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조력자 영입
이락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슬픔으로 물들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락 군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어머니가 먼저 알아보실 수도 있어요.”
“저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대표님.”
이락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럼, 도전해 보는 겁니다. 내가 락 군이 갈 만한 회사를 알아봐 줄게요.”
“대표님.”
이락이 일어서는 내 손을 잡았다.
이락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스타탄생에서 데뷔하고 싶습니다. 제 회사는 스타탄생뿐이에요.”
“락 군 생각은 알겠지만 내가…….”
나는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내게 남은 시간은 길어 봤자 일 년 반에서 이 년이다.
그동안 서이렌을 누구도 쳐다보지 못할 톱스타로 만들고, 이락까지 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우연미 작가도 있다.
이렇게 판을 벌여도 되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할 건 없다.
아니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은 울어서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내 입에서 나올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락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계약합시다.”
* * *
이락과 정식으로 배우 계약서를 쓴 다음 날, 나는 LOK를 찾았다.
하루빨리 강진석 팀장을 스타탄생에 영입하기 위해서 적진에 직접 찾아간 것이다.
LOK에서 한 블록이나 떨어진 곳의 카페에서 강진석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 대표가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지금 회사에 계시죠?”
[그렇지. 화요일에는 팀장 회의가 있어서 사무실에 있어야 하잖아.]
“회의는 끝나셨어요?”
[그럼, 끝났지. 그렇지 않아도 세 시간이나 걸린 마라톤 회의여서 지금 녹다운 상태다. 지금 당 보충하러 나가려던 참이야.]
“잘됐네요. 사거리 지나서 은행 빌딩 이 층에 있는 카페로 오실래요? 지금 거기서 강 팀장님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행 빌딩 이 층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이거 긴장되는데? 원 대표가 무슨 비밀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왕림한 거야? 잠깐만. 나 엘리베이터 탈 거야. 신호 끊어질 수 있어.]
“예. 강 팀장님.”
신호가 멀어지더니 수십 초 후, 드디어 강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밖으로 나왔어. 편하게 말해.]
사무실 밖으로 나온 강진석은 아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사무실 안에서 나와 대화하는 게 껄끄러웠나 보다.
“오시면 이야기해요.”
[나 지금 택시 탔어.]
“한 블록 거리인데 택시를 타셨어요?”
[기본요금인데 뭐, 내가 궁금해서 그래. 금방 도착할 거야.]
“그럼, 커피 먼저 시켜 놓을까요?”
[바닐라라테 아이스로. 달달한 거 엄청 땡긴다.]
내가 주문한 바닐라라테가 나오기도 전에 강진석 팀장이 이 층 카페로 들어왔다.
“원세강. 이 자식아. 오랜만이다.”
“시킨 거 지금 나왔어요. 진짜 일찍 오셨네요.”
“너는 어째 LOK 나가고 더 잘생겨지는 거 같다. 이제 남 눈치 안 보는 대표라 이거지?”
“LOK 나가니까 살맛 나더라고요.”
“너 제때 탈출 잘한 거야. LOK는 갑갑하다.”
강진석은 바닐라라테를 단숨에 반이나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회의 시간 내내 죽는 줄 알았다.”
“왜요? 회사에 문제 있습니까? 밖에서 보면 문제없어 보입니다. 김선우도 여전히 잘나가고 강하나나 지수연이나 빠르게 주연급으로 올라섰잖습니까? 다른 배우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작품 잘 들어가고요.”
“한지욱 그 자식이 문제야.”
“TOP 엔터 대표 한지욱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표는 무슨. TOP 엔터 차려 주고 대표로 밀어 넣어 줬으면 실적이 있어야 하는데. 지난 일 년간 이자현은 광고만 찍게 하고. 본인은 캐스팅한다면서 모델들한테 명함이나 돌리고. 지금도 그것 때문에 내부에서 말이 많아.”
“그렇습니까?”
“말해서 뭐 해? Y&C에서 합병됐던 배우들도 매니징에 불만 쌓여서 차라리 LOK로 오겠다는 배우들도 있어. 지금 TOP는 완전 한지욱 놀이터야.”
“그것 때문에 회의가 길어진 건가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잘 돌아가던 LOK 다 뒤집어 놓게 생겼다. 김승민 이사가 TOP로 가고, 록 실장이 이사 자리로 올라간단다.”
“록 실장님이 이사로 승진을요?”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록 실장님이 김승민 이사님 자리로 간다니 놀라운데요?”
“너 방금 록 실장이 그럴 능력이나 되나?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록 실장이 라인을 잘 탔어. 보니까 이미 한지욱 라인이더라. 한지욱이 TOP 엔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록 실장이 도왔다고 하던데. 어쩐지 그래서 한지욱이 배우 케어는 안 하고 이상한 짓 하면서 돌아다닌 거였어. 암튼 회의 끝나고 다들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이었다. 네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록 실장과는 계속 껄끄러운 상태다.
서로 싸운 것도 아니고 록 실장이 일방적으로 피해 의식을 가지고 나를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의 힘이 점점 커진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자현 배우님은 어때요? 차기작을 못 하고 있던데요?”
“이제 들어갈 거야.”
“무슨 작품인데요?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무슨 큰 비밀이라고? 윤아영 작가 신작 드라마로 복귀할 거야.”
윤아영 작가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아영 작가의 작품이 뭐였지?
오 년 전만 해도 하는 작품마다 히트하며 승승장구하던 게 윤아영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 작품이 철저하게 망하고 공중파 미니시리즈임에도 시청률이 무려 2%까지 떨어져 난리가 났었다.
그 이후에 복귀를 안 했던 거 같은데.
그때 내 머릿속에 작품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놀란 눈으로 강진석에게 물었다.
“혹시 구미호 전설인가요?”
“알고 있었어? 설마 서이렌 씨한테도 대본 갔나? 윤아영 작가가 이자현 생각하고 대본 썼다고 했는데.”
“그거 하면 안 돼요.”
“응? 뭐라고?”
구미호 전설은 표절 작품이다.
인터넷에 연재됐다가 연중 된 작품을 설정뿐만 아니라 대사까지 죄다 카피해서 만든 표절작이다.
드라마가 시작하고 비공개로 돌린 작품을 공개로 돌리면서 표절이 만천하에 까발려져 큰 곤욕을 치르고 작품도 엎어졌다.
이걸 왜 이자현이 하는 거지?
“강 팀장님. 아직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죠?”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 그런데 왜 그래? 혹시 뭐 들은 거 있어?”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고 곧이어 이락이 내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촬영장은 아무 문제 없습니다.]
“락 군. 혹시 거기서 뭐 하나만 해킹해 줄 수 있어요?”
[뭘 하시려고요? 밴 안에 노트북 있어서 간단한 거는 할 수 있을 거예요.]
“다름이 아니라 팔레트라는 인터넷 소설 연재 사이트가 있거든요. 거기에 구미호 전설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지금 비공개 상태예요. 혹시 그거 비공개 풀고 연재 내용 긁어다 줄 수 있어요?”
[지금 사이트 접속해 볼게요.]
잠시 후, 이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팔레트라는 연재 사이트는 없고 팔로스는 있습니다.]
“맞아요. 내가 제대로 기억 못 했을 수 있어요.”
[구미호 전설 찾았습니다. 지금 비공개된 거 맞아요. 내용 긁을 수 있는지 확인 후에 연락드릴게요.]
“예. 고마워요. 락 군.”
전화를 끊자 심각한 표정의 강진석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구미호 전설이 문제 있는 작품이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모두 강진석에게 알렸다.
표절작이라는 말에 강진석의 얼굴이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자초지종을 모두 말하자 드디어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해킹을 마친 이락이 내 메일로 구미호 전설의 데이터를 보냈다.
“구미호 전설 원본 소설을 입수했어요. 이걸 강 팀장님이…….”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걸 강진석이 직접 이자현에게 전하면 문제가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출처부터 해킹해서 얻은 것이 아닌가?
“강 팀장님. 이건 제가 이 배우한테 잘 말해 볼게요.”
“네가 직접 하겠다고?”
“그래도 전 매니저였잖아요. 이 정도 정보는 제가 줄 수도 있죠. 강 팀장님은 빠지세요.”
“그래. 네가 이자현 직통 전화번호 알고 있을 테니 직접 말해 봐. 그게 좋겠다.”
“이자현 배우한테 직접 할 것도 없이 현미 씨한테 보내면 됩니다.”
이자현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나는 오늘 온 용건을 꺼냈다.
“강 팀장님. 저와 함께 일하시죠.”
“무슨 소리야?”
“스타탄생에서 같이 일해요. 바로 이사 직함 달아 드릴게요.”
“내가 거기 가서 할 일이 뭐가 있어? 서이렌 배우 케어는 네가 잘하고 있잖아.”
“배우가 늘어날 겁니다.”
“벌써 배우를 영입했어?”
“예. 두 명입니다.”
나는 이락을 영입하기로 한 김에 판을 키우기로 했다.
어차피 배우가 늘어날 거라면 내가 있을 때 스타탄생을 확실하게 키우는 편이 좋았다.
“이락이라는 배우와 윤이슬이라는 스턴트맨 출신 배우예요. 이락 배우는 지금 윤명현 감독이 찍고 있는 영화 나비에 출연 중이고, 윤이슬 배우도 서이렌 씨 대역으로 같은 영화에 출연 중입니다.”
강진석은 점점 두 눈이 커졌다.
“너 진짜 달라졌구나. 너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하는 놈이잖아. 내가 그래서 너 회사 차린다고 했을 때 ‘일인 기획사 되겠네.’ 하고 걱정했다고.”
“키우고 싶은 배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때요? 같이하실래요?”
강진석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강진석은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하자.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김경록 그 새끼를 록 이사님이라고 부르는 짓은 못 하겠다.”
“그럼, 결정하신 겁니다. 번복하기 없기예요.”
“당연하지. 나도 갑갑하던 참에 너한테 연락이나 한번 해 볼까 했었어.”
다행이다.
이락과 계약하면서 생각한 계획이 있다.
그 계획의 제일 중요한 사람이 바로 강진석이다.
강진석이 오케이하자 나는 진짜 오늘 그를 만난 본론을 꺼냈다.
“최욱환 PD랑은 아직도 친하시죠?”
“갑자기 최욱환 얘기는 왜 꺼내? 혹시 NGB에서 이번에 하는 스타메이커라는 배우 오디션 때문이야?”
“알고 계셨네요.”
“그거 때문에 요즘에 LOK에서도 말이 많아. 신인 배우 오디션 예능이 흔치 않잖아.”
“있었는데 다 망했죠.”
오디션 프로그램은 경쟁을 바탕으로 자극적인 요소가 많아서 망하기 어렵다.
하지만 배우 오디션은 다르다.
지금까지 했던 배우 오디션은 죄다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연기라는 오디션 과제도 그렇지만 연기 외에는 낯을 가리는 배우들의 성격이 오디션 과정을 재미없게 만든다고나 할까?
강진석이 남은 바닐라라테를 원샷하며 말했다.
“최 PD 데뷔작이 SBS에서 한 스탠바이였잖아. 그거 제대로 망하고 한이 쌓였었나 봐.”
“그럴 만하죠. 스탠바이에 나왔던 신인 배우들이 결국엔 다 떴잖아요. 스탠바이는 지금은 저주받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회자하고 있고요.”
“최욱환이 NGB로 이적하면서 다시 배우 오디션이란 칼을 뽑을지 어떻게 알았겠어. 이번엔 안 망하려고 이상한 걸 접목했던데?”
“맞습니다. 배우 오디션인데 매니저가 함께하죠. 그래서 제목이 스타메이커인 거고요.”
“너 설마 너희 신인 배우를 스타메이커에 출연시키려고?”
“예.”
강진석은 내가 너무 쉽게 그렇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위험하지 않아? LOK에서도 여러 명 내보내려고 고심하고 있긴 하던데. 내가 보기엔 그 예능은 배우보다 함께 출연하는 매니저가 더 중요한 거 같던데?”
아뇨.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스타메이커는 대박 나는 오디션 프로니까요.
“그럼, 매니저는 누가 나가? 거기 나가면 매니저도 방송 타야 하잖아.”
강진석의 질문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지었다.
“설마? 나보고 나가라고?”
“강 팀장님은 매니저 참견 시점이라는 예능에도 나온 적이 있고 최욱환 PD랑도 친하시잖아요.”
“이것 봐라. 너 그래서 나를 영입하려는 거지? 이게 꿍꿍이가 있었네.”
“하실 거죠? 저 최욱환 PD한테 연락할 겁니다.”
“하. 연예인도 아닌데 자꾸 방송 타면 안 되는데.”
강진석은 말은 그렇게 해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