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1화 (62/261)
  • #61화. 들켜 버린 비밀

    “대표님이 왜 안 오시죠? 이제 곧 출발할 텐데.”

    서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실 쪽을 쳐다봤다.

    “아까 보니까 이자현 배우도 공항에 온 거 같던데. 혹시 그분들을 만난 거 아닐까요?”

    빈선예의 말에 서이렌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둘이 왜 만나죠?”

    “대표님이 LOK에서 일할 때 함께했던 배우가 이자현 배우님이잖아요. 오랜만에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겠죠. 제가 지금이라도 대표님께 전화할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늦으면 안 되잖아요. 출발 전에 미리미리 대기해야죠. 그렇지 않아요?”

    빈선예는 빨리 전화해 보라며 보채는 서이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당장 전화해 볼게요.”

    빈선예는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어라? 신호는 가는데 왜 전화를 안 받으시지?”

    통화가 사서함으로 넘어가자 빈선예는 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초조하게 지켜보던 서이렌이 빈선예 옆에 붙어서 물었다.

    “대표님이 전화 안 받으시는 걸까요? 이자현이랑 대화하느라?”

    “에이. 설마요.”

    “그럼, 왜 전화를 안 받으시죠? 빈 팀장님 전화인 거 알 텐데.”

    빈선예와 서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앉아 있던 이락이 소리쳤다.

    “어! 저기 이자현 배우님이신데요?”

    이자현이라는 말에 서이렌과 빈선예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이자현과 그녀의 스태프들은 이락의 외침에 눈살을 찌푸리며 서이렌 일행을 확인했다.

    서이렌이 작정한 얼굴로 빈선예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물어보고 올게요.”

    “예? 뭘 물어본다는 거예요?”

    빈선예가 말릴 틈도 없이 서이렌이 이자현과 스태프들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자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이렌을 보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배우님. 서이렌인데요? 배우님께 인사하러 오나 봐요. 그런데 원 팀장님은 안 보이시네요.”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로드매니저가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팀장님이 아니라 대표님.”

    “아. 맞다. 이제 대표님이시죠.”

    마침 다가온 서이렌이 이자현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이자현 배우님. 저는 서이렌이라고 합니다.”

    이자현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서이렌의 인사를 받았다.

    서이렌은 이자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우리 대표님 보셨어요?”

    “아뇨.”

    “정말 못 보셨어요?”

    “못 봤어요.”

    이자현은 싸늘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당황한 스태프의 얼굴을 보고 이자현의 말이 진짜라는 걸 느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서이렌이 떠나자 스타일리스트가 이자현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이 배우님. 왜 그렇게 차갑게 굴어요? 누가 보면 서로 원수지간인 줄 알겠어요.”

    “내가 그랬어?”

    “완전 영하 이백 도인 줄 알았어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고요.”

    “난 몰랐는데.”

    이자현은 황급히 선글라스를 쓰며 붉게 물든 얼굴을 가렸다.

    “파리행 비행기 떴네요. 갑시다.”

    이자현 일행이 공항 라운지에서 사라지고 한국행 비행기의 탑승 메시지가 떴다.

    스타탄생 식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원세강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도 전화 안 받으세요?”

    “안 받으세요. 지금 락이가 찾아보러 갔으니까 기다려 봐요. 이런 곳에서 미아가 될 분도 아닌데. 대체 어딜 가신 거지?”

    빈선예도 이제야 걱정이 되는지 핸드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빈선예의 핸드폰에 이락의 이름이 떴다.

    “락이에요.”

    빈선예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이락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빈 팀장님. 대표님이 쓰러지셨어요! 빨리 의사를 불러 주세요!]

    “락아. 그게 무슨 소리야? 대표님이 쓰러지시다니?”

    [지금 화장실인데 대표님이 쓰러져 계세요. 안색도 너무 안 좋고 숨을 제대로 못 쉰다고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서이렌은 당황한 이락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화장실 쪽으로 뛰어갔다.

    “락아. 내가 지금 곧바로 구급차 부를 테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

    [저도 떨려서 어디 못 가요. 빨리 불러 주세요. 우리 대표님 죽겠다고요.]

    빈선예는 전화를 끊고 119를 누르려다 멈칫했다.

    “아. 미치겠네. 여긴 119가 아니지.”

    빈선예는 마구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마침 이동하는 공항 직원을 불러 세웠다.

    * * *

    뉴욕 대학 병원의 응급 센터에 한국인 환자가 이송됐다.

    응급 센터의 당직을 보던 레지던트 삼 년 차 마이클은 침대에 누워 있는 원세강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 그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고 했는데 병원에 이송된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원세강의 몸을 살피던 마이클은 그의 재킷부터 벗겼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재킷과 셔츠가 다 젖어 있었다.

    셔츠까지 벗겨 내려는데 셔츠 안주머니에서 조그만 약병이 떨어져 응급실 바닥을 굴렀다.

    마이클은 약병을 주워 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약을 꺼내 살폈다.

    조그만 알약에 새겨진 번호를 확인한 마이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심장 섬유화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인가?’

    마이클은 약병을 내려놓고 원세강의 얼굴을 확인했다.

    고통이 점차 사라지는지 원세강의 표정이 점차 편안해졌다.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심하게 떨리던 그의 손도 이제는 잠잠해졌다.

    마이클의 옆자리에 서 있던 레지던트 일 년 차 제프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선배님. 어떻게 할까요? 어떤 검사부터 할까요?”

    “심장 MRI 준비해.”

    “무슨 병을 예상하시는데 심장 MRI를 찍으십니까?”

    마이클은 제프에게 손에 들고 있는 약병을 건넸다.

    제프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장 섬유화 증후군에 걸렸을 때 먹는 약이야.”

    “심장 섬유화요? 그거 희소병이잖아요?”

    “우선 검사는 해 보겠지만 심장 섬유화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안정을 취할 때까지 환자를 병실에서 쉬게 하는 거밖에는.”

    “그렇네요. 심장 섬유화 증후군이라면 치료제가 없죠? 증상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약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증상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발작이 찾아온 걸 보면 아마 이삼 년도 남지 않았을 거야. 우선 MRI 먼저 찍어 보자.”

    “예. 지금 곧바로 준비할게요.”

    제프는 응급실 간이 침상에 있는 커튼을 젖혔다.

    그런데 커튼을 뒤에 놀란 얼굴의 동양인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꾸물대지 말고 빨리 가 봐. 시간 없어.”

    “아. 예. 지금 갑니다.”

    마이클은 침대로 달려드는 그들을 보며 환자의 보호자임을 직감했다.

    ‘이 사람들은 모르는 건가?’

    마이클이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서이렌이 침상에 누워 있는 원세강에게 달려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빈선예가 놀란 얼굴로 마이클에게 달려가 외쳤다.

    “방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치료제가 없다니요? 이삼 년밖에 안 남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고요?”

    “우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시죠. 아직 검사 결과가 안 나왔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 돼요? 어떻게 편하게 있어요? 빨리 말해 주세요. 우리 대표님이 불치병에라도 걸린 건가요?”

    “검사가 끝나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이클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병상을 빠져나갔다.

    빈선예는 떠나는 의사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락은 발을 동동 구르며 떨고 있었다.

    “빈 팀장님. 저한테도 설명해 주세요. 저는 아직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요.”

    눈칫밥을 평생 먹고 살아온 이락은 무슨 상황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원세강에게 큰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락아.”

    빈선예는 이락의 손을 꼭 잡았다.

    그때 간호사들이 들어와 원세강의 침대를 밀며 말했다.

    “보호자들은 나가 주세요. 검사실로 가야 합니다.”

    * * *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호텔을 예약한 빈선예와 이락이 방으로 들어왔다.

    “빈 팀장님. 우리 짐은 이미 한국 공항에 도착했겠네요.”

    “선아가 받아 주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당장 쓸 칫솔도 없네요. 제가 지금 나가서 사 올게요.”

    “됐어. 조금만 조금만 이러고 있자.”

    뉴욕에 있던 내내 들떠 있던 빈선예는 반나절 만에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이렌 님이 병실을 지키고 계시는데 이따 우리가 교대해야겠죠?”

    “걱정하지 마. 내가 열두 시에 교대하기로 했어.”

    빈선예는 아까 의사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말도 안 돼. 대표님이 불치병에 시한부라니.’

    빈선예는 이마를 부여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이락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뭐가? 뭘 이제 알 것 같다는 거야?”

    “대표님이 저 가르치실 때 항상 그러셨거든요.”

    “뭐라고 하셨는데?”

    “언제까지 대표님이 이렌 님을 따라다닐 수는 없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중요한 촬영이나 행사에는 대표님이 참석하시잖아요.

    하지만 스타탄생이 커질수록 대표님이 참석 못 하는 일이 더 많아질 거라고. 그때 믿을 사람은 저뿐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회사가 커지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뜻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제가 너무 바보……. 흑.”

    이락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빈선예는 이락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꼭 잡고 말했다.

    “락아. 울지 마. 네가 울면 원 대표님이 슬퍼하실 거야.”

    “빈 팀장님.”

    “원 대표님이 작년에 LOK 때려치우면서 스타탄생 세운 건 알지?”

    “예. 알아요.”

    “그때 LOK 직원들 돌아보면서 함께할 사람이 있냐고 하셨거든. 그런데 그때 손을 든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야.”

    “정말요?”

    “난 그때 LOK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이상했어. LOK에서 제일 인간다운 사람이 원 대표님인데 왜 사람들이 원 대표님을 안 따라갈까? 그게 궁금했거든.”

    “그러네요. 우리 대표님 정말 좋은 분이시잖아요.”

    “나중에 아직 LOK 다니는 선배님께 들었는데. 원 대표님이 이 바닥에서는 흔치 않은 타입이래.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이 다 책임지려는 타입이었대.”

    “맞아요. 우리 대표님은 욕을 먹어도 자신이 먹으려고 하시잖아요.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사람이 독하지 않으니까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배우 키우는 능력과 안목은 있지만,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회사가 잘될 리 없다고 여긴 거지. 이자현을 톱스타로 만든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팀장이었던 거 보면 뻔하잖아. 대표님은 LOK에서도 아웃사이더셨어.”

    “전혀 몰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대표님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을 걸고 일하는 거잖아. 가끔 보여 주던 저돌적인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가.”

    이락은 마지막 남은 생이라는 말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울지 마. 대표님도 안 우시는데 왜 네가 울어?”

    “죄송해요. 안 울게요.”

    이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을 훔쳤다.

    “암튼 내가 그때 대표님을 따라오길 잘한 것 같아. 대표님의 남은 여정을 함께 할 거야. 이제는 내가 우리 대표님 지킬 거야.”

    빈선예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빈 팀장님. 울지 마세요.”

    이락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 * *

    서이렌은 캄캄한 병실에 앉아 누워 있는 원세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다 알고 있었어요.”

    서이렌은 굵은 바늘이 꽂힌 원세강의 팔을 잡고 쓸어내렸다.

    수액 때문에 원세강의 손이 퉁퉁 부어 있었다.

    서이렌은 떨어지는 눈물을 닦고 원세강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때 날 구해 준 거 기억 못 한다고 했죠? 괜찮아요.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대표님은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의자에서 일어난 서이렌이 침대 옆에 둔 그녀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서 보석함을 꺼낸 서이렌이 함을 열었다.

    어둠이 내린 병실 안에 보라색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서이렌은 반으로 갈라진 세이렌의 심장을 꺼내 들고 원세강에게 다가왔다.

    “난 내가 어떻게 생명을 갖게 된 건지 몰라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

    원세강의 입을 벌린 서이렌은 그 안으로 세이렌의 심장을 밀어 넣었다.

    세이렌의 심장은 원세강의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빛을 내기 시작했다.

    원세강의 입에서 신비로운 보랏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빛이 사라지고 원세강의 입에 있던 세이렌의 심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이거예요. 세이렌의 심장이 당신의 아픈 심장을 치유해 주길 기도할게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낸 서이렌은 원세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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