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9화 (60/261)

#59화. 그의 뮤즈

“마크. 저길 보라고. 내가 말했던 그분이야.”

얀이 서이렌을 가리키며 흥분했다.

마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얀이 자신의 뮤즈를 찾았다며 저렇게 호들갑을 떤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대체 누구한테 빠진 거지?”

그런데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던 마크의 두 눈이 커졌다.

얀이 서이렌을 가리키기도 전에 마크는 얀의 새로운 뮤즈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저 사람이야?”

“맞아. 세이렌. 나의 세이렌이야.”

“세이렌?”

“이름이 ‘Seo Iren’이래. 세이렌이랑 발음이 거의 같아.”

“이름은 예쁘네.”

“이름뿐이겠어. 저걸 좀 보라고. 회장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나의 뮤즈에게 쏠렸는데?”

얀의 말대로 패션쇼를 찾은 유명 인사의 시선이 하나같이 서이렌이 앉아 있는 프런트 로우 쪽으로 꽂혀 있었다.

서이렌은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포토제닉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모델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마네킹을 그 자리에 가져다 둔 것 같았다.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두 남자 사이로 스태프가 다가왔다.

“쇼 시작 십 분 전입니다.”

* * *

나와 빈선예는 맨 뒷줄에 앉아 쇼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한승준 포토그래퍼는 본인이 직접 구한 표를 가지고 반대편으로 갔고 나와 빈선예는 제일 구석진 이곳에 앉아 있다.

안타깝게도 이락의 표까지는 구하지 못해 지금 이락은 바깥에서 대기 중이다.

“대표님.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우리 이렌 씨만 보는거 같은데요?”

“저도 빈 팀장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죠? 제가 맞게 본 거죠? 역시 아름다움은 인종을 초월하네요. 우리 이렌 씨라면 전 세계 어디서도 통할 줄 알았어요.”

그때 내 핸드폰으로 이락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이락의 문자를 확인하던 내가 놀라서 빈선예에게 말했다.

“빈 팀장님. 이렌 씨 기사 사진이 벌써 떴다고 합니다.”

“이렇게나 빨리요? 한국은 지금 몇 시죠?”

“열세 시간 차이가 나니까 지금 아침 시간일 겁니다.”

빈선예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포털의 메인 화면 정중앙에 서이렌의 패션 위크 입성 소식이 떠 있었다.

작은 미리 보기 화면에서도 여신의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빈선예는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찍고 곧바로 보정까지 해서 한국으로 보낸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 속의 서이렌은 미의 여신이 현신한 것 같았다.

댓글이 사라져서 반응을 알 수 없지만, 기사의 ‘좋아요’ 수가 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빈 팀장님. 커뮤니티 반응이 대단한데요?”

“어디 커뮤니티요? 나도 좀 보여 줘 봐요.”

나는 보고 있던 핸드폰을 빈선예에게 건넸다.

유명 커뮤니티마다 서이렌 뉴욕 패션 위크 입성 기사 게시글이 떴다.

기사를 퍼 나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댓글이 벌써 백 개 이상 쌓여 있었다.

- 진짜 존예.

- 너무 예쁘다...♡♡♡

- 진짜 요즘 역대급 존예야ㅜㅜㅜㅜㅜㅜ

- 개존예ㅠㅠㅠㅠ

- 그저 존예.

- 진짜 존나 예쁨.

- 너무 예뻐ㅠㅠㅠㅠ어오유오유ㅠ

댓글 대부분이 울고 있었다.

- 서이렌 한복 입고 패션 위크 간 거 봐라. 존멋임.

- 이것들아. 이게 바로 한국이 만든 CG다.

- 와. 사람들이 이래서 국뽕을 좋아하는구나. 뽕 제대로 차네.

- 한복 미쳤네. 서이렌밖에 안 보이는데?

- 유명한 외국 패션 계정에 서이렌 사진 올라왔어. 반응 역대급임.

└유명한 사람이야?

└ㅈㄴ 유명해. 팔로워만 천만 명임.

└미친.

빈선예는 역대급으로 터진 반응에 좋아서 어찌할 줄 몰랐다.

“빈 팀장님 진정해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때 회장의 불이 꺼지고 무대로 조명이 쏟아졌다.

“이제 시작하나 봅니다.”

나는 손까지 떠는 빈선예의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왔다.

그때 음악이 흘러나오며 도나텔로 FW 시즌 패션쇼가 시작됐다.

* * *

패션쇼가 끝나고 도나텔로를 이끄는 수장인 얀 필립이 런웨이에 섰다.

쇼의 메인 모델과 함께 걸어 나온 얀은 회장에 찾아온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며 손 키스를 날렸다.

지금까지 삼십육 년이란 시간을 패션 알못으로 살아온 나였지만 오늘 이 패션쇼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다.

나는 패션쇼가 그저 신상 옷을 보여 주는 행사로 알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옷과 음악, 모델, 연출이 어우러진 하나의 완벽한 종합예술이었다.

쇼의 모든 연출이 옷을 살리기 위해 준비된 듯싶었다.

내 옆자리에서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손뼉을 치는 빈선예가 이해되기도 했다.

그런데 인사를 마치고 무대 안으로 들어가던 얀 필립이 갑자기 무대 앞쪽에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는데 그때 갑자기 얀의 모습이 사라졌다.

빈선예가 그걸 보고 놀라서 외쳤다.

“어머. 저게 뭐야?”

얀 필립이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서이렌의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춘 것이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대박. 얀 필립이 우리 이렌 씨 손에 입 맞췄어요.”

빈선예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처럼 좋아했다.

입을 맞춘 얀 필립이 일어서며 서이렌의 귀에 대고 뭔가 말하는 것이 보였다.

얀이 그렇게 사라지고 쇼가 완전히 끝나자 이제는 관객들 차례였다.

뒤에서 보니 관객들이 우르르 서이렌에게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길 어떻게 뚫고 갑니까? 애프터 파티 때도 계속 이럴 거 같은데요.”

“아 맞다. 애프터 파티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빈선예는 어떻게 하냐며 걱정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홍해가 갈라지듯이 군중이 반으로 쫙 갈라졌다.

군중 사이를 헤치고 서이렌이 우리가 서 있는 뒤쪽으로 걸어왔다.

주위에선 숨죽이며 그녀가 걷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빈 팀장님. 가요. 옷 갈아입어야죠.”

“이렌 씨.”

“애프터 파티 의상으로 갈아입어야 하잖아요. 가요. 빈 팀장님.”

“그래요. 갑시다.”

졸지에 우리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회장 밖으로 나갔다.

패션쇼장 안에 못 들어온 사람들도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알았는지 우리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헤치고 간신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서이렌은 외투로 챙겨온 코트로 얼굴을 가리고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와 피팅 룸으로 이동했다.

피팅 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락이 흥분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대표님. 팀장님. 지금 한국에서 난리가 났어요.”

나는 빈선예와 서이렌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이락과 대화를 나눴다.

“반응 어때요? 좋죠?”

이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 대박 났어요.”

“그 정도예요?”

“한복 입고 패션 위크 간 거에서 일 차로 터졌고요. 국위 선양했다고 다들 난리예요. 그리고 쇼 끝나고 그 디자이너가 이렌님께 무릎 꿇었잖아요. 그걸로 한 번 더 터졌어요.”

나는 흥분하는 이락을 보며 물을 한 잔 따라서 건넸다.

“천천히 말해요. 그러다 숨넘어가겠어요.”

“지금 제 숨이 넘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락은 모니터링했던 커뮤니티 반응에 관해 설명했다.

확실히 반응이 좋긴 한 것 같다.

패션쇼에 구경하러 가서 이런 반응이 터지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기에 신기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피팅 룸의 문이 열리며 옷을 갈아입은 서이렌이 빈선예와 함께 걸어 나왔다.

아까는 고전미가 물씬 느껴지는 한복이었다면 이제는 여신 미가 물씬 풍기는 이브닝드레스다.

마치 그리스 여신처럼 한쪽 어깨만 드러낸 새하얀 드레스 자락을 펼치며 나타난 서이렌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머리에는 아까와 달리 화관을 쓰고 있었다.

생화로 만든 화관은 오늘 아침에 빈선예가 손으로 엮어서 만든 화관이다.

빈선예는 서이렌의 어깨에 도나텔로에서 나온 빅 사이즈 재킷을 걸쳤다.

드레스와 재킷은 마치 한 벌처럼 잘 어울렸다.

“자 가요. 애프터 파티는 호텔 삼 층이에요. 이제 곧 시작할 테니 늦으면 안 돼요.”

우리는 간단한 짐만 챙겨 들고 피팅 룸을 빠져나왔다.

애프터 파티는 이락도 갈 수 있기에 우리 모두 깔끔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아까 같은 혼란을 피하고자 서이렌은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을 숨겼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탄 우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서이렌이 아까 패션쇼장부터 가지고 있던 도나텔로 클러치 백을 열더니 뭔가를 한 움큼 꺼냈다.

“이게 뭡니까?”

“패션쇼장에서 받은 거요.”

“쇼장에서요?”

나는 놀란 눈으로 두 손을 폈다.

서이렌은 내 손에 명함 수십 장을 쏟아 냈다.

그런데 명함에 찍힌 이름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았다.

뉴웨이브 영화사 대표?

이건 오스카 수상까지 한 감독 이름인데?

뉴욕 스타일 편집장 안나?

바보라도 이 명함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명함을 본 김승준 포토그래퍼가 한마디를 건넸다.

“서이렌 씨 이제 미국 진출하는 겁니까? 신인인데 이렇게 러브 콜을 많이 받다니 대단한데요.”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죽으면 서이렌이 미국 진출을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이 년을 한국 활동에 쐐기를 박고 이후에는 전 세계를 향해 활동하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서이렌의 모습을 내 눈으로 못 보는 것이 슬퍼진 것이다.

내가 씁쓸하게 웃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애프터 파티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고 생화로 치장한 화려한 파티장의 모습에 나와 이락은 기가 죽었다.

한승준 포토그래퍼는 이런 파티장에서 촬영을 많이 해 봐서 그런지 익숙해 보였고, 빈선예도 갤러리스 백화점에서 연말마다 여는 행사에 자주 갔던 터라 편안해 보였다.

서이렌은 원래도 긴장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라 평온한 얼굴로 애프터 파티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와 이락만 바보 같은 얼굴로 일행을 뒤쫓기 바빴다.

화려한 사람들의 모습에 기가 죽었던 나는 어느새 어깨를 쫙 펴고 있었다.

이제 이런 곳에 오고 싶어도 못 올 거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주눅이 들어 있는 이락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락 군. 우리가 누구랑 왔어요?”

“예?”

“우리 이렌 씨랑 같이 왔어요.”

“그렇죠.”

“다들 이렌 씨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거 보이죠? 우리도 일행이니까 어깨 좀 폅시다.”

“그게 말처럼 쉽나요?”

“왜 못 해요? 너넨 이렌 씨가 없지? 나는 이렌 씨랑 제일 친한데? 이런 느낌으로 해 보세요.”

“제가 제일 친하지는 않죠.”

“말이 그렇다는 거죠.”

“무슨 말씀인지 알았어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이락이 굽은 가슴을 활짝 폈다.

“잘했어요. 보기 좋네요.”

그때 서이렌에게 스태프가 다가왔다.

“안쪽 방에서 얀 필립이 서이렌 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우리가 일제히 움직이자 스태프가 제지했다.

“서이렌 씨만 찾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난감했다.

서이렌 혼자 보내기엔 좀 그렇지 않은가?

그때 서이렌이 내게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회사 대표님이세요. 이분이 함께 가지 않으면 저는 안 갑니다.”

스태프는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함께 가시죠.”

우리는 스태프가 이끄는 대로 안쪽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이렌이 걷는 와중 내게 말을 했다.

“보세요.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요. 이래도 내가 싫어요?”

“싫긴요. 이렌 씨 같은 대단한 스타가 내 배우인데 당연히 좋죠.”

“맨날 그렇게 말 돌리시네요. 딴소리하기 대마왕.”

“다른 사람들이 듣겠습니다. 좀 조용히 합시다.”

“어차피 여기에 우리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없잖아요. 대표님 좋아해요.”

“허.”

“좋아해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서이렌은 마치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좋아한다는 말을 쏟아 냈다.

한국인이 주위에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느새 우리는 파티장 제일 안쪽의 방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십시오.”

스태프가 사라지고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안쪽 의자에 앉아 있는 얀 필립이 보였다.

얀은 혼자가 아니라 마크 핸슨과 함께 있었다.

마크가 누군지 모르는 나는 방 안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또 누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그때 내 앞에서 걷고 있던 서이렌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렌 씨?”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데 서이렌의 앞에 서 있는 마네킹이 눈에 들어왔다.

디자이너가 있는 방에 마네킹이 있는 게 당연해 보였지만 그 마네킹은 특별했다.

삼십일 년 전, 전 세계에 단 열 개만 출시됐다는 마네킹 세이렌이 우리 눈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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