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71화 (72/261)

#71화. 수상한 라이벌

호텔의 VIP룸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강진석은 기다리고 있는 이자현을 반갑게 불렀다.

“이자현 배우님.”

강진석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그녀를 만나러 왔다.

“스타탄생으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이자현 배우님이랑은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같이 일을 못 해 보고 퇴사했네요.”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강진석이 이자현의 눈치를 살폈다.

이자현은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킨 후,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원세강 대표님은 잘 지내세요?”

“무슨 뜻으로 물어보시는 거죠?”

“그냥 질문 그대로요. 지난번에 보니까 살이 좀 빠지신 거 같던데.”

“하. 스타탄생 직원들도 그렇고 다들 우리 원 대표를 애지중지하네요.”

“그런가요?”

“나도 스타탄생에 다닌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말도 마요. 대표가 직원들이랑 배우들을 챙겨야지. 스타탄생은 반대로 가고 있어요.”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말한 그대로예요. 직원들이나 배우들이나 원 대표 힘들까 봐 배려해 주고, 심지어 혼자 산다고 먹을 것도 챙겨 주더라고요.”

이자현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그랬군요.”

“세강이한테 미안한 감정은 그만 털어 버려요. 원 대표를 그렇게 내친 게 미안해서 찾아온 거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데요?”

“그럼, 아닌가요?”

강진석의 물음에 이자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세강이 얼마나 아픈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강진석이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 배우가 그렇게 원 대표를 내쳤는데도 원 대표는 원망조차 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보세요. 이번에도 표절작 못 하게 막아 준 거.”

“알아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강진석은 울 것 같은 이자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이것 때문에 천하의 이자현이 눈물을 흘린다고?’

강진석은 순간 뭔가 떠올라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유를 묻기로 했다.

“혹시, 사막 때 이야기라도 들은 겁니까? 맞죠? 그것 때문이죠?”

“사막이요?”

“세강이가 그때 이자현 배우가 사막을 못 찍게 한 건 잘한 일이었습니다.”

“알아요. 사막을 안 찍고 찍은 영화가 천만 관객이 들었고, 그걸로 제 배우 인생의 길이 열렸으니까요.”

“그것뿐일까요? 김이솔이 왜 지금 영국에 가 있는데요.”

“김이솔이라고요?”

“이미 다 알고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이자현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강진석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정말 모르는 겁니까? 김이솔이 사막의 김기하 감독한테 괴롭힘당해서 정신과 치료받은 거?”

이자현은 지금 강진석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김이솔 배우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니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왔나 보네요.”

“전혀요.”

강진석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 내가 잘못 말을 꺼냈네요.”

“숨기지 말고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강진석은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사막의 김기하 감독이 말이 많았습니다.”

“김 감독님이 완벽주의자에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뭐든 다하는 스타일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히스테릭한 감독들은 많죠. 하지만 김기하는 달라요. 배우를 지독하게 몰아붙이고 일부러 괴롭혀서 멘탈을 부숴 버린다고 하더군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없잖아요.”

“배우의 내면에 숨겨진 본 모습을 끌어내고 싶다는 거 같은데. 다 개소리지요. 김이솔이 사막으로 충무로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는데 왜 이후로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금 런던에 유학 가 있겠어요?”

“그럼, 그게 도피성 유학이었단 말인가요?”

“내가 알기론 그래요.”

이자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 대표님은 왜 이걸 제게 말해 주지 않았죠? 내가 사막 때문에 얼마나 대표님을 원망했는데요.”

“원세강을 몰라서 그래요? 그런 걸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말해 줬어야죠.”

“세강이가 사막을 반대한 첫 번째 이유는 베드 신이었어요. 김기하 감독의 소문은 두 번째였고요. 그러니 말하지 않았겠죠.”

“나중에라도 얘기해 줬어야죠. 그럼,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오해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이자현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이자현 배우 만난 거 세강이한테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세강이가 신경 쓸 게 뻔하니까요. 이제 각자 다른 길로 가기로 했으니까 더는 엮이지 맙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도 LOK에서 알면 난리가 날 겁니다. 가뜩이나 세강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요.”

이자현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원 대표님 건강은 어떠세요?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다들 원 대표 걱정뿐이군요. 뉴욕에서 쓰러진 것 때문에 그러나 본데. 내가 보기엔 잘 먹고 잘 다니고 멀쩡합니다.”

강진석은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 사이에 사막 말고도 서로 풀지 못한 오해가 있는 걸로 압니다. 맞죠?”

이자현은 강진석의 말에 부인하지 않았다.

“끊어진 연을 다시 붙일 수는 없으니 그냥 이렇게 끝내요. 내가 오해했었다. 미안하다. 이런 말로 세강이 흔들지 말고요.”

강진석은 말을 마치고 VIP룸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이자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흔든다고 대표님이 흔들릴까요?”

* * *

나비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두 여자의 일정이 시작됐다.

서이렌은 나비의 촬영이 끝난 다음 날 바로 두 여자의 타이틀 촬영을 했다.

오랜만에 보는 하경민이 촬영장에 나타났다.

“경민 씨. 오랜만입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287일을 찍고 충무로의 대세로 떠오른 하경민의 첫 번째 드라마 데뷔작이 바로 두 여자다.

“봄에 있었던 무대 인사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거네요. 잘 지내셨죠? 윤서혁 감독님도 잘 지내시죠?”

“저한테 윤 감독님 안부를 물으시는 건가요? 하하. 잘 지내고 계세요.”

하경민은 촬영 준비를 마치고 나온 서이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이렌 씨는 한 달 전에 나비 촬영장에 찾아갔을 때랑 전혀 다른 사람인데요.”

갈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를 하룻밤 만에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칠십 년대 스타일의 교복을 입고 나타난 서이렌은 이제 최한나가 아니라 두 여자의 정서진이 되어 있었다.

양 갈래로 딴 머리가 전혀 촌스러워 보이지 않고 상큼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 배우님도 그때 촬영장에 온 사람과 다른 사람인데요? 제발 평상시에는 옷 좀 잘 챙겨 입고 다니세요.”

“하하. 조심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매니저한테 그것 때문에 맨날 혼납니다.”

하경민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촬영장으로 이자현이 나타났다.

나는 이자현을 보자마자 함께 온 강진석 이사에게 다가가 일 이야기를 꺼냈다.

“스타메이커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요?”

“지난주에 최 PD랑 미팅했어. 락이랑 이슬이 프로필 보더니, 마음에 들어 하더라.”

“다행이네요. 그것도 곧바로 촬영 들어가죠?”

“다음 주부터 바로 합숙 시작할 거래. 강원도 속초에 있는 리조트를 통으로 대여했다고 하던데. NGB에서 제대로 밀어주려나 봐. 최 PD도 이번에는 망하면 안 된다고 아주 공을 들이고 있어.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인데요?”

“NGB 예능 국장이 SBC에서 먼저 이직한 최 PD 선배인데 이것저것 간섭이 많은가 봐. 어그로 좀 더 끌어 보라고 기획서에 참견하고 그래서 최 PD가 골치 아파하더라고.”

스타메이커는 초반에 노리고 만든 설정들이 몇 개 있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매니저들이 끼어들면서 알아서 논란을 만들기 때문이다.

스타메이커는 배우의 연기는 기본이고 매니저들이 자신이 케어하는 소속 배우를 오디션에 통과시키기 위해 벌이는 암투가 핵심이다.

“괜찮을 겁니다. 제가 방향을 잘 알려 드릴 테니 형님이 그대로 해 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무슨 자신감이야?”

“제가 어쩌다 보니 스타메이커 대본 회의하는 옆방에 있었다고 했잖아요. 어떤 에피소드가 나올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만 믿으세요.”

“참나. 이럴 거면 원 대표가 대신 나가지 그래? 나 정말 떨린다고.”

나는 못 하겠다고 징징거리는 강진석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봤던 미래에선 형님이 스타메이커의 스타 매니저였다고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 카메라빨 안 받아서 안 돼요. 강 이사님이야말로 카메라도 잘 받고 성격도 유쾌하고 예능에 딱입니다. 매니저 참견 시점에 몇 주 나온 걸로도 큰 이슈였잖아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야. 촬영 끝나니까 귀신같이 인기가 사그라들더라고. 내가 그때 한물간 연예인의 비애를 느꼈잖아. 하하.”

* * *

개인 타이틀 촬영이 끝나고 서이렌과 이자현이 카메라 앞에 섰다.

“두분이 서로 친한 친구처럼 꼭 붙어서 웃어 주세요.”

사진작가의 주문에 서이렌과 이자현이 다정한 친구처럼 가까이 붙었다.

“좋습니다. 좋아요.”

사진작가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며 연신 ‘좋아요’를 외쳤다.

“두 사람 잘 어울리지 않아요? 아까 하경민 배우랑 찍을 때보다 케미가 더 사는 것 같은데요?”

스태프들은 서이렌과 이자현이 잘 어울린다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이러다 두 사람한테 커플 팬이 붙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예전에도 여여 커플이 터져서 연기대상에서 커플 상도 받고 그랬잖아요.”

“맞아요. 이번에도 기대해 볼 만하겠는데요?”

“아이고. 저기 서 있는 하경민 배우 매니저 울겠네요.”

사진작가가 휴식을 외치자 두 여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물러섰다.

이자현이 서이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선배니까 말 놔도 되죠?”

“예. 선배님.”

“대표님 건강은 어때?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서이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자현을 쳐다봤다.

“대표님은 이제 괜찮으십니다. 신경 꺼 주세요.”

서이렌이 차갑게 답했지만 이자현은 질문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스타탄생 식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거지? 대표님 병.”

“어디서 뭘 들은 거죠?”

“거짓말로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지난번 그랜드 백화점에서 LOK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빈선예 씨가 하는 말 들었어.”

“다 들었으면 우리가 비밀로 하는 것도 다 알겠네요.”

“대체 왜 비밀로 하는 거지?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대표님이 바라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대표님이 남은 생을 병원에 갇혀서 누워만 계시는 걸 원하실까요? 아니면 자신의 손으로 스타를 한 명이라도 더 키워 내길 바라실까요?”

이자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원세강은 죽기 전날까지 배우를 위해 일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배도 아는 척 나서지 말고 우리 대표님께 전화도 그만해요. 대표님 힘드시니까.”

“…….”

이자현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서이렌의 말이 다 맞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스태프가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자, 이번에는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모습을 보여 줍시다. 카메라 들어갑니다.”

서이렌과 이자현은 마치 준비했다는 듯이 돌아서서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아무런 포즈도 없이 그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의 텐션이 엄청났다.

“좋습니다. 눈빛 좋아요. 계속 그 자세로 유지해 주세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데 서이렌이 이자현에게 물었다.

“좋아하죠?”

“지금 촬영 중이야. 시끄러워.”

“우리 대표님 좋아하잖아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서이렌 씨야말로 원 대표님 좋아하는 거 아냐?”

“맞아요. 저는 좋아해요.”

“그럼 대표님은 아니란 말인가?”

“대표님은 본인이 키우는 배우랑 절대 연애 안 하는 분이시잖아요.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맞아. 대표님은 그런 분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이렌 씨 대표님이랑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대표님이 서른여섯 살인데 이렌 씨는 스물두 살 아냐? 좀 더 나이대에 맞는 상대를 찾아보는 게 어때?”

이자현은 혹시나 두 사람 사이에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원세강이 곤욕을 치를까 봐 걱정됐다.

이자현의 진심 어린 충고에 서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자현은 서이렌이 웃자 당황했다.

“왜 웃어?”

“내 나이는 남들과는 기준이 조금 다르거든요.”

“뭐라고?”

난 삼십일 년 전에 이미 스무 살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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