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7화 (68/261)
  • #67화. 아무도 몰랐던 재능

    윤명현 감독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락은 멋쩍은 얼굴로 뒤로 물러섰고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렌 씨 로드매니저인 이락 군입니다. 열쇠 관련 업체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자물쇠 여는 방법을 안다고 합니다. 그렇죠?”

    내가 묻자 이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입니까? 이거 특수제작한 거라서 그분만 해체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윤명현은 놀랐지만, 자신의 눈앞에 깔끔하게 분해된 자물쇠를 보고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윤명현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비치자 나는 내 의견을 말했다.

    “감독님. 저 친구를 출연시키면 어떨까요?”

    “원 대표. 그게 무슨 뜻이죠?”

    “기술자는 지금처럼 구영진 배우님이 맡는 거로 하고요. 이락 씨가 기술자의 부하 역을 하는 겁니다. 연기는 구영진 배우님이 하시면 되고 이락 씨는 입을 꾹 다물고 자물쇠만 해체하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내 말에 윤명현 감독뿐만 아니라 구영진 배우도 두 눈을 크게 떴다.

    “윤 감독.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부하가 별로면 내 제자로 하면 되잖아.”

    윤명현은 내 뒤에 서 있는 이락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테스트 한번 받아 봅시다.”

    “예? 저요?”

    “거기 둘째 줄 대사 한번 읽어 봐요.”

    윤명현은 이락에게 다짜고짜 대본을 넘기고 읽어 보라고 시켰다.

    이락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이런 곳인 줄…… 말. 말 안 했잖아. 위험수당까지. 두 배로……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이락이 엉성하게 대본을 읽고 윤명현 감독을 쳐다봤다.

    내가 보기엔 엉망이었지만 윤명현 감독은 이락의 어설픈 연기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 대사 통으로 외워 봐요.”

    “외우라고요?”

    “지금 당장. 외워서 다시 해 봅시다.”

    “예. 감독님.”

    삼 분 후, 대사를 다 외운 이락이 연기를 시작했다.

    “이런 곳인 줄 말 안 했잖아. 위험수당까지 두 배로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이번에는 아까보다 꽤 듣기 좋았다.

    하지만 대사만 그럴듯하지 표정 연기가 엉망이었다.

    윤명현 감독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문했다.

    “이번에는 연기한다고 생각하고 표정까지 고려해서 쳐 봐요.”

    이락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고민하다 이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이런 곳인 줄 말 안 했잖아. 위험수당까지 두 배로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이락의 짜증 섞인 연기가 끝나자 촬영장이 일순 고요해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이락을 바라봤다.

    락 군. 뭡니까?

    방금 꽤 잘했는데요?

    윤명현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원 대표님.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목소리 듣고 괜찮겠다 싶었는데 역시 제 예상이 맞았네요. 처음부터 연기 잘할 거란 거 알고 추천해 주신 거죠?”

    나는 그냥 촬영에 문제가 생길까 봐 끼어든 건데 졸지에 배우를 보는 안목이 대단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면 된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감독과 스태프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윤명현은 이락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현장에서 이락의 대사를 추가하고 설정을 다 바꿔 버렸다.

    나와 서이렌은 촬영장에 앉아 분장하러 간 이락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대표님. MBS 가셔야 한다면서요. 안 가세요?”

    “전화했어요. 내일로 회의를 미뤘습니다.”

    내가 이락을 촬영장에 들이민 꼴이니 어떻게 연기할지, 아무 문제가 없을지 확인하고 가야 했다.

    “대표님. 물 좀 주세요.”

    “여기 있어요.”

    내가 서이렌에게 물병을 건네주는데 그녀가 슬쩍 내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온도 측정.”

    “뭐라고요?”

    “체온이 좀 낮은 거 같네요. 홍삼을 먹여야 하나?”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촬영장은 분주했지만, 다행히 우리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한동안 뭐라고 안 했더니 서이렌 씨 간이 자꾸 배 밖으로 나오는 거 같습니다.”

    “이제야 알았어요.”

    “뭘요?”

    “사람들이 이래서 사내 연애를 하는 거구나. 스릴 있고 좋네요.”

    참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우리가 연애하고 있나요?”

    “짝사랑도 연애의 일종이죠. 대표님 지금 짝사랑은 무시하는 겁니까?”

    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그런데 서이렌 씨 그거 알아요? 첫사랑은 안 이뤄진대요.”

    “진짜요?”

    “예. 빈 팀장님께 물어보세요. 그렇다고 할걸요.”

    “와. 다행이네요. 난 두 번째 사랑인데.”

    서이렌은 전혀 타격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었다.

    “두 번째라고요? 그럼, 첫 번째가 따로 있다는 겁니까?”

    이게 뭐라고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그 물 안 마실 거면 나 줘요.”

    “예. 드세요.”

    나는 서이렌의 손에 들린 물병을 채 갔다.

    내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데 서이렌이 내 옆에 붙어서 속삭였다.

    “첫사랑은 마네킹일 때 이미 했어요. 상대는 이십 년 전의 대표님이고요.”

    나도 모르게 마시는 물을 공중에 뿜었다.

    “컥. 컥.”

    내가 사레가 들리자 서이렌이 놀라서 내 등을 두들겨 줬다.

    “놀리지도 못하겠네. 괜찮아요? 대표님?”

    나는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와 멀리 떨어졌다.

    “그만 해요. 나 숨넘어갈 것 같아요.”

    “미안해요. 대표님. 오늘의 사내 연애는 여기서 끝.”

    서이렌은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날렸다.

    그때 의상을 갈아입은 구영진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촬영장에 나타났다.

    “하하. 나 알코올 중독자에 수전증 온 기술자같이 보이나?”

    그는 팔에 찬 깁스를 의상으로 숨기고 있었는데 살짝 보이는 손이 떨리는 것이 진짜 알코올 중독자처럼 보였다.

    구영진 뒤로 의상과 분장을 마친 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락은 더러운 군화에 야상을 입고 있었고 앞머리가 길게 내려와 눈을 가리고 있었다.

    빈선예가 즉석에서 앞머리를 만든 것이다.

    눈을 가려 놓으니 내가 아는 이락이 아닌 것만 같았다.

    서이렌이 이락에게 자신의 의자를 내어 주며 말했다.

    “이제 배우님이니까 여기에 앉아.”

    “어휴. 아닙니다. 제가 무슨 배우인가요. 저는 그냥 땜빵이죠. 오늘만 출연하는 걸 텐데요.”

    “글쎄. 아닐 거 같은데.”

    “예?”

    “내기해 볼래? 난 감독님이 락이 너 계속 출연시킨다에 한 표.”

    서이렌이 손가락을 들자 빈선예가 서이렌의 손을 잡았다.

    “나도 한 표.”

    서이렌과 빈선예가 동시에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들이 눈빛을 받으며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한 표요.”

    * * *

    “이런 곳인 줄 말 안 했잖아. 위험수당까지 두 배로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둬.”

    기술자가 케이를 보며 한소리를 했다.

    “거참. 돈 욕심은 어지간히 많으시네. 그거 모아서 치료 센터에라도 들어가시려고?”

    “내 앞에서 빌빌대던 놈이 다 컸네?”

    “원래도 아저씨보다 컸는데? 잔말 말고 빨리 자물쇠나 열어요. 한 시간 후에 놈이 돌아오니까.”

    기술자가 꼬마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했다.

    이락이 분한 꼬마가 재빨리 자물쇠 앞으로 달려갔다.

    “이젠 본인이 안 하고 꼬맹이를 시키네.”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리?”

    기술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한쪽 손을 가늘게 떨었다.

    어느새 자물쇠를 완전히 분해한 꼬마가 뒤로 비켜서며 말했다.

    “다 했습니다.”

    케이는 변변한 도구 하나 없이 자물쇠를 깔끔히 분해해 낸 꼬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청출어람이라더니. 스승보다 제자가 낫네.”

    “뭔 소리야.”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내가 이래서 먹물 먹은 놈들이랑은 상종을 안 해요.”

    케이는 궁시렁거리는 기술자를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의자에 묶여 있어야 할 최한나가 사슬에 결박당한 몸으로 문 바로 앞까지 기어와 있었다.

    “실험실의 에이스께서 고작 큐한테 잡혀?”

    최한나는 멍이 들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늦었네. 네가 너무 늦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잖아.”

    엉망인 얼굴로 최한나가 웃자 케이가 주저앉아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미쳤어? 전 국민이 다 보는 인터뷰에서 암호를 유출하면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너와 나만 사용하는 암호잖아. 그래서 네가 이렇게 나를 찾아왔고 말이야.”

    “예나 지금이나 막 나가는 건 여전하네.”

    병원에서 탈출한 최한나는 곧바로 방송국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생방송 인터뷰에서 최한나는 앞으로 도피하려고 하는 곳에 대해 암호로 신호를 보냈고 그걸 들은 케이가 그녀를 찾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최한나는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기술자와 꼬마를 발견했다.

    “손님이 계셨네.”

    케이는 최한나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 냈다.

    “가자. 놈들이 올 거야.”

    최한나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케이의 손을 밀쳐 냈다.

    “뭐 하는 거야?”

    “다행이야. 그 자식이 죽는 걸 나만 보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구경꾼이 생겼잖아.”

    최한나가 웃으며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피가 묻은 입술로 웃는 그녀는 마치 죽음의 천사 같았다.

    “컷. 좋았어!”

    윤명현 감독의 신이 난 컷 사인이 촬영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 * *

    촬영을 마치고 스타탄생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내일 찍을 대본의 수정고가 팩스로 도착해 있었다.

    수정고에는 큐를 죽이고 탈출하는 최한나와 케이를 돕는 조력자로 기술자와 꼬마가 추가되어 있었다.

    대본을 본 서이렌이 이락을 보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이락은 자신이 계속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에 놀란 듯싶었다.

    “빈 팀장님. 전 락 군이랑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이렌 씨와 함께 먼저 들어가실래요?”

    “혹시 계약서 다시 쓰시려는 겁니까?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배우 계약서로 말이죠.”

    “어서 가 봐요. 내일도 아침부터 촬영이잖아요.”

    그들이 나가자 사무실이 고요해졌다.

    “앉아요. 락 군.”

    “예. 대표님.”

    이락이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커피 마실래요?”

    “아뇨. 전 괜찮습니다. 밤늦게는 마시지 않으려고요.”

    “잘 생각했어요. 나도 잘 밤엔 카페인은 피하고 있어요.”

    나는 이락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얼굴을 뜯어봤다.

    처음 봤을 땐 아이돌같이 생겨서 귀엽다고 느꼈는데 고새 자란 이락의 얼굴은 어느새 남자다움이 느껴졌다.

    “윤명현 감독님이 방금 전화하셨는데 락 군의 눈빛이 마음에 드신대요.”

    “제 눈빛이요?”

    “감독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아까 앞머리 때문에 눈이 안 보였을 텐데.”

    “찰나의 순간에 눈이 드러났는데 그때 보여 준 눈빛이 마음에 드셨대요. 윤 감독님이 우리가 떠나자마자 시나리오를 고쳐서 보내신 걸 보면 얼마나 락 군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 것 같아요.”

    이락은 이 상황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워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락 군은 배우를 하면 좋을 거 같아요. 지금까지 그걸 몰라본 내가 바보예요.”

    “아닙니다. 대표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래서 좋은 회사를 소개해 주고 싶은데요.”

    “회사요?”

    “예. 락 군이 배우로 커 나갈 수 있는 지원을 해 줄 수 있는 회사요.”

    “왜죠? 스타탄생에서는 안 되나요?”

    이락은 말을 하고도 아차 싶었다.

    자신이 배우가 된다면 서이렌의 로드매니저는 누가 한단 말인가?

    또 아픈 대표님은 누가 옆에서 지킨단 말인가?

    마음을 굳힌 이락이 입을 열었다.

    “저는 배우 안 합니다.”

    “나비는 촬영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안 한다고 하면 윤 감독님이 쫓아오실 거예요.”

    “그럼, 이 작품만 할게요.”

    “왜 그런지 물어도 될까요?”

    “그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고민에 빠진 이락이 변명을 생각해 냈다.

    “제가 배우가 돼서 텔레비전에 나오면 보스가 찾아올지도 몰라요. 그래서 안 됩니다.”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난 락 군이 배우를 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우리 지난번에 락 군 어머니 찾는 일 때문에 경찰서에 갔던 거 기억해요?”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이락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생각하기엔 배우가 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락 군의 어머니를 찾는 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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