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오디션장에 날아든 나비
“이렌 씨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서이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녀가 쓰러질 것 같아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때 빈선예가 내민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대표님.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요.”
“빈 팀장님. 대체 살을 얼마나 빼게 한 겁니까? 원래도 말랐었는데, 거기서 더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참나. 선생님이랑 상의해서 체중 조절한 거예요. 설마하니 그냥 쌩으로 굶어서 뺏을까요?”
“그런가요?”
빈선예는 걱정하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빨리 차에 타기나 해요. 락이 기다리겠네.”
“아. 예. 그래요.”
나는 빈선예가 들고 있는 서이렌의 의상 가방을 건네받고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락도 서이렌을 보고 안쓰러운 미소를 보냈다.
“이렌 님은 살이 더 빠지셨네요.”
빈선예는 서이렌만 바라보는 나와 이락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아이고.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이렌 씨가 지금 말라 보이는 거지 발레 의상 입으면 또 달라요. 코어 근육이 얼마나 늘었는데요.”
빈선예는 우리를 보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러기 힘들었다.
나는 서이렌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영상보고 발레 바로 마스터한 거 아닌가요? 왜 이렇게 살을 뺐어요?”
“원래 몸으론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느낌이요?”
“아무리 영상이랑 똑같이 춤을 춰도 나비처럼 날아갈 듯한 느낌이 안 살더라고요. 그래서 뺐어요.”
“괜찮아요? 어지럽지는 않고요?”
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서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늘 컨디션 최고예요. 오디션 보기 좋은 날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가는 동안 좀 쉬어요.”
서이렌이 이렇게 힘들게 준비했는데 오늘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건 몰라도 오디션만은 아무 문제 없이 잘 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스튜디오 엔진의 사옥에 마련한 오디션 장소에 배우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디션장에 먼저 도착한 감독과 스태프가 참가자들의 프로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가운데 앉은 윤명현 감독이 오디션 프로필을 옆자리의 박주오 대표에게 건넸다.
“형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에 오신 거요? 오디션 같은 거 관심 없어 하잖아.”
박주오 대표는 프로필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했다.
“난 준비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좋지. 아마추어는 싫거든.”
“형님. 그거 지금 나 들으라는 말인가?”
“꼬아서 듣지 마. 내 말대로 발레를 할 수 있는 배우가 없어서 오디션을 보는 거니까 이 작품은 좀 다르지.”
“알아주니 고맙네.”
“하지만 이건 알아 둬. 오디션을 봤는데도 원하는 배우를 못 찾으면 그냥 유플릭스 제안 받아들이는 거로 하자.”
유플릭스라는 말에 윤명현 감독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별로 안 땅기는데.”
“세계적인 거장도 유플릭스에서 영화를 내는데 네가 뭐라고 무시하냐?”
“내가 꼰대라서 그런다.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 본다는 게 아직은 어색하다고.”
“나보다 어린놈이 꼰대가 뭐냐? 암튼, 유플릭스 제안이 나쁘지 않아. 거저 해외 진출하는 거니까 잘 생각해 봐.”
“형님은 어째 오늘 오디션이 망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
“그럴 리가? 다만 큰 기대를 안 하는 거지. 그렇죠? 김윤서 선생님?”
박주오가 제일 끝자리에 앉은 김윤서라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십 대 초반의 김윤서라 불리는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박주오 대표 앞에 쌓인 프로필을 자신의 앞에 가져갔다.
“현재 프로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지원하지 않았다고요?”
“프로로 잘 활동하는 사람이 액션 영화에 출연하려고 들겠습니까? 발레를 전공했고 지금은 배우 지망생인 사람들만 추렸습니다.”
“그럼, 박주오 대표 말대로 큰 기대를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뭐, 윤 감독님의 기준이 낮다면 몰라도.”
김윤서라는 사람은 더는 볼 것이 없다며 프로필을 덮었다.
‘이 사람들이 오디션이 잘되길 바라는 거야? 망하길 바라는 거야?’
윤명현은 박주오 대표가 유플릭스와 계약하길 내심 바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초빙한 은퇴한 유명 발레리나까지 저렇게 말하니 기분이 언짢았다.
그때 오디션장으로 들어온 심종혁 팀장이 말했다.
“오디션 볼 참가자들 모두 도착했습니다. 한 명씩 들여보낼까요?”
“예. 그래요. 심 팀장.”
심종혁 팀장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박주오 감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심 팀장.”
“예. 대표님.”
“혹시 서이렌 씨도 오늘 왔나?”
“예. 늦지 않게 도착해서 지금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원세강 대표도 왔나?”
“예. 지금 대기실에서 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서이렌 씨 순서가 어떻게 되지?”
“가장 마지막에 끼워 넣은 거라서 끝 순서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제일 앞으로 당길까요?”
“아니. 그냥 원래 순서대로 하고. 마지막이니까 원세강 대표도 오디션 참관할 수 있게 해 줘요.”
* * *
대기실에서 서이렌과 내가 초조하게 우리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발레와 연기를 함께할 사람이 없었던지 오디션을 보는 사람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서이렌은 마지막까지 발레 영상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심종혁 팀장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이제 서이렌 씨 차례예요. 함께 가시죠.”
나는 영상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서이렌에게 말했다.
“이렌 씨. 이제 갑시다.”
서이렌은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내게 건넸다.
“걱정하지 않을게요. 이렌 씨는 잘 해낼 거니까.”
“그럼요. 제가 오디션을 끝내 버리고 올게요.”
서이렌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도 함께 가시죠. 서이렌 씨가 마지막이라서 참관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요?”
“예. 같이 가시죠. 대표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박주오가 내가 들어와도 된다고 했다고?
나는 박주오가 건넨 예상치 못한 친절의 의미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아닌 거 같았는데?
설마, 오디션장에서 나와 서이렌을 망신 주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한 회사의 대표인데 그렇게 유치하게 복수할 리가 없다.
나는 서이렌을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갑시다.”
* * *
김윤서는 서이렌의 프로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정점을 찍는군요.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들로만 골라 온 겁니까?”
김윤서는 앞서 오디션을 본 배우 지망생들을 평가하며 이미 큰 시련을 겪었다.
윤명현 감독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었다.
“발레면 발레. 연기면 연기.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없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윤 감독이 눈이 너무 높아서 그래. 삼 번은 그래도 연기를 꽤 하지 않았어?”
그때 김윤서가 치고 들어왔다.
“삼 번은 절대 안 돼요. 자세 흐트러진 거 못 보셨나요? 그 정도면 발레에서 손 뗀 지 오래됐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촬영 전까지 맹훈련하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요?”
“몸 보셨잖아요. 다시 몸을 만드는 데만 해도 육 개월은 걸릴 거라고요. 암튼. 내 생각은 그래요.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제대로 발레를 해 본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냥 대학 졸업장만 간신히 딴 수준이에요.”
김윤서의 일침에 오디션장에 정적이 흘렀다.
박주오는 이미 한국에서의 촬영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는지 김윤서를 보며 말했다.
“김윤서 선생님. 마지막 오디션 참가자한테는 제대로 쓴소리 좀 해 주시죠.”
김윤서는 박주오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난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하지 마세요.”
박주오는 까칠한 김윤서의 성격 때문에 힘들었지만, 마지막이 돼서야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서이렌이 김윤서의 독설을 들으면 원세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재미있겠어.’
박주오의 입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심종혁이 들어왔다.
심종혁은 싸늘해진 오디션장의 분위기를 보고 흠칫 놀랐다.
“마지막 참가자인 서이렌 씨입니다.”
심종혁은 나와 서이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이렌을 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디션장의 분위기를 읽은 나는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앞의 오디션이 망했나?
다들 뭐라도 씹은 표정이네.
나는 서이렌을 한가운데에 데려다주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난 뒤에서 볼게요.’
‘돈 주고도 못 보는 구경하시는 겁니다. 눈 크게 뜨고 잘 지켜보세요.’
나는 거칠 것이 없는 서이렌을 뒤로 하고 오디션장 끝으로 가서 섰다.
윤명현 감독은 서이렌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으나 막상 그녀의 실물을 보고 놀라서 안경을 고쳐 썼다.
박주오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서이렌이 역대급 신인이라며 방송가를 휩쓸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너무 과장됐다고 느꼈었는데 막상 보니 달랐다.
신인에게 볼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낀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윤서가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앉았다.
김윤서가 먼저 서이렌에게 입을 열었다.
“자세가 좋은데요? 외투 벗고 한 바퀴 돌아볼래요?”
“예. 알겠습니다.”
서이렌이 입고 있던 긴 재킷을 벗자 긴 치마에 새하얀 발레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윤서는 서이렌의 몸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앞서 봤던 발레 전공자들보다 발레를 하기에 더욱 적합한 몸이었다.
서이렌이 한 바퀴 빙 도는데, 자세도 꼿꼿하고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레를 전공한 게 아니라고 여기 쓰여 있는데. 그럼, 언제부터 발레를 한 거죠?”
서이렌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답했다.
“십오 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송했던 백조의 호수가 제가 본 첫 발레 공연입니다. 그때부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십오 년 전이면 서이렌 씨가 일곱 살 때잖아요.”
“그런 셈이죠.”
서이렌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긴 그때도 일곱 살은 아니었지.
나는 서이렌이 웃는 이유를 알았기에 웃음이 나왔다.
“기본 동작을 여기서 보여 줄 수 있나요?”
김윤서가 이렇게 살갑게 말하는 사람이었던가?
박주오 대표와 윤명현 감독은 한마디도 못 한 채 김윤서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서이렌은 김윤서의 요구대로 발레 기본 동작을 그 앞에서 선보였다.
발레를 잘 모르는 박주오와 윤명현이 보기에도 서이렌의 발레는 뭔가 있어 보였다.
단지 기본 동작을 선보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그제야 서이렌이 몸을 만든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서이렌이 다리를 뻗고 손을 뻗을 때마다 그녀의 팔과 다리 그리고 어깨와 등의 근육과 뼈가 도드라졌다.
몸도 발레 일부분인 것같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김윤서는 그대로 서이렌이 준비해 온 음악에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서이렌이 처음 봤다는 발레, 백조의 호수의 음악이 오디션장에 울려 퍼졌다.
서이렌은 당황하지 않고 자세를 잡은 그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시작했다.
서이렌이 발레를 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버렸다.
서이렌의 등 뒤에 백조의 날개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서이렌은 발레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일품이었다.
밤이 되어 인간이 된 오데트가 달빛 아래 춤을 추며 인간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오디션장이 어느새 발레 극장으로 바뀌고 쨍한 LED 조명은 극장의 핀 조명으로 바뀐 지 오래다.
서이렌의 짧은 백조의 노래가 끝나자 그녀가 자세를 잡고 서서 네 명의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위해 손이 올라갔다가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멈췄다.
큰일 날 뻔했다.
이대로 손뼉을 쳤다면 웬 망신인가?
하지만 그 정도로 서이렌의 무대가 좋았다.
오디션이 끝나면 정말 좋았다고 꼭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박주오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놀라 박주오 대표를 바라봤다.
박주오 대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서이렌 씨. 대단합니다. 나 방금 너무 감동했어요. 서이렌 씨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