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9화 (70/261)
  • #69화. 밝혀지는 진실(1)

    다음 주에 드디어 미뤄졌던 두 여자의 감독과 작가를 만나는 상견례를 한다.

    영화를 찍던 이진아가 다쳐서 지난달에 해야 했을 상견례가 미뤄졌고 두 여자의 제작 일정도 이주나 늦춰졌다.

    다음 주면 강진석도 LOK를 퇴사하고 스타탄생으로 출근한다.

    강진석이 LOK의 제일 믿음직스러운 로드매니저를 데리고 온다고 해서 안심이다.

    전 회사 식구들 빼 간다고 욕을 엄청나게 들어먹고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난 곧 죽을 몸인데 실컷들 떠들라지.

    두 여자 때문에 틀어진 일정표를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강진석 팀장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강 팀장님. 지금 휴가 중이지 않으세요?”

    [나 지금 제주도인데. 진명이한테 연락이 와서 전화했어.]

    “진명이라면 이자현 배우님 로드잖아요. 진명이가 왜요?”

    [진명이가 그러던데 이자현 구미호 전설 안 하기로 했대.]

    “아. 정말요?”

    [응. 내가 진명이한테 뭐 바뀌는 거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거든.]

    다행이다.

    일 년 만의 복귀작인데 표절작을 하면 이자현의 인기에 치명타가 된다.

    그런데 그때 강진석이 이상한 말을 했다.

    [그런데 세강아. 이자현 차기작이 바로 정해질 거 같다던데. 너는 알고 있는 거지?]

    “아뇨. 모르는데요.”

    [몰라? 이상하다. 넌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들었어요. 대체 뭔데 그래요??”

    [이자현이 두 여자 할 거 같대. 이진아 부상으로 하차하고 대신 캐스팅 됐다던데?]

    이자현이 두 여자를 한다고?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강진석이 계속 떠들었으나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작가랑 감독이랑 극비로 만났다고 하니까 한번 확인해 봐. 네가 모르고 있는 거 보니까 그냥 만나기만 하고 무산된 걸 수도 있겠다.]

    “…….”

    [야. 세강아? 듣고 있어? 이거 감이 안 좋은가? 세강아?]

    강진석 팀장이 다그쳐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예. 들려요.”

    [짜식. 나 지금 오름 오르고 있어서 그런지 통화 감이 안 좋다. 이만 끊을게.]

    “예. 그래요.”

    전화를 끊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핸드폰을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린 나는 곧바로 숲 엔터의 이진아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그랜드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에 스타탄생 밴이 도착했다.

    밴에는 오늘 상견례를 하기로 한 나와 서이렌뿐만 아니라 빈선예와 이락 그리고 윤이슬도 함께였다.

    나는 빈선예를 돌아보며 법인 카드를 넘겼다.

    “빈 팀장님께 맡길 테니 스타탄생 신인 배우분들 옷 좀 잘 골라 주세요.”

    “락이랑 이슬이한테 원하는 이미지는 있어요?”

    “제가 그런 쪽에는 문외한이잖아요. 빈 팀장님을 믿어야죠. 영화 촬영 때문에 헤어스타일은 못 바꾸니까 그것 빼고는 다 빈 팀장님 의견에 따라 사 주세요.”

    “알았어요. 요즘 이십 대 트렌드에 맞게 깔끔하고 세련된 스타일로 갈게요. 저만 믿어요.”

    빈선예는 법인 카드를 백에 넣으며 말했다.

    이락은 쇼핑하러 간다는 말에 짐꾼 노릇을 하러 따라온 건데 자신의 옷을 산다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삿돈으로 저랑 이슬 누나 옷을 사 주시려고요?”

    “응.”

    “왜요?”

    “너랑 이슬이 둘 다 이제 우리 회사 배우야. 잘 꾸미고 다녀야지.”

    “하지만 저희는 아직 돈 번 것도 없는데.”

    이락과 윤이슬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빈선예와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서이렌이 이락을 향해 말했다.

    “락아.”

    “예. 이렌 님.”

    “난 집도 없어서 빈 팀장님 집에 얹혀살고 있어.”

    “그거야. 이렌 님은 미국에서 오셨으니까 그런 거죠.”

    “나는 내 옷도 하나도 없어. 다 대표님이 사 주신 거야.”

    “하지만 이렌 님은 회사에 벌어 준 돈이…….”

    “당당하게 굴어. 대표님 돈이 내 돈이라고 생각해.”

    “정말요? 그래도 돼요?”

    “나중에 네가 스타 된 다음에 벌어서 갚을 거잖아.”

    서이렌은 당황해하는 윤이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슬 언니. 저만 믿고 쓰세요. 제가 충분히 벌어 놔서 이 백화점 한 층을 다 털어도 스타탄생 안 망해요.”

    “이렌 씨. 명품 매장 있는 이 층은 빼고.”

    “빈 팀장님 말씀 들으셨죠? 이 층은 빼고요.”

    나는 이락과 윤이슬을 데리고 차에서 내리는 빈선예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켰다.

    “빈 팀장님. 이 층 빼고 다 털어 와요.”

    “오케이. 접수했습니다.”

    빈선예 일행이 빠져나가자 밴 안이 고요해졌다.

    나는 서이렌을 바라봤다.

    감독과 작가를 따로 만난 적은 있지만, 오늘은 다른 주연 배우와 함께 만나는 일종의 상견례 자리다.

    나는 평소처럼 전혀 긴장하지 않는 서이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진아 씨 건강 때문에 하차한 거 들었죠?”

    “예.”

    서이렌은 이미 이주 전부터 이진아의 부상 후유증이 심해서 드라마에서 하차할 거란 걸 알았단다.

    내가 걱정할까 봐 확정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지만 그녀도 대타로 이자현이 캐스팅될 줄을 몰랐겠지.

    오늘 아침, 이진아 대신 이자현이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정식으로 떴다.

    “이자현 씨는 괜찮은 배우예요. 아마 촬영하면서 배울 점이 많을 겁니다.”

    “저도 좋은 배우죠.”

    “맞아요. 서이렌 씨는 완벽하죠.”

    내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서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와 이자현 배우 사이가 좋지 않게 끝났다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 남은 앙금 같은 건 없어요. 이자현 배우도 그래서 이 드라마에 합류했을 거예요.”

    “대표님이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요. 어차피 연기는 두 사람이 하는 거니까요.”

    “그건 힘들죠.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대표님뿐인데 어떻게 대표님을 신경 쓰지 말라는 건데요?”

    “그건 못들은 걸로 할게요. 늦겠어요. 갑시다.”

    “못 들었으면 어쩔 수 없네요. 또 말해 줄게요. 내가 관심 있는 건 원세강 대표님뿐입니다.”

    나는 먼저 차에서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

    방금까지 내가 좋다고 조잘대던 서이렌은 차 문이 열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고 새초롬한 표정으로 변했다.

    역시 서이렌은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할 줄 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오늘 약속을 잡은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 * *

    이자현의 두 여자 캐스팅 소식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 대박. 이자현 드디어 컴백하는 건가?

    - 이자현이 이진아 대타를 하는 날이 오네. 일 년 쉬었다고 급이 확 떨어졌어.

    - 무슨 소리야? 감독이랑 작가 인연으로 캐스팅된 건데. 사실 따지고 보면 급이야 이진아보다 이자현이 훨씬 높지.

    - 맞말임. 두 여자는 완전 땡잡은 거지.

    - 뭐라고 떠들든 자현 여신님 컴백하는 것밖에 눈에 안 들어온다.

    - 솔직히 대상 이후, 컴백작으로는 두 여자 만한 게 없지 않나?

    - 당연하지. MBS 창사 특집극에 여주 중심 시대극인데.

    - 이거 서이렌이랑 이자현 투 톱이지?

    - 말은 투 톱인데 1롤이 이자현임. 언니 쪽 서사로 내용이 흘러가거든.

    - 다른 건 모르겠고 와꾸합은 미쳤네.

    - 가뜩이나 미친 미모의 여신들인데 두 여자 감독님이 배우들 예쁘게 찍어 주시기로 유명한 감독님임. 이자현이 신인 때 그 수혜를 톡톡히 봤잖아.

    - 까면 깔수록 더 기대된다.

    - 난 딴 건 모르겠고 서이렌 기세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데뷔한 지 이제 일 년 반 된 신인이 MBS 창사 특집극 주연에 이자현과 투 톱이라니.

    - LOK는 차세대 이자현이라고 강하나를 밀지 말고 차라리 서이렌을 밀지.

    - 뭔 소리냐? 서이렌 LOK 아냐.

    - 그래? LOK 어쩌고라고 기사에서 본 거 같은데?

    - 서이렌 회사가 LOK에서 독립한 매니저가 차린 회사라서 그런 거다. 서이렌 회사는 1인 기획사나 다름없는 좇소야.

    - 너희 그거 아냐? 독립한 그 매니저가 원래 이자현 매니저였음.

    - 헐? 진짜? 그럼, 그 매니저가 도와 달라고 했나 보다. 이자현이 자기 스태프들 잘 챙기기로 유명하잖아.

    - 더 놀라운 건 그 매니저 와꾸다. 서이렌 여우비 촬영할 때 비하인드 컷에 얼굴 제대로 실린 적 있었는데 사연 있어 보이는 미남임.

    - 매니저가 와꾸가 뭐가 놀라워 봤자지.

    - 여기 그때 나온 기사 사진이다. 옜다. 봐라.

    - 말도 안 돼. 이게 매니저 얼굴이라고? 김선우보다 더 나은데?

    - 그렇지? 진짜 잘생겼지?

    - 이 정도로 생겼으면 본인이 데뷔해야지. 왜 매니저를 하냐? 이해가 안 되네.

    - 저 매니저 원래 이자현 팬들 사이에서도 엄청 유명했어. 비록 중퇴긴 하지만 한국대 컴공 나왔대.

    - 미친. 완전 엄친아였네. 인제 보니 약간 너드미도 보이는 거 같다. 눈빛이 순진해 보여. 큭큭.

    - 댓글 흐름이 졸라 근본 없네. ㅋ

    - 서이렌 회사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잘생긴 매니저 이야기로 튀더니 끝날 줄 몰라.

    - 잘생긴 게 최고거든. 큭큭.

    먼저 도착해서 VIP 관을 쇼핑하던 이자현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댓글을 훑어보고 창을 닫았다.

    스태프 현미가 이자현에게 물었다.

    “저는 이게 마음에 드는데 언니는 어때요?”

    이자현은 눈앞의 고급스러운 넥타이핀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 대표님께 잘 어울리겠지?”

    “그럼요. 대표님이 블루 계열의 색상이 잘 받으시잖아요.”

    “그럼, 이걸로 하자. 아직 시간 남았지?”

    현미는 넥타이핀을 계산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이십 분 전이에요. 평소처럼 십 분 전에 올라가실 거죠?”

    “응. 삼십 분은 너무 예의를 차린 거 같고, 정각에 도착하면 싹수없어 보이고, 십 분 전이 딱이거든.”

    “조금 더 둘러보다가 올라가요. 언니.”

    현미가 포장한 넥타이핀을 챙기려고 하자 이자현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들고 있을게.”

    “예. 그러세요. 언니.”

    이자현은 곱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자신의 가방 안에 깊숙이 넣어 놨다.

    “나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넌 쇼핑하고 있어. 네 동생 생일 선물 사야 한다고 했지?”

    “그걸 기억하고 계시네요. 알았어요. 다녀와요. 언니.”

    이자현은 스태프인 현미에게 두고 화장실로 갔다.

    이자현은 아까 봤던 댓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원세강은 이자현이 댓글을 일일이 찾아보는 걸 싫어했다.

    항상 원세강이 먼저 인터넷 반응을 모니터링하고 그녀가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댓글만 추려서 보여 주곤 했다.

    하지만 원세강이 퇴사하고 이것만은 인수인계하지 않았던지 이제는 회사에서 그렇게 해 주는 사람이 없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스태프 현미도 멘탈이 약해서 이자현의 댓글을 잘 보지 못한다.

    ‘서이렌은 해 주겠지?’

    이자현은 갑자기 든 유치한 발상에 몸서리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쳤어.’

    밖으로 나온 이자현은 손을 닦고 남녀 화장실 사이에 있는 조그만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칸막이로 되어 있는 파우더 룸의 한 칸을 차지한 이자현은 얼굴을 확인했다.

    이자현은 원세강 덕에 표절작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오늘 보게 될 건데. 얼굴 보고 말해야겠지.’

    이자현은 원세강에게 보답으로 준비한 선물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파우더 룸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슬 누님이 일 보고 나오실 동안 빈 팀장님은 앉아서 좀 쉬세요.”

    “너도 무거울 텐데 그 쇼핑 백이나 내려놔.”

    “어휴. 이 비싼 걸 바닥에 내려놓을 순 없죠.”

    “안 비싼 거야. 일부러 중저가만 골랐는데.”

    “무슨 중저가가 이렇게 비싸요? 와. 대한민국 옷값 미쳤네요.”

    “신상이라 그래. 다음엔 아웃렛 가서 살 거야. 기본 아이템은 아웃렛 가서 사는 게 이득이야.”

    “그때도 제가 짐꾼 해 드릴게요.”

    “됐어. 이제 곧 바빠질 거야. 쇼핑할 시간이 어디에 있어.”

    “그렇겠죠?”

    잠깐 둘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이자현이 나가려고 파우더 룸을 나서려는데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빈 팀장님. 스타탄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대표님이 아프시잖아요. 저는 너무 걱정이에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이자현은 그대로 온몸이 굳은 채 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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