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60화 (61/261)

#60화. 세이렌 심장

세이렌이다.

저 마네킹은 세이렌 마네킹이 확실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도 알아본 건지 그대로 멈춰서서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얀 필립이 의자에서 일어나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서이렌 씨.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으셨군요. 쇼장에서 입은 옷도 잘 어울렸지만 지금 이 의상도 어울리십니다. 반가워요. 나는 얀 필립입니다.”

서이렌은 그제야 마네킹에서 시선을 떼고 얀을 쳐다봤다.

얀 필립은 두근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까 패션쇼장에서 서이렌의 실물을 처음 봤을 때도 심장이 떨렸는데 지금 이렇게 환한 조명 아래서 그녀와 다시 마주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서이렌입니다. 초청장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멋진 쇼였어요. 감동했습니다.”

서이렌은 유창한 영어로 얀의 인사를 받았다.

얀은 서이렌의 목소리를 듣고 더욱 놀랐다.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어쩜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신가요? 이렌 씨 같은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얀은 마치 열성 팬처럼 서이렌의 앞에서 그녀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칭찬을 듣고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서이렌은 당연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 필립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뒤로 마크 핸슨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얀 필립과 달리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서이렌을 훑어봤다.

“얀. 저기 뒤에 서 계신 분은 보이지도 않나? 나 좀 소개해 주지 그래?”

마크의 말에 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이렌 뒤에 서 있는 나를 바라봤다.

“이렌 씨. 이분은 누구시죠?”

서이렌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를 끌어당겼다.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이분 덕입니다. 원세강 대표님이세요.”

“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얀 필립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원세강입니다.”

나는 얀과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이쪽은 마크 핸슨. 도나텔로의 부사장이자 나의 절친입니다.”

마크는 나와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서이렌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름다우시네요. 얀이 처음에 이렌 씨 이야기를 했을 때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프로디테가 살아 움직인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심지어 얀처럼 쉽게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말하는 건데 말입니다.”

“마크. 난 쉽게 사랑에 빠지지만, 아무에게나 그러지 않는다고.”

“그건 나도 인정하지.”

얀과 마크는 우리 둘을 세워 놓고 격이 없이 대화를 나눴다.

둘이 절친이라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서이렌은 두 사람이 떠들라고 놔두고 다시 세이렌 마네킹에 시선을 고정했다.

얀은 서이렌이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소장품입니다. 궁금하시면 소개해 드리죠.”

서이렌은 순순히 얀을 따라나섰고 나는 그들의 뒤를 쫓았다.

“다른 마네킹과는 다르죠? 이 마네킹은 보통의 마네킹이 아닙니다.”

“알아요. 장 루이가 만든 세이렌 마네킹이잖아요.”

“역시 패션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맞습니다. 장이 삼십일 년 전에 만든 그의 뮤즈 세이렌입니다.”

“팔이 없네요.”

서이렌은 한쪽 팔이 없는 마네킹에 손을 가져다 댔다.

“세이렌 마네킹은 그 당시 단 열 개만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 이것 하나뿐이죠. 이것도 옥션을 뒤져서 간신히 얻은 겁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마크가 끼어들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마네킹이 얀의 뮤즈였습니다. 죽은 마네킹과 사랑에 빠진 남자라. 섬뜩하지 않나요?”

마크는 농담이라며 꺼낸 말이지만 서이렌은 그 농담에 웃지 않았다.

“얀. 세이렌 마네킹은 정말 남아 있는 게 없나요?”

“없습니다. 여덟 개는 확실히 완전히 부서지고 폐기됐다는 게 확인됐고, 한 개는 실종상태긴 한데, 있다 해도 이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폐기됐을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세이렌의 심장 때문이죠.”

심장이란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서이렌의 가슴 안에서 반짝거리던 보라색 보석이 떠오른 것이다.

“장은 세이렌 마네킹을 만들 때 그들을 위한 심장도 함께 만들었어요.”

“어떤 심장인지 말해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지금 당장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얀은 내실로 들어가더니 보석함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보석함을 열어 서이렌에게 보였다.

보석함 속에는 영롱한 빛을 내는 보랏색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서이렌의 심장이다.

나는 그녀의 심장과 똑같은 보라색 보석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서이렌이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마네킹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신 건가요?”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세이렌 마네킹은 제 뮤즈입니다. 그녀의 심장을 가를 리가 없죠. 제가 옥션에서 샀을 때부터 이런 상태였습니다. 이제 왜 장의 마네킹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지 이유를 아시겠지요?”

“심장만 얻고 마네킹은 모두 폐기했겠군요.”

“맞습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예술품을 부숴 버리다니. 말도 안 되죠. 이 심장도 자세히 보시면 두 개로 쪼개졌습니다. 그동안 세이렌 마네킹이 겪었을 고초가 고스란히 느껴지더군요.”

서이렌은 고개를 돌려 심장을 잃어버린 세이렌 마네킹을 응시했다.

그녀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평온해 보였으나 속으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얀은 그 이후로도 서이렌에게 정중하게 대해 줬고 우리는 밤늦게까지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고 우리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시나요?”

“내일 오후 비행기예요.”

“그럼,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인가요?”

얀은 마치 헤어지는 연인처럼 슬픈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어차피 자네도 내일 아침에 파리로 떠나잖아.”

“일정을 연기할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럴 일은 없어.”

마크의 단호한 말에 얀은 풀이 죽은 얼굴로 서이렌을 돌아봤다.

서이렌은 자신의 열성 팬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대장을 계속 보내 주세요. 최대한 패션쇼에 참석해 보도록 할게요.”

“역시 이렌 씨는 천사시네요.”

우리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얀이 서이렌을 불러 세웠다.

그는 보석함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제 선물입니다. 받아 주세요.”

보석함을 본 서이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세요. 보석함 안에 들어 있는 보석은 죽은 보석입니다. 주인이 그걸 사용해야 의미가 있죠. 받아 주세요. 세이렌의 심장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보석함을 지긋이 바라보던 서이렌의 손이 움직였다.

나는 긴장하며 그녀가 무엇을 할지 지켜봤다.

보석함을 연 서이렌은 쪼개진 심장의 반만 가져갔다.

“저는 이것만 받을게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나머지 심장을 다시 마네킹에게 돌려주세요.”

“마네킹이요? 세이렌 마네킹을 말씀하시나요?”

“맞아요.”

얀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팔이 없는 마네킹에 시선을 돌렸다.

“부탁입니다.”

얀은 서이렌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얀.”

* * *

뉴욕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에서 대기 중이다.

한승준 포토그래퍼는 오늘 새벽 비행기로 먼저 떠났고 빈선예와 이락은 강행군에도 피곤하지 않은지 인터넷 반응을 모니터링하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빈 팀장님. 반응이 너무 좋아요. 어떤 게시글에도 악플이 없어요.”

“그 정도야?”

“젊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사이트 말고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다니는 커뮤니티에도 글이 올라왔거든요. 바둑 게시판 같은 곳이요. 그런 곳에서도 다들 칭찬에 찬양뿐이에요.”

“와. 미치겠다. 그 정도라니.”

“한복 입은 게 신의 한 수 같아요. 다들 국위선양 했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발 빠른 우리 이렌 님 팬들이 여우비에 나온 한복 사진을 인터넷에 풀었거든요. 양덕들이 그거 보고 한국의 미가 대단하다고 난리가 났어요. 빈 팀장님 진짜 대단하세요.”

“한복 아이디어는 내가 아니라 원 대표님 머리에서 나온 거야.”

빈선예가 나를 보며 옆구리를 찔렀다.

“대표님은 이렇게 터질 줄은 알았어요?”

“몰랐습니다.”

“에이. 얼굴 보니까 아닌 거 같은데요.”

“한국에서의 반응은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외국인들까지 좋아해 줄지는 몰랐어요.”

“대표님. 이거 우리 이렌 씨한테 호재죠?”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빈선예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좋은 일이죠. 고생하셨습니다. 빈 팀장님. 얀이 계속 초대장을 보낼 거라고 했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이건 진짜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요. 다음에는 뭘 입혀야 할지 벌써 고민되네요.”

나는 좋아하는 빈선예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빈 팀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뭔데요?”

“마크 핸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인가요?”

“도나텔로 부사장이잖아요.”

“그런 거 말고 그 사람 성격이나 평판 그런 거요.”

“나랑 친한 게 아니라서 성격은 모르겠고 패션계에선 유명 인사예요. 금수저로 도나텔로의 부사장직을 꿰찬 거라고 초반에는 욕먹었지만, 신인 디자이너인 얀을 발굴해서 수석 디자이너로 앉히는 파격 인사를 단행한 게 신의 한 수였거든요. 그런데 왜요?”

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크가 어젯밤 내내 우리 이렌 씨를 쳐다보는 눈빛이 수상해서요.”

그때 빈선예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서이렌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놀라 물었다.

“예? 어제 그랬다고요?”

“이렌 씨는 못 느꼈나요? 난 마크의 눈빛이 거슬려서 내내 불편했어요. 혹시 마크가 호색한 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얀은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서 다음 쇼도 기대되는데 마크도 계속 본다고 생각하니 좀 그래서요.”

빈선예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 대표님.”

“예. 빈 팀장님.”

“두 사람 연인이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얀 필립과 마크 핸슨이 연인 사이라고요.”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가요? 전혀 몰랐네요.”

“마크 눈빛이 이상했다고요? 당연히 그럴 만하죠. 얀의 뮤즈가 우리 이렌 씨라는데 연적이라도 보는 것처럼 대했나 보네요. 맞아요? 이렌 씨?”

“그냥 얀이 날 보고 웃을 때마다 눈빛을 쏘는 정도요?”

나는 빈선예와 서이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렌 씨도 알았어요?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거?”

“알았어요.”

“빈 팀장님이 말해 줬어요?”

“아뇨. 그냥 딱 보니까 알겠던데요?”

“그래요?”

갑자기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대표님은 연애 이쪽은 완전 젬병이네요. 눈치가 그렇게 없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어요? 혹시 연애해 보긴 했어요? 모태솔로 그런 건 아니죠?”

나는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뭐야. 진짠가? 왜 얼굴이 새빨개져서 도망치시는 건데요?”

나는 빈선예의 놀림을 뒤로하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라운지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복도 쪽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CF 일정이 어떻게 되지?”

“이틀은 CF를 찍고 장소를 바꿔서 이틀은 화보를 찍어요.”

“일정이 촉박하네.”

화장실로 들어가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멀리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자현과 그녀의 스태프를 발견했다.

이자현도 뉴욕에 왔구나.

그녀는 CF와 화보 촬영 때문에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나는 순간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이내 그들의 대화 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복도가 조용해졌다.

내가 왜 숨었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허탈하게 미소를 짓는데, 갑자기 심장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번의 발작이 있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안 돼. 지금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

나는 극심한 고통 속에 심장을 움켜쥔 채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