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7화 (58/261)
  • #57화. 기레기의 귀환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우연미가 괜찮은지부터 살폈다.

    “작가님. 괜찮아요? 어디 가서 잠깐 쉴까요?”

    우연미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박호중 감독이랑 엔진이랑은 무슨 관계예요? 대표님은 뭔가 알고 있죠? 그래서 나 엔진이랑 계약 못 하게 말린 거죠?”

    우연미에게 박호중과의 만남은 트라우마로 남았나 보다.

    우연미는 박호중의 이름을 말하면서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이 친한 것 같아요. 아마 박호중 감독이 엔진과 계약하려는가 봅니다.”

    우연미는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작가님이 박호중 감독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어차피 계약이 깨졌으니 나랑 같이 일해요. 엔진처럼 파격적인 계약금은 못 드리지만, 최대한 업계 최고로 맞춰 드릴게요.”

    우연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엔진 대표를 그렇게 들이받고 나와도 되는 거예요?”

    “보셨잖아요. 그쪽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보내 주는 거. 괜찮아요. 작가님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나중에 불이익 같은 건 없겠죠? 내가 문제가 아니라 대표님이 걱정돼서요.”

    “다 생각하고 들이박은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별명이 돌부처라면서요. 그거 잘못 지은 거 아니에요? 무슨 돌부처가 이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하나 봅니다.”

    “변명도 참 이상하게 하시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계약하자고 할 때는 못 한다고 안 된다고 하시더니. 내가 다른 회사랑 계약할 거 같으니까 맘이 바뀐 거죠?”

    “맞아요. 막상 내 두 눈으로 보니 작가님 빼앗길까 봐 속에서 열불이 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엔진은 잊고 우리 이만 가요. 작가님이 괜찮아지면 그때 계약서 씁시다.”

    “다 잡은 물고기처럼 말씀하시네. 엔진 말고도 계약하자는 회사 많아요. 봐서 선택할래요.”

    우연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제는 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이동하는데, 앞에 기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뒤에 있는지 모르고 대화 중이었다.

    “보그는 작가 바뀐 게 신의 한 수였네. 그 이후에 시청률 엄청나게 올랐잖아. 다들 마네킹에 밀려서 폭삭 망했다고 했는데 이렇게 종방연을 호텔에서 열고. 역시 드라마는 마지막 장까지 까 봐야 안다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시청률만 높았지. 욕을 얼마나 먹었는데. 박호중 감독도 본인 커리어에 흠집 생길 거 같으니까 마네킹이랑 똑같이 자극적인 드라마로 만들어 버렸잖아. 실제로 시청률은 올랐어도 2030 시청률이 떨어져서 광고도 떨어져 다 나갔다고. 한류스타 김선우 쓰고도 그 정도면 사실 망한 거지.”

    “그런가? 그럼, 호텔에서 종방연 하는 게 조금 우습긴 하네.”

    “KBC야 상관없겠지. 시청률은 체면치레는 했고 해외판권이야 김선우 때문에 잘 팔렸고. 돈은 잘 벌었을 거야. 그러니까 호텔에서 종방연도 해 주는 거겠지.”

    “그나저나 몇 층이라고 했지?”

    “십 층 연회장. 빨리 가자고.”

    나와 우연미는 기자들이 먼저 가기를 기다렸다.

    기자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그제야 나는 우연미와 함께 다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이 층을 누르고 나는 우연미에게 말했다.

    “다 잊고 원래의 우 작가님으로 돌아오세요.”

    “원래의 내가 어떤데요?”

    나는 그날 중국집에서 만났던 우연미를 떠올렸다.

    박호중 감독 앞에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할 말 다 하던 우연미 말이다.

    “처음 보는 나한테 찾아와서 대본 봐 달라고 들이밀었던 당찬 우연미요.”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지하 이 층에 도착했다.

    나는 우연미에게 먼저 내리라고 손짓했다.

    그런데 우연미는 내리지 않고 닫힘 버튼을 누르고 곧이어 십 층을 선택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우연미를 바라봤다.

    우연미의 눈빛은 중국집에서 처음 본 그날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제가 원래 이렇게 기죽고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박호중 감독님을 만나야겠어요. 할 말은 해야 할 거 같아서요.”

    * * *

    박호중 감독은 엔진의 박주오 대표의 전화를 받고 인상을 구겼다.

    [우연미 작가 계약 안 한다고 그냥 갔어. 그러니까 대체 왜 찾아온 거야? 말도 없이.]

    “내가 언제는 말하고 갔나? 자네가 우 작가 못 잡은 걸 왜 내 탓을 하고 그래?”

    박호중 감독은 대화가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자 연회장 바깥으로 나왔다.

    [계약서 읽고 도장만 찍으면 끝이었는데 박 감독이 나타나서 깨진 거라니까.]

    “아니 그게 왜 내 탓이냐고?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들었거나 그랬겠지.”

    [아니라니까. 중간에 스타탄생 원세강이 끼어들었는데, 우리가 친할 걸 잘 아는 눈치더라고.]

    “스타탄생 원세강?”

    그때 나와 우연미가 전화 통화 중인 박호중 앞에 섰다.

    “원세강이 뭐가 어쨌다는…….”

    전화 통화를 하던 박호중이 우연미를 알아보고 멈칫했다.

    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섰다.

    “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 줘요.”

    “그래요. 작가님.”

    우연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박호중을 쏘아봤다.

    “우 작가가 여기 웬일이야?”

    박호중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은 채 우연미를 바라봤다.

    “아까 봤는데 웬일은요? 종방연 하시나 봐요.”

    “보그는 중간에 일주일 휴방했으니까 오늘이 종방이지. 그나저나 우연미 작가 얼굴 좋아 보이네. 역시 시청률이 효자인가?”

    “그럼요. 작가한테 시청자들의 사랑만큼 힘이 되는 게 어디에 있겠어요?”

    “이번 작품이 이렇게 잘된 게 생각해 보면 내 공도 있는 거 알아? 그때 내가 충고해 준 게 꽤 도움이 됐을 텐데? 그렇지?”

    도움은 무슨. 우연미는 그날 이후로 거의 폐인이 돼서 절필할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작품 기획 중인데 우연미 작가 나랑 같이해 볼 생각 있나? 이건 비밀인데 나도 엔진으로 이적할 거야.”

    박호중 감독의 러브 콜에 우연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 작품은 막장이라서요. 감독님 기준에 안 찰 겁니다.”

    “아니야. 이번에 마네킹이 명품 막장이라고 얼마나 호평을 받았는데.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감독님 벌써 잊으셨어요? 그때 락궁에서 이 바닥 선배로서 조언해 주셨잖아요. 말도 안 되는 복수 이야기는 집어치우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박 감독님이 삼류라고 했던 그 복수 이야기로 대박이 났네요.”

    “우 작가. 아직도 그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어?”

    “마음에 담아 두라고 그렇게 세게 말한 거 아닌가요? 아니지. 나 떼어 버리고 다른 작가랑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줄 알고 있었는데요.”

    “우 작가. 그거 다 오해야. 나는 선배로서 충고해 준 거라고. 봐 봐. 그 이후에 우 작가 작품이 얼마나 잘됐어?”

    “대본은 달라진 게 없는데 무슨 개소리세요?”

    “뭐? 개소리?”

    박호중 감독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기세가 험악해지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내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만하시죠.”

    “넌 누구야? 뭔데 끼어들어?”

    “오늘 끼어들 자격이 생긴 사람이라고만 해 두죠. 이제부터는 제가 작가님 보호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하고 들어가 보시죠. 감독님. 이제 곧 종방연 시작할 거 같은데요.”

    “우 작가. 나에 대한 오해가 커 보여.”

    “오해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굴 거야?”

    그때 문이 열리며 보그의 조감독이 뛰어나왔다.

    그는 당황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박호중 감독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감독님. 큰일 났습니다.”

    “뭐야? 이제 다 찍고 종방연만 남았는데 큰일 날 게 뭐가 있어?”

    “이것 좀 보세요. 큰일 났어요.”

    “대체 뭔데 그래?”

    박호중 감독은 조감독이 내민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던 박호중 감독의 얼굴이 굳어졌다.

    “독설피디? 이게 뭐야?”

    “팬파라치 천재용이 만든 미튜브 채널이래요.”

    “제길. 이게 어디서 흘러나간 거야?”

    박호중은 얼굴이 사색이 돼서 조감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팬파라치? 천재용?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미튜브 앱을 켰다.

    나는 빠르게 ‘독설피디’라는 채널을 검색했다.

    검색창에 천재용의 얼굴이 썸네일인 영상 하나가 떴다.

    영상은 정확히 삼십 분 전에 업로드된 거였다.

    [드라마 보그에서 쫓겨난 명품 작가]

    “어머? 이게 뭐예요? 쫓겨나다뇨?”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우연미가 떨리는 손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작은 화면 속에서 꼴도 보기 싫은 천재용이 나와 입을 열었다.

    아파서 도중 하차한 서아름 작가가 알고 보니 막장을 쓰라는 감독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해 쫓겨났다는 것이 영상의 내용이었다.

    천재용은 이 말을 끝으로 영상을 마쳤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보그 감독은 갑자기 막장을 주문한 걸까요? 동 시간대 일 위였고 큰 이슈가 없다면 계속 일 위를 수성했을 텐데요.

    설마 다른 방송사와 경쟁한 것이 아니라 같은 방송국의 다른 시간대인 마네킹과 경쟁한 것은 아닐까요? 정답은 보그 감독만이 알고 있겠죠. 그럼, 첫 번째 연예계 독설을 마칩니다. 다음은 미국으로 도망갔던 진지혜의 위약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뻔뻔하기 그지없는 천재용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졌다.

    어떤 식으로든 그가 돌아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삼십 분 전에 올라온 영상은 어느새 조회 수가 일만에 육박했다.

    댓글도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 어쩐지 서아름 작가님이 그런 거 쓰실 분이 아닌데 이상하다 싶었어.

    - 감독 미친 건가? 이럴 거면 지가 대본 쓰면 되지. 왜 작가님을 괴롭히는데?

    - 보그 6화까지만 본 내가 승자네.

    - 어디서 마네킹이랑 비교질이야? 서 작가 내보내고 쓴 것도 완전 개구린 막장이었으면서.

    - 그나저나 천재용이면 그때 비스티보이즈 표절 사건 때문에 퇴출당한 기자 아니냐?

    - 여러분, 이 영상 보지 마시고 신고 버튼 눌러 주세요. 천재용 유명한 기레기예요.

    연회장에 모인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 작가님. 우린 이만 가죠. 저기도 난리가 난 거 같은데 우리가 여기 있는 거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예. 대표님.”

    나는 우연미와 함께 지하 이 층으로 내려와 차를 타고 황급히 호텔을 빠져나왔다.

    * * *

    천재용의 폭로로 방송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박호중 감독은 방송 내용을 부인했지만, 서아름 작가가 잠적 상태인 것이 알려져서 사건은 점점 커져만 갔다.

    박호중 감독이야 본인이 한 짓에 대한 죗값을 받는 거라지만 내 신경은 온통 천재용에게 쏠려 있었다.

    천재용은 예고했던 대로 진지혜의 위약금을 다음 타자로 방송했고 그 여파도 켰다.

    졸지에 천재용이 운영하는 채널은 구독자 십만 명을 거느린 유명 연예 채널로 급부상했다.

    한숨을 쉰 나는 깡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혹시 천재용 때문에 전화하셨어요?]

    “그쪽 반응은 어떤가 해서요.”

    [당연히 안 좋죠. 아무리 연예부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를 듣고 살아도 이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분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천재용은 진짜. 사람이 어쩜 그런지.]

    “혹시 팬파라치 쪽은 상황이 어떤가요?”

    [그쪽이 제일 난리 났을걸요. 듣기로는 천재용이 팬파라치에서 취재한 걸로 방송하면 바로 고소 때린다고 하던데요.]

    “그렇군요.”

    [그런데 천재용도 그걸 아는지 과거 이야기는 전혀 입 밖에도 안내잖아요. 본인도 먹고살려면 최근 일어난 연예계 사건만 내보낼 거 같긴 해요. 암튼 우리도 지켜보고는 있어요.]

    “혹시 천재용 관련해서 뭐라도 뜨면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제가 꼭 알려 드릴게요. 그런데 그때 저한테 제보 주신 내용 말고 또 다른 건 없나요?]

    “천재용 비리요?”

    [더 터트릴 만한 건 없나요?]

    천재용의 비리는 차고 넘친다.

    천재용이 돌아오고 제일 먼저 한 게 내가 가진 천재용의 메일함을 뒤져 보는 거였다.

    그런데 터트리기엔 모두 애매한 것들이었다.

    비스티보이즈 표절 건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했기에 풀어도 상관없었지만 다른 건 안 된다.

    특히나 여배우들의 스캔들 기사는 그것이 소문이었다고 해도 다시 꺼내면 배우들만 힘들 게 분명하다.

    천재용 잡자고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알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깡기자의 말대로 천재용은 지금 몸을 사리고 있었다.

    나는 우선은 사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퇴출당하고도 살아 돌아온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이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천재용을 잡고 가야 한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데 이 층으로 이락이 올라왔다.

    이락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쭈뼛거리며 내게 걸어왔다.

    “대표님.”

    내 앞으로 다가온 이락은 내 주머니에 뭔가를 집어넣었다.

    “아무도 없어요. 이러니까 진짜 나쁜 짓 하는 것 같잖아요.”

    “불법이긴 하니까요.”

    “뭐, 그렇긴 하네요.”

    나는 이락이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준 것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서이렌의 여권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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