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6화 (67/261)
  • #66화. 레이디 버터플라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서이렌과 윤이슬을 보며 뉴액션의 스턴트맨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슬이도 괴물인데 서이렌은 더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기하자고 할 때 할걸.”

    “와. 하마터면 돈 나갈 뻔했네. 그런데 뭔 배우가 저렇게 액션을 잘해?”

    “내 말이. 더 가르칠 게 없다고. 일주일 동안 스트레칭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웬일이냐. 이슬이랑 서이렌이 에이스야. 저 둘을 누가 이겨?”

    “아니 저렇게 잘하면 성격이 모나거나 얼굴이 좀 별로거나 피지컬이 딸리거나 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다 잘하는데?”

    “그러게, 말이다. 신이 실수했어. 서이렌 만들 때 실수로 재능을 너무 많이 줬다가 나중에 ‘실수였네.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다 때려 박자.’ 이렇게 된 거 아니냐고.”

    액션 스쿨 식구들의 주접을 뒤에서 듣고 있던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와 이락은 처음에는 하는 일 없이 서이렌의 훈련을 구경이나 하는 것이 조금 쑥스러웠는데 이제는 아니다.

    서이렌이 점차 에이스로 변모하는 모습과 그것을 좋게 바라보며 주접을 떠는 액션 스쿨 식구들 보는 것이 꽤 즐거웠다.

    그때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방금 뽑은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넸다.

    “김도진 배우님.”

    “그냥 김 형이라고 불러요. 난 그 배우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더라고요.”

    김도진이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향해 웃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형님.”

    김도진은 내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서이렌의 연습을 함께 지켜봤다.

    “원 대표님은 좋으시겠어요.”

    “서이렌 씨 때문에요?”

    “저렇게 다 잘하는 배우는 정말 처음 봅니다.”

    이런 경우에는 빈말로도 아니라고 겸양을 떨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저도 서이렌 씨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비가 대박 날 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서이렌 씨 때문일 거 같거든요.”

    “천만 영화 배우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아닙니다. 제가 이래 봬도 감이 좋아요. 한번 믿어 보세요.”

    “예. 믿겠습니다.”

    * * *

    한 달간의 액션 스쿨 연습이 끝나고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나비의 촬영은 순조로웠다.

    오늘 촬영은 병실 장면을 찍는데, 서이렌이 처음으로 액션 장면을 선보이게 된다.

    촬영장에는 발레리나 김윤서 선생님뿐만 아니라 오늘 촬영이 없는 김도진도 와 있었다.

    서이렌이 분한 최한나는 세계적인 발레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귀국해 축하 공연을 펼치게 된다.

    그런데 공연하던 중, 극장에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떨어지는 조명을 피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최한나는 머리를 다치고 병원에 이송된다.

    병원에서 깨어난 최한나는 생소한 기억을 떠올리고 놀란다.

    어린 시절을 보육원에서 보냈던 최한나는 일곱 살에 입양을 갔고 그곳에서 발레를 배운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발레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최한나는 기적적으로 털끝도 다치지 않고 살아난다.

    열일곱의 최한나는 그날 이후, 충격으로 어릴 때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다.

    그런데 어제의 폭탄 테러로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기적적으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해 낸 최한나는 당황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최한나는 없었다.

    최한나를 입양한 부모님도 진짜가 아니었다.

    환자복을 입은 최한나가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그녀는 콩쿠르에서 우승한 발레리나 최한나가 아니라 코드명 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실험체였다.

    그때 최한나의 병실로 간호사가 들어왔다.

    “최한나 환자님. 주사 맞을 시간입니다.”

    간호사는 화장실에 있던 최한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무슨 주사인가요?”

    “두통을 호소하셔서요. 담당의께서 진통제를 추가로 처방하셨습니다.”

    간호사는 능숙하게 주사기를 꺼내 투명한 약물을 채워 넣었다.

    최한나는 주사를 들이미는 간호사를 유심히 바라봤다.

    평소의 자신은 이렇게 주의력이 깊지 못한데 기억을 되찾은 후로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의심했다.

    최한나의 손이 주사를 들고 있는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

    “왜 그러세요?”

    “명찰.”

    “예?”

    “명찰 어디 있지?”

    순간 세상 다정해 보이던 간호사의 표정이 돌변했다.

    “내가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명찰이 없는 것도 몰랐네.”

    간호사는 최한나의 팔을 떨쳐 내고 반대 팔로 최한나를 벽에 밀쳤다.

    최한나의 손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이 빠지고 피가 흘러내렸다.

    “최한나라. 그게 네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 누구야? 누가 보냈어?”

    “글쎄. 누가 보냈을까?”

    “지금까지 날 찾지 않다가 왜 지금 나타난 거지?”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말이야. 숨으려면 철저하게 숨을 것이지. 신문이고 뉴스고 온 세상이 너를 알아보도록 유명해지다니. 역시 실험실의 최고 아웃풋다워. 제이(J).”

    “난 제이가 아니야. 난 최한나야.”

    “네 이름이 뭔진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넌 오늘 엑스(X) 손에 죽는다는 거지.”

    간호사가 허벅지에 찬 단도를 꺼내 들고 최한나를 그었다.

    최한나는 마치 발레 동작을 하듯 허리를 뒤로 완전히 젖히고 엑스의 공격을 막았다.

    최한나는 그녀의 손목에서 빠진 주사 줄을 낚아채 피가 묻은 날카로운 바늘을 붙잡았다.

    “그걸로 날 죽일 수 있겠어?”

    간호사는 반대편에 찬 무기까지 꺼내 양손에 시퍼런 날이 선 칼을 들고 있었다.

    “내가 실험실의 최고 아웃풋이라고 했지?”

    “거들먹거리지 마.”

    “그런데 그거 알아? 발레리나는 온몸이 무기야.”

    최한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듯 가볍게 공중을 날아오른 최한나의 손에서 주삿바늘이 떠났다.

    엑스가 막아 보려 했지만, 그녀의 왼쪽 손목에 바늘이 깊숙이 박혔다.

    “으악!”

    그때 엑스는 발목이 따끔함을 느꼈다.

    어느새 반대편에 내려앉은 최한나가 엑스가 떨어뜨린 주사기를 발가락 사이에 꽂고 다리를 일자로 쭉 뻗어서 그걸 엑스의 발목에 꽂아 넣은 것이다.

    “으. 헉.”

    엑스의 눈이 돌아가고 입에서 거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엑스를 바라보는 최한나의 눈빛에 자비란 보이지 않았다.

    “컷! 좋았어. 아주 좋아요.”

    윤명현 감독의 기분 좋은 컷 사인이 떨어졌다.

    구경하던 김윤서가 뛰어나와 서이렌에게 박수를 보냈다.

    “완벽해요. 완벽한 다리 찢기였어요. 턴도 환상이었고요.”

    마침 첫 촬영을 위해 그곳에 도착한 김도진이 서이렌의 촬영 장면을 보고 헛웃음을 삼켰다.

    곁에 있는 김도진의 로드매니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형님. 서이렌 씨 대단한데요.”

    “무슨 로봇처럼 설계된 액션 장면을 NG 한번 없이 칼같이 해내네. 나 긴장해야 하는 거냐? 데뷔한 지 일 년밖에 안 된 신인보다는 잘해야 할 거 아냐?”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형님도 잘하실 겁니다. 연기며 액션이며 다 되시잖아요.”

    김도진은 대본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했다.

    “선배가 돼서 후배 연기자한테 끌려갈 수는 없지. 나 촬영 없을 때 연습할 거니까 장소 좀 알아봐 줘.”

    김도진의 로드매니저는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배우님. 그렇게 할게요.”

    * * *

    나비 촬영은 어느새 한 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두 여자 때문에 바쁘게 지냈던 탓에 오랜만에 촬영장에 방문했다.

    오늘 촬영은 폐공장에서 진행된다.

    조직에서 보낸 큐(Q)를 피해 도망치던 최한나는 결국 그들이 쳐 놓은 덫에 걸려 사로잡히고 만다.

    큐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설 감옥에 최한나를 가두고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을씨년스러운 폐공장을 보며 긴장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겠네요. 안전은 괜찮은 거죠?”

    내가 걱정하자 조감독이 나를 안심시켰다.

    “보기에만 위험해 보이는 거지 괜찮습니다.”

    “그래도 촬영 끝나면 바로 철거할 거라면서요?”

    “부지가 팔렸나 봐요. 싹 철거하고 아파트 단지가 생긴다나 봐요.”

    그때 촬영 준비를 마친 서이렌이 빈선예와 함께 걸어왔다.

    분장이었지만 서이렌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서이렌은 작중 큐에게 잡혀 이곳에 끌려오느라 온몸이 엉망이라는 설정이었다.

    옷은 다 찢어졌고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팔과 다리가 보였다.

    얼굴도 엉망이었고 목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이렌 씨 괜찮은 거예요?”

    “그럼요. 이거 너무 맛있어요. 딸기 맛이에요.”

    서이렌은 그녀의 입술에 묻은 피를 핥으며 웃으며 답했다.

    빈선예가 그런 서이렌을 보며 찡찡댔다.

    “이렌 씨. 그거 그만 좀 먹어요.”

    “미안해요. 빈 팀장님. 그런데 너무 맛있어서 멈출 수가 없어요.”

    그때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김도진 일행이 보였다.

    오늘 김도진이 분한 케이(K)가 큐의 감옥에 갇힌 최한나를 구하게 될 거다.

    나는 빈선예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당부했다.

    “그럼, 선예 씨가 촬영 좀 지켜봐 주세요. 오늘은 제가 MBS에 가야 해서 좀 바쁩니다.”

    “그럼, 락이 데리고 가세요.”

    “저 혼자 가도 돼요.”

    “운전하면 피곤하잖아요. 그냥 락이 데리고 가세요.”

    “괜찮다니까요. 락 군이 없으면 현장이 더 불편하죠.”

    나는 극구 사양하며 혼자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침 촬영장에 도착한 구영진 배우에게 윤명현 감독이 놀라서 뛰어갔다.

    구영진은 사십 대 후반의 베테랑 조연 연기자로 오늘 기술자 역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구영진의 팔이 이상했다.

    구영진은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형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윤 감독. 미안해. 오다가 사고가 났어.”

    “사고요?”

    “접촉 사고였는데 글쎄. 내 팔에 금이 갔어.”

    구영진의 말에 촬영장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해졌다.

    오늘 사설 감옥에 침입한 케이가 기술자의 도움으로 감옥 문을 여는 장면을 찍을 예정이다.

    구영진은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실제로 자물쇠를 해체하는 방법을 배웠다.

    핀으로 문을 여는 조잡한 기술이 아닌 거대한 자물쇠를 분해해야 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윤명현 감독은 깁스를 한 채 떠는 구영진의 손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하죠 감독님? 일정을 바꿀까요?”

    “무슨 소리야. 다음 주에 이 건물 철거라서 못 기다린다고.”

    윤명현 감독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고, 스태프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구영진은 미안해하며 윤명현에게 말했다.

    “윤 감독 미안해. 일이 이렇게 꼬여 버렸네. 지금이라도 나 가르쳐 주신 스승님 모셔 오면 어떨까? 손은 대역으로 가자고.”

    “대역 쓰는 거 싫어서 일부러 형님께 기술 배우라고 한 건데.”

    윤명현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부터 앞섰다.

    촬영장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이락이 내 옆에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표님. 저 자물쇠요. 저것 때문에 오늘 촬영 접는 건가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할지.”

    “저거 제가 열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예?”

    나는 놀라서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락 군이 할 수 있어요?”

    “저 자물쇠가 크기만 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런 건 눈 가리고도 해체할 수 있어요. 못 하면 뒈지게 맞았어요.”

    순간 내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락 군. 지금 자물쇠 열어 볼래요?”

    “지금이요?”

    나는 당황한 이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윤명현 감독에게 다가가 보니 예상보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구영진에게 자물쇠 여는 법을 가르쳤던 사람은 지금 회사 일 때문에 일본에 가서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윤명현 감독은 카메라 트릭으로 대충 자물쇠를 여는 척 찍자는 조감독의 의견에 난감해했다.

    “요즘 관객들 눈이 보통이 아니야. 절대 탈옥할 수 없다는 사설 감옥 만들어 놓고 대충 자물쇠 열고 탈출한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어?”

    나는 이락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락 군. 지금 저 자물쇠 분해해 봐요.”

    “예. 알겠습니다.”

    이락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감옥 문에 다가서더니 자물쇠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윤명현 감독과 조감독은 어떻게 할지 논의하느라 이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일 분이 채 지나지 않고 드디어 거대한 자물쇠가 열렸다.

    ‘철컥.’

    촬영장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소리에 윤명현 감독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자물쇠를 완전히 해체한 이락이 나를 돌아보며 씨익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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