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70화 (71/261)

#70화. 밝혀지는 진실(2)

이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배우 된 거 잘하는 걸까요?”

“무슨 소리야. 대표님이 너는 꼭 배우로 성공시킬 거라고 하셨잖아.”

“대표님이 그렇게 아프신데 저 때문에 과로하실까 봐 그래요.”

“그래서 강진석 이사님 영입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때처럼 쓰러지시면 어떡해요?”

“원 대표님이 항상 차고 다니는 스마트 워치 있잖아. 그거 내가 태블릿에 동기화해 놨어. 대표님 심장 박동에 이상이 생기면 나랑 너 그리고 이렌 씨한테 연락 가게 해 놨으니까 지난번처럼 대표님 쓰러진 것도 모르고 그러진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한국 와서 그 병에 대해 많이 알아봤어요. 치료법이 없대요. 우리는 대표님의 병 진행 상황도 잘 모르니까 언제 상태가 안 좋아지는 건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도 십 년 넘게 사는 사람도 있대.”

“십 년도 짧다고요. 거지처럼 맞고 살던 나를 구출해 주신 게 대표님인데. 대표님이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대표님이 시한부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빈선예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오른 이락의 손을 꽉 잡아 줬다.

“울지 마. 대표님은 우리가 아는 거 모르시잖아. 너 이렇게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대표님 보러 갈래?”

“아뇨. 그럼, 안 되죠.”

“그렇지? 그러니까 울지 말고.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거자. 슬플 땐 차가운 걸 먹어 주면 좋아.”

그때 화장실에서 윤이슬이 나왔다.

윤이슬은 울고 있는 이락을 보고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이슬아 놀라지 마. 우리 락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우는 거야.”

윤이슬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이락을 바라봤다.

“락아. 울지 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렇지 않아도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했어. 가자.”

빈선예는 이락과 윤이슬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자현은 파우더 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자신이 방금 들은 말에 충격을 받아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는 이자현을 찾으러 현미가 들어왔다.

“언니. 여기서 뭐 하세요? 십 분밖에 안 남았어요. 빨리 가요.”

“현미야.”

이자현은 그제야 현미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혹시 화장실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현미야. 오늘 원세강 대표님도 오시는 거 맞지? 확실하지?”

“당연히 오시겠죠. 한지욱 대표님만 일본 출장 가셔서 김승민 이사가 대신 오시고요.”

갑자기 이자현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빨리 가자.”

* * *

먼저 도착한 우리는 레스토랑의 VIP룸으로 가서 앉았다.

가보니 TOP 엔터의 김승민 이사가 한지욱 대표를 대신해 와 있었다.

나와 김승민은 잠깐 밖으로 나가 감독과 작가가 오기 전까지 대화를 나눴다.

“김승민 이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 대표. 그동안 잘 지냈지?”

김승민 이사는 사람 좋은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TOP로 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강진석이 얘기해 주던가? LOK에서 말들이 많더군. 강진석 팀장이랑 2팀 로드 빼 갔다면서?”

“다 제 탓입니다. 회사는 커지는데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요. 잠깐은 욕먹을 각오 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깐이 아닐 거 같은데. 록 실장이. 아! 아니지. 록 이사가 원 대표한테 이를 갈고 있더군. 록 실장이 록 이사 된 건 들었지?”

“알고 있습니다.”

“조심해. 서이렌은 이제 이자현 배우랑 투 톱으로 캐스팅될 만큼 입지가 커져서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신인 배우들은 달라. 록 이사가 지수연 챙기면서 KBC랑 사이가 좋아졌거든.”

“명심하겠습니다. 한 일이 년 버티다 보면 괜찮아지겠죠.”

내가 죽으면 록 이사도 강진석에게는 뭐라고 못할 거다.

그때 두 여자의 감독인 강진완과 작가 우혁수, 김지수가 함께 나타났다.

“감독님과 작가님들 오셨네요. 이제 들어가시죠? 김 이사님.”

“그래. 그런데 이자현 배우가 조금 늦네. 나랑 같이 와서 아래층에 잠깐 쇼핑하러 다녀온다고 했는데.”

“저기 오시네요.”

이자현과 그녀의 스태프인 현미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자현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이자현 표정이 왜 저렇지?

현미는 괜찮은 거 같은데?

“김승민 이사. 자주 보네요. 원세강 대표는 오랜만에 보고요.”

강진완 감독이 우리를 보고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강지완 감독과 작가들, 김승민 이사를 먼저 VIP룸으로 들여보내고 내가 비켜섰다.

“먼저 들어가요.”

내가 손을 내밀었지만 이자현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들어갈 건가요?”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이자현은 굳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며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끝나면 나 좀 봐요.”

내가 뭐라 답할 시간도 없이 이자현이 룸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이자현이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랑 볼일이 있던가?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탁자를 사이로 강진완 감독과 우혁수, 김지수 작가가 나란히 않고 서이렌과 나 그리고 이자현과 김승민 이사가 나란히 앉았다.

나는 어쩌다 보니 서이렌과 이자현 사이에 끼고 말았다.

“이렌 씨 내가 실수했어요. 자리 바꿔 줄게요.”

내가 일어서려고 하자 김지수 작가가 막았다.

“됐어요. 그냥 앉아요. 어차피 이제 몇 달간 지지고 볶으며 매일 얼굴 볼 건데. 뭘 또 벌써 아이 콘택트를 시키려고 해.”

“김 작가 말이 맞아. 나 사실 오늘 원세강 대표랑 술 마시려고 온 거야. 지금 자리 딱 좋으니까 그 자리에 앉아 있어.”

강진완 감독과는 이자현과 드라마를 한 적이 있어서 친분이 깊다.

우혁수 작가와 김지수 작가도 마찬가지다.

“우 작가랑 김 작가는 처음 보지? 부부가 거의 은둔하면서 집필하는 타입이라 오늘도 끌고 오느라 고생 좀 했어.”

강진완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우혁수와 김지수는 이 바닥에서는 보기 드문 작가 부부다.

“감독님이 비싼 술 사 준다고 해서 나왔죠.”

“내가 사는 건 아니고 MBS가 사 주는 거지.”

“원래 남의 돈으로 마셔야 주사 없이 잘 취하는 거예요.”

강진완 감독과 작가들은 주당답게 식사를 시키지 않았는데 벌써 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와 이자현 그리고 김승민은 그들과 작품을 한 적이 있지만, 서이렌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자현 씨는 술 거의 못 하는 거 알고 있고. 서이렌 씨는 술 좀 마시나요?”

김지수 작가의 질문에 서이렌이 똥그란 눈을 끔벅거리며 답했다.

“잘 마십니다.”

“잘 마셔요? 주량이 얼마나 되는데요? 주종은 뭐고요?”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마십니다. 주량은 모르고요. 지금까지 취해 본 적이 없어서요.”

“정말? 여배우가 이렇게 말하는 거 나 처음 들어 보네.”

나는 서이렌의 대답을 들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우리 이렌 씨가 사실 인간이 아니라 알코올을 그냥 물처럼 마십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이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렌 씨. 이분들이 드라마 판에서 알아주는 주당입니다. 함부로 술 잘 마신다고 말하면 안 돼요.”

“원 대표가 뭔가 잘못 알고 있네. 드라마 판이 아니라 영화판 연극판 뒤져도 우리처럼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지.”

강진완 감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저들이 저렇게 거리낌 없이 술 이야기를 하지만 흔히 알고 있는 술고래와는 거리가 멀다.

한번 자리 잡고 마실 때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내가 저들의 술판에 자주 끼어 봐서 안다.

“술 이야기는 그만하고 주문 먼저 하죠.”

“우리 항상 먹는 거 있잖아. 그거 시켜 줘요. 원 대표.”

“와인도 항상 마시던 거로 시키겠습니다.”

“그래요. 원 대표.”

주문한 와인이 먼저 나오자 나는 걱정이 앞섰다.

약 먹을 때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나?

내가 고민하는 사이 종업원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잔에 와인을 채우고 사라졌다.

“그럼, 한잔할까요? 두 여자를 위해 저 멀리 은둔하고 있던 속초에서 와 주신 우혁수, 김지수 작가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시작하죠.”

“은둔은 무슨. 여기서 속초까지 반나절도 안 걸려.”

“하하. 알았어. 그만 놀릴게요. 그럼, 다들 잔을 들까요?”

강진완 감독이 먼저 잔을 들자 나는 결국 결정하고 와인 잔에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때 서이렌과 이자현이 손이 동시에 치고 들어왔다.

서이렌과 이자현이 내 앞에 있는 잔을 동시에 잡았다.

“원 대표님은 안 됩니다. 얼마 전에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지셨거든요. 술은 안 될 거 같아요.”

서이렌이 와인 잔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이자현이 꽉 잡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자현은 와인 잔을 꼭 쥔 채 나를 보며 물었다.

“원 대표님. 쓰러지셨어요? 언제요?”

뭐야? 대체 왜들 이래?

순간 내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서이렌은 그러려니 하는데 이자현은 왜 저러는 걸까?

그때 구세주처럼 김지수 작가가 입을 열었다.

“원 대표 쓰러졌었어? 언제? 어쩐지 오늘 오랜만에 봤는데 뭔가 예전보다 살도 좀 빠진 거 같고 얼굴도 갸름해졌더라.”

그 틈에 서이렌은 완력 싸움에서 이기고 내 와인 잔을 빼앗아 자신의 앞자리에 가져다 놨다.

“저는 괜찮습니다. 고작 와인인데요. 한 잔만 마실게요.”

내가 서이렌에게 잔을 돌려 달라고 말하자 서이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표님. 약 드시잖아요. 그거 술이랑 같이 먹어도 된대요?”

“약은 먹지만 하루 정도는 안 먹어도 돼요.”

“의사가 그러래요?”

“그건 잘 모르지만…….”

“의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알아요? 약 끊었다가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김지수 작가도 서이렌 편을 들었다.

“배우가 대표를 끔찍이도 챙기네. 원 대표는 서이렌 씨 말 들어요. 약 먹는데 술은 아니지. 와인도 술이야. 원 대표.”

“예. 김 작가님.”

“그런데 원 대표 어디 많이 안 좋아? 나보다 훨씬 젊은데 벌써 그러면 되겠어?”

“감독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피로가 잠깐 누적돼서 그런거고 이제는 도와줄 사람도 생겼고 예전처럼 혼자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다행이고. 이제야 회사 대표 돼서 날아갈 일만 남았는데 몸 상하면 안 되지.”

“다들 저는 그만 쳐다보시고 일 이야기하시죠.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두 여자가 아닙니까.”

“그래. 그럼 원 대표는 물잔 들어. 자 다 같이 잔 듭시다.”

강진완 대표가 잔을 들자 모두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나는 물잔을 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과 함께 건배했다.

* * *

상견례 자리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이자현이 보낸 문자였다.

[저랑 이야기 좀 해요.]

나는 전화를 걸까 하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가 이자현과 전화 통화를 주고받는 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거다.

LOK에서 강진석을 빼 온 것도 모자라서 이자현을 빼 오려고 한다고 생각할 거다.

이자현의 재계약 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이런 때에는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자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 지금 다른 일정이 있어서. 다음에 대본 리딩 때 보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의 전원을 꺼 버렸다.

서이렌이 내 행동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요. 이렌 씨.”

“나 아무래도 라이벌을 만난 거 같다는 기분이 드는데요?”

“무슨 라이벌이요?”

“이자현 선배님이랑 나랑 라이벌이죠?”

“초반에는 라이벌 관계지만 나중에 친자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달라질 거예요.”

“지금 그 말이 아니잖아요.”

“기자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로 묶을까 봐 그런가요? 아마 초반에는 라이벌 기사가 많이 날 겁니다. 그런데 그건 두 사람이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면 그런 기사는 쏙 들어갈 겁니다.”

“대표님은 정말 눈치가 없어요.”

“저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됐어요. 가요.”

엘리베이터를 탄 서이렌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두 여자 촬영장에 대표님은 절대 오지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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