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8화 (59/261)
  • #58화. 패션 위크 데뷔

    나는 서이렌의 이름 석 자가 박힌 여권을 들여다보며 이락에게 물었다.

    “문제는 없겠죠?”

    “그거 만들어 주신 분이 대한민국 넘버원이에요. 제가 그분께 기술을 배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도 그쪽이랑 연락해요?”

    이락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그분과만 연락해요. 스승님은 저한테 진짜 잘해 주셨거든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문제없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락군 비자도 준비된 거 맞죠?”

    “진짜 저도 가는 겁니까?”

    “당연히 가야죠. 나 혼자서는 감당 못 해요. 빈 팀장님을 보세요. 벌써 준비한 캐리어만 세 개예요.”

    “그건 그렇죠.”

    다음 주에 우리는 패션 위크 참석을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빈선예는 어찌나 바쁘게 패션 위크를 준비하고 있는지 벌써 일주일째 코빼기도 볼 수가 없다.

    “빈 팀장님 정말 바쁘신 것 같아요. 누가 보면 빈 팀장님이 패션쇼에 서는 줄 알겠어요.”

    “제가 빈 팀장님께 부탁한 게 있어서 그럴 거예요.”

    “무슨 부탁을 하셨는데요?”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 * *

    일주일 뒤, 뉴욕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패션쇼가 열리는 미드타운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이십팔 인치 캐리어가 네 개에 나머지 자잘한 짐까지 모두 호텔 안에 들여놓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짐을 옮기느라 녹초가 된 이락이 내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진짜 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대체 이게 다 뭡니까?”

    “나도 모르겠네요. 남들이 보면 야반도주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이 캐리어 안에 집이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요? 한번 열어 볼까요?”

    “됐어요. 빈 팀장님께서 알면 큰일 납니다.”

    그때 잔뜩 들뜬 빈선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열어도 돼요.”

    쪼르르 달려온 빈선예가 제일 앞에 있는 캐리어의 자물쇠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이락은 빈선예의 말을 듣자마자 그 옆에 있는 캐리어로 달려가 자물쇠를 열었다.

    빈선예는 옆자리의 캐리어가 먼저 열린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뭐야? 락아. 이거 어떻게 열었어?”

    이락은 들고 있던 머리핀을 뒤로 숨기며 입을 닫았다.

    “스페어 키 주셨잖아요. 잊으셨어요?”

    나는 빈선예에게 받은 스페어 키를 몰래 이락에게 건넸다.

    이락은 그제야 당황한 얼굴을 풀고 빈선예를 향해 스페어 키를 흔들어 보였다.

    “뭐야. 난 또 자물쇠 부서진 줄 알았잖아.”

    빈선예는 오해를 풀고 캐리어 안에서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캐리어에서 나오는 족히 열 벌은 되어 보이는 의상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빈 팀장님. 우리 이렌 씨도 이번 패션쇼 무대에 서는 겁니까?”

    “아뇨. 우리 이렌 씨가 왜 무대에 서요? 아닌데요.”

    “그럼, 이 옷들은 대체 뭡니까?”

    “당연히 이렌 씨가 입을 옷이죠.”

    나는 호텔에 비치된 달력을 가리키며 말했다.

    “빈 팀장님 혹시 잊으셨을까 봐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뉴욕에 사흘 동안 있을 겁니다.”

    “알아요. 이게 이렌 씨가 사흘간 입을 옷이에요.”

    “네?”

    대충 봐도 옷이 열 벌은 넘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내가 당황해하자 빈선예가 가방 안에서 태블릿 PC를 꺼내 내게 보여 줬다.

    그 안에는 서이렌이 사흘 동안 입을 옷이 시간대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고요?”

    “그럼요.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이 다 모이는 큰 행사예요. 길거리만 걸어 다녀도 사진이 찍힌다고요. 패션쇼로 가는 길에 입을 옷, 패션쇼장에서 입을 옷, 패션쇼 끝나고 애프터 파티에 입을 옷, 마지막으로 공항 패션까지 다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나는 태블릿을 흔들며 자신감을 내비치는 빈선예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짐이 많았던 거군요. 난 또 야반도주라도 하는 줄 알았죠.”

    “참나. 대표님이 주문하셨던 게 제일 부피가 컸어요. 그 옷만 저 캐리어 하나에 들어갔다고요.

    빈선예는 제일 안쪽에 있는 캐리어를 열더니 그 안에서 흰 천으로 꼼꼼하게 쌓여 있는 옷을 꺼냈다.

    다른 옷들은 캐리어 하나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그 옷만은 캐리어 하나를 통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이게 대표님이 주문하셨던 메인 의상이에요. 패션쇼장에서 입을 의상이죠.”

    빈선예가 옷을 감싸고 있던 천을 벗겨 내자 눈부신 자태를 뽐내는 한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이락은 한복을 보고 놀라서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섰다.

    “와. 말도 안 나온다.”

    이락이 한복을 만지려고 하자 빈선예가 깜짝 놀라 이락의 손을 쳤다.

    “락아 안 돼. 만지지 마.”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나는 고혹적인 한복의 자태에 할 말을 잃었다.

    빈선예는 한복을 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거 만드느라 얼마가 고생했는데요.”

    “빈 팀장님이 직접 만드셨어요?”

    “그건 아니고요. 저희 할머니 소장품이에요. 무형 문화재이신 김형자 님의 한복이죠. 원본을 그대로 입을 순 없고 디자인을 조금 손봤어요. 작품을 손봐 주실 분 찾느라 애 좀 먹었어요.”

    빈선예는 한복에 수놓아진 자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새로 만들어서 붙인 자수예요. 어때요?”

    “너무 아름다워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빈 팀장님.”

    “한복 입고 가자고 의견 낸 건 대표님이셨어요. 난 진짜 놀랐어요. 어떻게 패션 위크에서 한복을 입을 생각을 하셨어요?”

    미래에 어떤 배우가 한복 입고 패션쇼에 갔다가 큰 이슈가 됐고, 내가 그걸 꿈에서 봤다고 하면 빈선예는 어떤 얼굴을 할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빈선예에게 말했다.

    “자, 빨리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난 이상하게 기내식은 먹은 것 같지 않더라고요.”

    * * *

    우리가 탄 차가 뉴욕 패션 위크가 열리는 미드타운의 모니핸역(Moynihan Station)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몰려든 군중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로변 사이를 두고 이쪽과 건너편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빈선예의 말대로 모델같이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를 런웨이 삼아 거닐고 있었고 카메라 기자들이 그걸 찍느라 혈안이었다.

    빈선예는 서이렌의 의상을 최종점검했다.

    서이렌은 빨간 모직 원피스에 머리에는 특이하게 생긴 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이렇게 입고 다니면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화장도 남달랐다.

    서이렌이 이 정도로 화장을 세게 한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화려함을 넘어 빛나는 보석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우리 이렌 씨 제대로 못 꾸며서 얼마나 화가 난 줄 알아요?”

    “화까지 나셨어요?”

    “보세요. 원래도 여신인데 작정하고 꾸미면 사람 같지 않잖아요.”

    인형같이 서 있던 서이렌이 빈선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가 사람이 아니긴 하죠.”

    빈선예는 그동안 말하지 못한 고충을 몽땅 털어놨다.

    “화장도 그래요. 내가 이런 스타일의 화장을 꼭 한번은 해 보고 싶었다고요. 이렌 씨가 이목구비가 화려하니까 너무 튀면 안 된다고 해서 맨날 가볍게 화장했잖아요.”

    “우리 빈 팀장님이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열변을 토하는 빈선예를 진정시켰다.

    그때 우리 앞에 차가 한 대 섰다.

    차 문이 열리고 반가운 사람이 얼굴을 보였다.

    “승준아.”

    “빈선예. 나 늦지 않았지?”

    “딱 맞춰서 왔어.”

    차에서 내린 사람은 한승준 포토그래퍼였다.

    서이렌의 패션 위크 사진을 찍기 위해 본업도 제쳐 두고 이곳 뉴욕까지 달려온 것이다.

    “오늘 반나절 때문에 일도 다 미뤄 놓고 달려온 거야?”

    “당연하지. 우리 이렌 씨가 패션 위크 데뷔하는 날인데 당연히 내가 와야지.”

    그때 빈선예와 대화를 하던 한승준의 눈이 커졌다.

    “헐. 이렌 씨.”

    뒤에 인형처럼 서 있는 서이렌을 보고 놀란 것이다.

    한승준은 인사할 겨를도 없이 들고 있던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이렌 씨.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평소에도 아름다우셨는데 오늘은 차마 저 같은 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시네요.”

    “야. 됐어. 그만하고 가자.”

    빈선예는 넋을 놓고 쳐다보는 한승준의 등을 떠밀었다.

    나와 이락은 패션 위크가 열리는 거리로 들어서자마자 서이렌과 거리를 유지하며 멀리 떨어졌다.

    행여 우리가 서이렌의 사진에 걸리기라도 할까 봐 염려된 것이다.

    서이렌이 거리를 거닐자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그녀의 걷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때 이락이 손을 들며 외쳤다.

    “조심하세요. 저기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이락의 말대로 카메라를 손에 든 외국인들이 서이렌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와 이락은 멀찌감치 서 있었지만, 카메라를 든 외국인들이 특유의 제스처를 취하며 감탄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표님. 다들 난리가 났는데요?”

    “그러게요. 빈 팀장님 말씀대로 이렌 씨가 작정하고 꾸미니까 눈이 부시긴 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빈 팀장님 의견대로 잡지 화보라도 많이 찍을 걸 그랬어요.”

    “우리 이렌님이 연달아 작품에 출연하셔서 일부러 화보 촬영을 자제하신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런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서요.”

    “패션 위크에 매해 참석하면 되겠네요. 저렇게 전 세계 사람들이 이렌님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들 테니 말입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서이렌의 길거리 런웨이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지체돼서야 끝이 났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탓에 움직일 수 없던 것이다.

    패션쇼가 열리는 건물 앞에 당도한 우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옆 건물에 이미 피팅 룸을 대여해 놨다.

    빨리 그곳으로 가서 오늘의 비장의 무기인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야 한다.

    나와 이락이 기다리고 있는 사이 빈선예와 서이렌 그리고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피팅 룸으로 갔다.

    우리는 초조하게 서이렌을 기다리며 패션쇼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대표님. 저 사람 유명한 사람이겠죠?”

    “저도 잘 모르지만 유명하지 않을까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아우라가 느껴지네요. 유명 인사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고 하더니 진짠가 보네요.”

    “우리 이렌 님도 그 유명 인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네요. 저 너무 떨립니다.”

    나는 괜스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살날이 이 년 정도 남았다.

    이번 봄이 지나면 내게 남은 봄은 한 번뿐이다.

    내가 다시 패션 위크에 올 기회가 한번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혹시나 하늘이 허락한다면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상념에 빠져 있는데 이락이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왔어요. 저기 이렌 님이 왔어요.”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 눈앞에 한복을 입은 서이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복 위에 도나텔로의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도나텔로의 클러치백을 들고 있었다.

    머리는 곱게 땋아 위로 올렸고 보석으로 치장한 반짝이는 크라운을 쓰고 있었다.

    한복에 크라운이라니.

    도저히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 * *

    패션쇼가 열리는 회장으로 들어온 서이렌은 우리와 헤어져 지정된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서이렌은 코트는 우리에게 넘기고 클러치 백 하나만 들고 자리로 갔다.

    그녀의 자리는 무려 무대 앞의 프런트 로우였다.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는 무대 앞, 프런트 로우를 지정석으로 받은 것이다.

    서이렌이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패션계 인사들이 서이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우. 지저스.”

    짧은 감탄사가 내 옆자리에서도 흘러나왔다.

    한편, 무대 뒤에서 쇼를 준비하던 도나텔로의 수석 디자이너 얀 필립은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조명과 무대 세팅.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됐다.

    얀의 뒤로 도나텔로의 부사장인 마크 핸슨이 다가왔다.

    “얀 이제 준비된 거 같은데.”

    “잠깐만. 무대 좀 확인할게.”

    얀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무대 곳곳을 확인하던 얀의 시선이 멈췄다.

    얀은 무대 앞에 빛을 내며 앉아 있는 서이렌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녀다! 그녀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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