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2화 (63/261)
  • #62화. 두 개의 대본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병원이구나.

    순간 내 머릿속에 지난 일 년간의 모든 기억이 떠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자현과 결별 후, LOK를 나가서 스타탄생을 차린 일.

    또 꿈인가?

    아니면 예지몽?

    요즘 꿈을 너무 많이 꾼다.

    모든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하나만은 선명히 떠올랐다.

    서이렌.

    맞아. 서이렌이 내 배우였지.

    내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내 마지막 배우.

    나는 갑자기 몸에 긴장이 풀리고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때였다. 병실이 떠나갈 듯한 비명이 내 귀에 들렸다.

    “대표님!”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여전히 흰 천장과 병원 커튼이 보였지만 내 시야로 익숙한 사람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LOK에서 유일하게 나를 따라와 준 쿨한 그녀 빈선예.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로드매니저 이락.

    그리고 내 인생의 마지막 배우.

    나만의 마돈나 서이렌.

    나는 그제야 지난 일 년간의 기억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선예가 나를 보며 타박했다.

    “대표님. 뭐예요? 지금 웃는 거예요?”

    이락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찡찡댔다.

    “대표님이 쓰러지셔서 영어도 못 하는 제가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녔는지 아세요?”

    마지막으로 서이렌이 나를 바라보며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대표님 볼살이 빠지니까 더 잘생겨지셨네요. 쓰러진 보람이 있어요.”

    이 모든 게 다 현실이라는 생각에 처음에는 웃음이 나더니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나는 괜히 먼 곳을 바라보며 충혈된 내 눈을 감췄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

    갑자기 머릿속에 내 병이 떠올랐다.

    나는 당황한 눈빛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 나를 걱정하는 표정이었으나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공항에서 쓰러졌었나요?”

    “예. 대표님이 공항 화장실에 쓰러져 있던 걸 락이가 발견했어요. 우리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빈선예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과로라던데요?”

    “과로라고요?”

    “대체 대표님이 뭘 하셨길래 과로로 쓰러져요? 의상 준비한 건 나고, 여기 오느라 서류 준비하고 짐 나른 건 락이고, 패션쇼에 참석한 건 이렌 씨인데 말입니다.”

    빈선예는 나를 향해 원망 섞인 농담을 했다.

    들키지 않은 건가?

    나는 순간 안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약병을 떠올렸다.

    “혹시 내가 입고 있던 옷은 어디에 있어요?”

    “그 옷 더러워져서 락이가 세탁소에 보냈어요.”

    “그래요?”

    나는 조심스럽게 이락을 쳐다봤다.

    이락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 때문이죠? 대표님이 드시는 영양제.”

    나는 이락의 손에서 약병을 채 가며 얼버무렸다.

    “맞아요. 내 영양제.”

    빈선예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한소리를 했다.

    “와. 그렇게 영양제를 꼬박꼬박 챙겨 드시면서도 과로로 쓰러진 거예요? 안 되겠네. 대표님은 당분간은 일도 줄이고 외부 행사도 나가지 마세요.”

    “미안해요. 그나저나 내가 회사에 돌린 영양제는 다들 잘 챙겨 먹고들 있죠?”

    “말 돌리지 마세요.”

    빈선예가 오늘 날을 잡은 것 같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침상에서 일어섰다.

    “락 군. 나 퇴원해도 될 거 같은데. 혹시 서울 가는 비행기 표 알아봤어요?”

    이락이 내 앞으로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미리 준비했는지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편이 리스트업되어 있었다.

    “내일 오전 비행기가 제일 빠르네요. 그거 당장 예약해 줘요.”

    내가 가장 빠른 비행기 편을 예약해 달라고 하자 이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빈선예가 옆에서 신호를 보내자 이락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예. 그렇게 할게요.”

    “그럼, 다른 분들은 들어가서 쉬세요. 아니면 뉴욕 시내를 구경이라도 하든지요.”

    나는 좀 더 있겠다는 스타탄생 식구들을 억지로 돌려보냈다.

    혹시나 의사가 와서 내 병에 관해 떠들 수도 있지 않은가?

    모두 떠나고 병실에 홀로 남자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이제 점점 발작이 잦아질 텐데 어쩌지?

    내게 남은 시간은 이 년이지만,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 한해 서이렌을 확실한 톱스타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스타탄생도 더 굳건히 만들어야겠지.

    내가 떠나도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손에 든 약병을 꼭 쥐고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 * *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서이렌은 피치업 음료 CF를 찍었다.

    내가 쓰러져서 스케줄이 꼬였지만, 곽이석의 배려해 줘서 촬영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번 광고는 내가 꿈에서 봤던 그 광고 콘셉트로 찍는다.

    친구에게 온 반가운 편지를 받으러 달려가는 서이렌의 모습의 머리에 그려지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마 꿈에서 본 것보다 훨씬 히트하는 광고가 될 거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서이렌이 모델이니까.

    한국에 돌아와 보니 그새 더 많은 대본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서이렌과 빈선예 그리고 이락을 피치업 촬영장으로 보내고 스타탄생에 남아 들어온 대본을 확인했다.

    내 눈앞에 ‘두 여자’라는 MBS 창사 특집극 대본이 보였다.

    이걸 우리한테 보내다니.

    두 여자는 MBS가 야심 차게 준비하는 창사 특집극으로 이란성 쌍둥이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중편 시대극이다.

    스물두 살인 서이렌에게 주연인 스물여덟 살의 쌍둥이 여동생 역이 들어온 것이다.

    서이렌이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스물여덟 살 배역인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두 여자는 시청률도 작품성도 좋은 작품이다.

    서이렌이 이 작품을 하면 주연급으로 올라서는 것은 둘째고 입지도 크게 올릴 수 있다.

    나는 두 여자를 한쪽에 빼놓고 다른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내 눈에 특이한 제목의 시나리오가 보였다.

    [나비]

    나는 시나리오 앞장을 살폈다.

    감독 윤명현이라는 이름을 본 나는 그제야 나비에 관한 기억이 떠올랐다.

    ‘레이디 버터플라이’구나.

    이 작품은 내후년에 유플릭스라는 플랫폼에 론칭되는 영화다.

    캐스트와 촬영 스태프가 모두 외국인이고 감독만 한국인 윤명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맞아. 원래는 한국에서 영화를 하려다 엎어진 거였지.

    감독이 주연 배우를 반드시 발레리나로 고집해서 기획 단계에서 틀어졌다.

    지금 보니 이 시나리오는 영화사에서 스타탄생에 직접 보낸 것이 아니라 LOK 강진석 팀장이 내게 따로 보내 준 거다.

    시나리오 앞장에 포스트잇으로 강진석 팀장이 적은 글이 보였다.

    [시나리오 좋아.

    오랜만에 보는 여주 원톱물.

    강하나는 오디션 거절당하고 퇴짜 맞았는데 서이렌 씨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서이렌 씨 발레하지?

    아닌가? 한국무용인가?]

    강진석 팀장님이 의외로 우리 쪽에 일을 잘 물어다 준다.

    이럴 거면 LOK에서 나와서 스타탄생에서 함께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나는 언제 한번 강진석 팀장을 만나 진지하게 이직에 관해 말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기대앉은 나는 나비의 시나리오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 * *

    피치업 광고를 찍은 다음 날.

    서이렌과 빈선예가 스타탄생 사무실에 찾아왔다.

    “이렌 씨. 이번 CF 진짜 잘 빠졌어요.”

    “빈 팀장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CF 가편집본을 봤거든요. 어제 촬영장에서도 이렌 씨가 너무 상큼하게 나와서 대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더 잘 나온 거 같아요.”

    “가편집본이 벌써 나왔어요?”

    “곽이석이 내 절친이잖아요. 걔가 오늘 아침에 보내 줬어요. 이렌 씨도 볼래요?”

    “아뇨. 전 완성된 거 볼래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런데 빈 팀장님. 곽이석 본부장님이랑 진짜 친하신가 봐요.”

    “아휴. 친하긴요. 걔가 불쌍해서 만나 주는 거죠.”

    서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곽 본부장님이 불쌍해요? 능력 있는 재벌 3세가요?”

    빈선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걔가 고딩 때 얼마나 쭈구리 인생이었는데요? 말도 마요. 지금 세련돼 보이는 것도 다 내 손을 거쳐서 그렇게 환골탈태한 거라고요.”

    “어라?”

    “응? 왜요? 이렌 씨?”

    “빈 팀장님 혹시?”

    서이렌의 두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녀는 빈선예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빈 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어요?”

    “기억 안 나세요? 챙겨 주고 싶고 안아 주고 싶은 사람이 빈 팀장님 이상형이라고 하셨어요.”

    “아. 그랬구나. 난 몰랐네.”

    서이렌이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난 또. 괜히 걱정했네요. 빈 팀장님이 우리 대표님한테 반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미 마음을 준 분이 계시다니 다행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원 대표님께 왜 반해요? 그리고 이미 마음을 준 사람이라니요? 지금 그거 곽이석 말하는 거예요?”

    “대표님이 쓰러지고 빈 팀장님이 대표님 많이 챙기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오해할 뻔했는데 다행입니다.”

    “에이. 그건 정말 대표님이 안쓰러워서 그런 거죠.”

    “저도 알아요. 그냥 제가 농담한 거니까 이해해 줘요.”

    “아뇨. 다 이해해도 이건 이해 못 하겠는데요? 나랑 곽이석이랑 진짜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알았어요. 그만할게요.”

    서이렌이 웃음을 참으며 스타탄생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렌 씨. 진짜라니까요. 난 그런 쭈구리는 관심이 없어요.”

    “예. 예. 알겠습니다.”

    서이렌과 빈선예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 층으로 올라오자 소파에 앉아 있는 원세강이 보였다.

    원세강의 앞에는 대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대본을 본 서이렌과 빈선예는 그것이 차기작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 * *

    나는 서이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고르고 고른 대본입니다. 하나는 영화. 다른 하나는 드라마.”

    반대편 소파에 앉은 서이렌이 손을 뻗어 대본 두 개를 동시에 그녀의 앞으로 끌고 갔다.

    “천천히 읽어 봐요.”

    서이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자리의 빈선예가 끼어들었다.

    “대표님. 저도 봐도 되죠?”

    “그럼요. 빈 팀장님도 같이 봐 주시면 좋지요.”

    “알았어요. 내가 또 머글 감성이라서 흥행할 작품을 기가 막히게 고르잖아요.”

    빈선예도 냉큼 대본을 들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사무실에 시계 초침 소리만 가득 찼다.

    나는 대본을 읽는 서이렌의 눈을 바라봤다.

    서이렌의 눈동자가 별을 박은 듯 반짝였다.

    서이렌은 미소를 지으며 첫 번째 영화 시나리오를 내려놨고 두 번째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 대본은 앞장에 시놉시스가 들어 있고 뒤에 1화 원고가 들어 있었다.

    드라마 대본까지 모두 읽은 서이렌은 두 작품 모두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마침 대본 두 개를 모두 읽은 빈선예가 놀라 외쳤다.

    “이거 여주 원톱물에 액션 영화인데요?”

    “맞아요. 스파이로 키워졌던 발레리나가 조직에 복수하는 내용이죠.”

    “이거 완전 스토리가 할리우드 뺨치는데요? 감독도 천만 감독인 윤명현이잖아요.”

    “이거 한국에서 제작 못 하면 미국 자본으로 나올 작품입니다. 윤명현 감독님도 할리우드 러브 콜을 계속 받으시는 분이잖아요.”

    “이 드라마도 심상치 않은데요? 여기 MBS 창사 특집극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맞습니다. 작가님, 감독님. 모두 쟁쟁하신 분에 이건 여주 투 톱이죠. 상대방 여주는 아직 캐스팅 전이지만 그분이 제1롤이기 때문에 대단한 분이 캐스팅될 겁니다.”

    빈선예의 입이 딱하고 벌어졌다.

    “완전 대박인데요. 이걸 우리 이렌 씨가 한다니 생각만 해도 떨리는데요.”

    빈선예는 작품 생각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못 고르겠어요. 두 작품 모두 마음에 들어요.”

    “저도요. 대표님. 우리 이렌 씨가 다 하면 좋겠어요.”

    나는 두 개의 대본에 온통 시선이 빼앗긴 서이렌과 빈선예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을 동시에 쥐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두 작품 다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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