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3화 (64/261)
  • #63화. 비공개 오디션

    서이렌과 빈선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걸까요?”

    “아닐걸요?”

    “두 작품 모두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직 결정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작품 모두 할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두 작품을 모두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 고르기엔 둘 다 흔치 않은 기회다.

    생각해 보니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두 여자가 하반기 작품이니 나비 촬영을 상반기에 마치면 가능하다.

    생각을 마친 내가 서이렌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요? 결정은 서이렌 씨 의견을 따를게요.”

    “둘 다 마음에 들어요. 하나는 버리고 하나만 선택하기엔 아까워요.”

    맞는 말이다.

    요즘 시장에 여주 원톱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는 투 톱이긴 하지만 여성 서사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작품이고 나비는 무려 여성이 주인공인 액션 첩보물이다.

    빈선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하고 싶다고 두 작품 모두 할 수 있는 건가요? 그쪽도 일정이라는 게 있을 텐데요?”

    “그런 걸 조율하라고 내가 있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능하게 해 볼게요.”

    빈선예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서이렌에게 물었다.

    “이렌 씨. 이렇게 달려도 되겠어요? 두 작품 사이에 휴식 시간도 없이 촬영 끝나자마자 다른 작품 촬영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해야죠. 전 열심히 해서 돈 벌어야 해요.”

    “예?”

    서이렌의 입에서 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빈선예의 눈이 커졌다.

    빈선예가 서이렌를 다그치며 물었다.

    “이렌 씨 돈 필요해요?”

    “예. 많이 필요해요. 빨리 부자 돼서 대표님 사야 하거든요.”

    “뭐라고요?”

    서이렌은 뻔뻔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본인이 비싼 남자라고요.”

    아무리 빈선예는 우리 관계를 모두 알고 있다지만, 빈선예 앞에서까지 저런 말을 꺼낼 줄을 몰랐다.

    서이렌이 저렇게 뻔뻔하게 구는데 나라고 못 할 건 없겠지.

    “이렌 씨가 아무리 벌어도 나는 못 삽니다.”

    “그래요? 내기해 볼까요?”

    서이렌의 도발에 빈선예의 두 눈이 커졌다.

    “워워. 이거 뭔가요? 두 분이 나 몰래 이러고 놀았어요?”

    “빈 팀장님 오해하지 마세요. 서이렌 씨 혼자 저러는 겁니다.”

    “뭡니까? 나라도 이렌 씨처럼 대표님 놀리고 싶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말은 그렇게 차갑게 하면서 얼굴은 왜 새빨개지는 건데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제가 그랬습니까?”

    나는 놀라서 내 볼을 양손으로 잡았다.

    얼굴이 시뻘게진 건 모르겠지만 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 나도 이제 뭔가 알 것 같은데요. 이렌 씨가 왜 대표님을 좋아하는지? 일할 땐 그렇게 프로면서 연애할 땐 쭈구리시네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황당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렌 씨. 우리 갈까요?”

    “예. 빈 팀장님.”

    서이렌과 빈선예가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냥 이렇게 가는 겁니까?”

    서이렌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제가 두 작품 모두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 주세요.”

    “이렌 씨 말 들으셨죠? 힘내세요.”

    두 여자가 쌍으로 나를 놀리며 떠났다.

    홀로 남은 나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뭐가 됐든 이젠 내가 나설 때다.

    서이렌이 원하는 대로 영화와 드라마 모두 성사시켜야 한다.

    * * *

    나비를 제작하는 스튜디오 엔진의 입구에 들어선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렇게 또 엮이는구나.

    나는 지난날 우연미를 위해 엔진의 대표인 박주오를 들이박은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닥 일을 하려면 누구와도 척지지 않고 잘 지내야 한다는 내 철칙이 얼마 전에 깨졌다.

    그런데 우연미와의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렇게 엔진과 엮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 배우가 하고 싶다는데 시켜 줘야겠지.

    나는 당당하게 스튜디오 엔진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엔진은 드라마 사업부와 영화 사업부가 따로 있다.

    엔진 소속인 윤명현 감독의 사무실은 대표실 바로 아래층에 있다고 들었다.

    나는 드라마 사업부를 지나 곧바로 영화 사업부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서자 나를 알아보는 엔진 직원이 몇 명 보였다.

    “원 대표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심 팀장님.”

    심종혁 팀장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

    “윤명현 감독님 새로 들어가는 작품 있으시죠?”

    “어?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이미 소문이 싹 퍼졌던데요? 다음 주에 배우 오디션을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 그거 비공개 오디션인데. 어디서 말이 새 나갔지?”

    심종혁 팀장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긴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서이렌 배우님이 그 오디션을 볼 수 있을까요?”

    “예? 서이렌 씨가 나비 오디션을 본다고요?”

    심종혁 팀장은 놀라서 큰소리로 외쳤고 영화 사업부의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봤다.

    “잠깐만 밖으로 나가시죠.”

    심종혁 팀장은 나를 로비 일 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원 대표님. 왜 비공개 오디션인지 알고 계세요?”

    “진짜 발레를 할 줄 아는 발레리나를 캐스팅하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발레를 배웠던 배우들은 따로 비공개 오디션을 치렀고 그 안에서 적임자를 찾지 못했죠. 맞나요?”

    “와. 그렇게 상세하게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오디션 봤던 배우들이 퍼트렸나? 본인들도 오디션 떨어진 게 소문나면 안 될 테니 입단속을 철저히 안 시켰는데. 이런 사달이 나네요.”

    “굳이 발레리나를 캐스팅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대본도 보셨나요?”

    “예. 봤습니다.”

    “그럼, 잘 아시겠네요. 발레리나로서 공연도 하고 액션도 발레 동작을 활용하는 게 많아요. 그것 때문에 올 초에 테스트 샷을 찍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왜 그렇죠?”

    “바스트는 배우 얼굴을 따고 춤출 때만 발레리나가 대역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너무 별로더라고요. 발레리나와 몸이 너무 달라요. 티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납니다.”

    “그 정도인가요?”

    “테스트 샷도 그걸 염려해서 찍은 거였어요. 그런데 우리 걱정이 딱 맞아떨어졌죠. 감독님이 그래서 바로 비공개 오디션으로 돌리고 발레리나들로만 오디션을 볼 거라고 하셨어요.”

    “발레리나 출신의 연기를 잘하는 배우. 찾을 수 있을까요?”

    “안 되면 못 하는 거죠. 윤 감독님이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실 겁니다.”

    천만 영화감독에 이름을 올린 윤명현 감독이 차기작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이렌이 주인공을 해야 한다.

    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심종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서이렌 씨가 적임자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심종혁 팀장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서이렌 씨가 발레를 배웠습니다.”

    “정말요?”

    지금쯤이면 서이렌이 집에서 발레 영상을 수십 편째 돌려 보고 있을 거다.

    한번 본 영상은 모두 완벽하게 카피가 가능한 사람이니 이미 발레도 프로급이 되어 있을 테지.

    “이런 질문 유치하긴 한데요. 그래도 물어볼게요. 서이렌 씨 발레 수준이 어때요? 대본 보셔서 알겠지만 어릴 때 몇 년 배운 걸로는 안 됩니다.”

    “글쎄요. 그 정도 수준이면 제가 여길 찾아오지 않았겠죠.”

    “그럼, 설마?”

    나는 심종혁 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이렌은 프로 발레리나 못지않은 실력을 갖췄습니다.”

    * * *

    스튜디오 엔진의 박주오 대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가 찾아왔었다고?”

    “예. 지금 영화 사업부 심종혁 팀장님과 따로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박주오 대표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비서에게 물었다.

    “원세강이 심종혁이랑 할 말이 뭐가 있다고? 지금, 심종혁이 발 담그고 있는 기획이 뭐지?”

    “윤명현 감독의 나비입니다.”

    나비라면 엔진에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작품이다.

    천만 감독 윤명현의 차기작이자 오랜만에 등장한 여주 원 톱 액션물이기 때문이다.

    “심종혁이 들어오면 올라오라고 해.”

    “예. 대표님.”

    비서가 나가자 박주오 대표의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원세강. 재미있는 놈이었네. 그렇게 안 봤는데 이렇게 낯짝이 두꺼웠던가? 어떻게 나를 들이받고 놓고 엔진 작품을 하려고 들지?”

    박주오 대표가 전화를 들어 비서에게 물었다.

    “나비 오디션이 언제지?”

    [셋째 주 수요일입니다. 대표님.]

    “오케이 알았어.”

    [지금 심종혁 팀장님 올라오셨습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심종혁이 들어왔다.

    심종혁은 머뭇거리며 박주오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대표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스타탄생 원세강이 찾아왔다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로비에서 차 마셨다면서요? 거기 드나드는 사람이 몇인데요. 나비 때문에 온 거랍니까?”

    “맞습니다. 서이렌 씨가 주연 배우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가 발레리나를 찾는 건 그쪽에서도 알고 있고요?”

    “예. 이미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런데도 오디션을 보겠다고 하던가요?”

    “원세강 대표님 말로는 서이렌 씨가 수준급 발레 솜씨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디 그 말에 한두 번 속나? 올 초에 오디션 봤던 배우들도 다 그 이야기 했어요. 잊었어요?”

    “하지만 원세강 대표가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분 평소 성격으로 봤을 때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LOK 일반 사원이었을 때 이야기고. 지금은 회사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예전이랑 같겠어요? 내가 보기엔 원세강 대표가 점잖다는 건 다 옛날 말입니다.”

    심종혁은 화난 듯 보이는 박주오 대표를 보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 오디션을 볼 수 없다고 통지할까요? 사실은 윤명현 감독님께 의견을 전하고 비공개 오디션에 참가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아뇨. 그럴 거까지는 없고. 보게 해요.”

    “예?”

    심종혁은 박주오 대표가 말과 행동이 다르자 갸웃거렸다.

    “윤명현 감독한테는 내가 말해 둘 테니 그냥 내려가 봐요. 스타탄생에 비공개 오디션 일정표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나가 봐요.”

    심종혁은 당황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바로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탄 심종혁은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서이렌이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겠네. 뭐, 오디션을 봐도 된다니 원 대표님은 좋아하시겠네.”

    심종혁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원세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오디션이 열리는 날 당일. 나와 이락이 차를 가지고 서이렌이 발레 연습을 하는 교습소로 찾아갔다.

    그동안 서이렌은 오디션 당일까지 맹연습 중이었고, 나는 두 여자를 성사시키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니고 있다.

    두 여자는 하반기 공개를 목표를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었다.

    주인공인 이란성 쌍둥이 역할도 정해졌다.

    서이렌과 합을 맞춰 본 적이 있는 이진아가 쌍둥이 언니 역을 하게 된다고 해서 벌써 기대 중이다.

    우리와 숲 엔터의 관계가 워낙 좋아서 촬영 일정도 우리 편의를 최대한 봐주겠다고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음 주에는 두 여자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캐스팅이 끝난 주·조연 배우들이 상견례를 가질 예정이다.

    교습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서이렌과 빈선예가 나오길 기다렸다.

    “대표님. 우리 이렌 님 오랜만에 보시는 거죠?”

    “열흘밖에 안 됐어요. 오래는 아니죠.”

    “그럼, 이렌 님 보고 놀라지 마세요.”

    “내가 놀랄 일이 있습니까?”

    나는 이락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두 여자가 내렸다.

    주차된 차를 향해 다가오는 빈선예 뒤에 서이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빈선예가 이락을 알아보며 손을 흔들며 왼쪽으로 틀자 그제야 서이렌의 모습이 보였다.

    “어?”

    나는 서이렌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모델같이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던 서이렌은 사라지고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발레리나의 몸을 한 서이렌이 눈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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