루 만에 완벽하게 연습하려면 만만치 않을 거다.

    그때 내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순식간에 5조의 모든 사람이 나를 바라봤다.

    “저는 이 미션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밀? 연극 미션이 그냥 연극 미션이지. 비밀은 무슨 비밀.”

    강철구는 내가 시답지 않은 말을 한다며 무시했다.

    나는 대본의 뒷장을 덮으며 말했다.

    “여기 대본의 뒷장에 쓰여 있는 게 이번 미션의 비밀이라고 보는데요.”

    내가 대본의 뒷장을 가리키자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의 손에 든 대본을 뒤집었다.

    [본 작품은 21회 연극제 수상작인 위대한 유산을 각색한 것입니다. 대본의 대사는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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