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6화 (57/261)

#56화. 우연미의 새 보금자리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마네킹의 촬영 현장의 스틸컷으로 나왔다.

스틸컷은 촬영 순서에 맞춰 한 장씩 나왔다.

마지막으로 윤서라로 분한 서이렌이 고철 더미가 된 마네킹을 바라보는 현장 사진을 끝으로 마네킹의 모든 방송이 끝났다.

- 서혜야. 돌아와 ㅠㅠㅠㅠ

- 서이렌 눈빛 봐라.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네.

- 서이렌도 찍으면서 마네킹에 감정 이입했나 보다.

- 눈빛 오진다.

- 마네킹 가지 마. ㅠㅠㅠㅠㅠ

- 끝난 거 아니라고 해줘.

- 스틸컷까지 여운 주는 갓작 ㅠㅠㅠㅠ

마네킹 16화가 끝나고도 애청자들은 밤새 마네킹 엔딩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마네킹의 16화 시청률이 떴다.

30.3%.

팔 년 만에 공중파 미니시리즈에서 30%를 넘는 시청률이 나왔다.

시청률을 보자마자 나는 우연미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이내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원 대표님.]

“시청률 뜬 거 보셨어요? 축하합니다. 작가님.”

[아이고. 시청률 보고 바로 전화하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원고 쓰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당분간은 푹 쉬세요.”

[그렇지 않아도 한 달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잠수 타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렌 씨도 당분간은 쉴 테니 쉴 때 같이 놀아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뭐 하고 놀 건지 다 생각해 놨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시간 그만 뺏을게요. 축하 전화 받으셔야죠.”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우연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예. 말씀하세요.”

[제가 그때 말했던 거요. 그건 여전히 답이 No인가요?]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스타탄생이 작은 회사라서요. 이렌 씨 한 명 케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우연미 작가님이라면 어떤 회사와도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하실 수 있을 겁니다. 스타탄생 식구는 못 되더라도 제가 다리는 놔 드릴게요. 원하는 회사가 있으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세요.”

[말했잖아요. 내가 원하는 건 스타탄생이에요.]

“저희는 말고요.”

[나 계약만 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해도 돼요. 어차피 글은 내가 쓰는 거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럴 수는 없죠. 매지니먼트 회사에 오셨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매니지를 해 드려야죠.”

[암튼 난 스타탄생이랑 계약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세요.]

“그건 쉬면서 천천히 고민해 보시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우연미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난감하다.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 계약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우연미의 회사를 찾아 줘야겠다.

* * *

마네킹이 끝났지만 스타탄생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대본이 물밀듯 밀려들었지만, 잠깐의 휴식을 두기로 했다.

하지만 마냥 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2월에 예정된 뉴욕 패션 위크가 있고, 중간중간 CF도 찍어야 한다.

287일은 이미 장기 흥행 레이스에 돌입했고 어느덧 육백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동안 마네킹 촬영을 하느라 바빠서 서이렌을 빼고 무대 인사를 가졌는데, 이제는 한가해졌으니 무대 인사도 돌 예정이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고 있는 와중에 서이렌은 드디어 첫 번째 정산을 받게 됐다.

스타탄생 법인 명의로 만든 통장에 서이렌이 받을 정산금을 넣어서 그녀에게 건넸다.

서이렌은 어마무시한 액수가 찍힌 통장을 받아들고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왜요? 정산금이 부족해요?”

“아뇨. 공이 많네요. 생각보다 많아요.”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상반기에 찍을 CF는 개런티가 크게 올라가서 앞으로 정산금이 더 많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첫 정산금으로 실망하지는 말아요.”

서이렌은 통장을 접더니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얼마나 모으면 스타탄생을 살 수 있어요?”

“돈 모아서 스타탄생 사려고요?”

“네.”

“글쎄요.”

나는 서이렌이 농담하는 걸 알면서도 진지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서이렌 씨가 받을 정산금을 잘 모으면 칠 년 안에는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칠 년이란 말에 서이렌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표님은요?”

“나요?”

“대표님은 얼마에 살 수 있어요?”

또 저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

“무슨 드라마 찍어요? 나 비싼 사람입니다. 난 칠 년 벌어서는 어림도 없죠.”

서이렌은 턱을 받친 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 년 안에 대표님 살게요.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열심히 일하셔야겠네요.”

“그럼요. 쉬지 않고 일할 거예요. 수상 소감 들으셨잖아요.”

서이렌은 그 말을 하며 내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대본을 힐끔 쳐다봤다.

“그나저나 제 차기작은 뭔가요?”

“당분간은 푹 쉬세요.”

“일해야 하는데요. 그래야 대표님을 사죠.”

“일 욕심이 많은 건 좋은데 당분간은 괜찮은 작품이 없어요. 저것도 다 확인해 본 작품입니다. 아무 작품이나 할 수 없으니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흠. 알았어요.”

서이렌은 새초롬한 얼굴로 통장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정산받은 돈으로 뭐 할 건가요?”

서이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저금해야죠. 대표님 사려면 한 푼도 안 쓰고 아껴야죠.”

이제는 나도 지지 않고 서이렌의 농담을 받아친다.

“그래요. 잘 모아 봐요.”

* * *

마네킹이 끝난 다음 주 화요일.

나는 우연미 작가와 함께 서울 호텔에 왔다.

우연미 작가에게 스튜디오 엔진의 박주오 대표가 연락했고 계약 조건이 너무 좋아서 내가 한번 만나나 보자고 그녀를 설득했다.

지난 일 때문에 박주오 대표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엔진 자체는 나쁘지 않다.

스타 작가도 많이 보유하고 있고 대우도 업계 최고 수준이다.

서울 호텔의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안쪽의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받았다.

그곳에 들어가 보니 박주오 대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대표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시죠? 반갑습니다. 엔진의 박주오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스타탄생 원세강입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박주오 대표는 우연미를 향해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 작가님. 내가 즐겨 먹는 메뉴를 추천할까 하는데 어때요?”

알 수 없는 말들이 잔뜩 쓰여 있는 메뉴판을 보며 당황하던 우연미는 박주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좋죠. 저는 통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좋습니다. 여기, 내가 주문한 와인 먼저 가져다줘요.”

박주오 대표는 매너가 몸에 밴 것 같았다.

하지만 일전에 그와 박호중 감독과의 대화를 들은 나는 박주오 대표의 이중적인 면모를 알기에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박주오 대표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난 우연미 작가가 스타탄생과 계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저희가 작은 회사라서 서이렌 배우님 한 명으로도 벅찹니다.”

“그렇겠죠. 이해합니다. 배우 매니지먼트와 작가 매니지먼트는 다른 일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우리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까지 하고 있어서 운신의 폭이 넓습니다. 작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회사예요.”

박주오는 대화는 나와 하면서도 내내 우연미 작가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박주오 대표의 말이 맞다.

이왕이면 엔진 같은 제작사와 계약하는 게 맞다.

요리가 나오고 한참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로 마네킹과 방송계 이야기였는데 결론은 언제나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으려면 엔진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연미 작가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점점 박주오 대표의 말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 우리가 있는 룸으로 들어왔다.

“박주오 대표. 여기 있다고 해서 와 봤어. 어라? 손님이 계신가?”

룸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박호중 감독이었다.

박호중 감독을 보자마자 우연미 작가가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컥. 컥.”

“괜찮아요. 작가님?”

나는 우연미 작가의 등을 쓸어내리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작가님. 잠깐 나가요.”

“컥. 예.”

나는 사레가 들린 우연미를 데리고 룸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박주오 대표가 미간을 찌푸리며 박호중을 노려봤다.

“왜 그렇게 봐? 난 정말 모르고 온 거라고.”

“여긴 왜 왔어?”

“오늘 보그 종방연이라고 했잖아.”

“종방연을 서울 호텔에서 해? 그거 잘 안 된 드라마 아니었어?”

“무슨 말이야? 초반에만 그랬던 거지. 후반부에 탄력받아서 시청률이 18%까지 올랐다고.”

박호중 감독은 박주오 대표의 말에 화가 나는지 탁자 위에 올려진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그나저나 우연미 영입하려는 거야?”

“그래. 지금까진 분위기 좋았어.”

“그때 내가 판 깔아 줬을 때 계약했어야지. 지금은 스타 작가 반열에 올라서 계약금도 엄청나게 뛰었겠네.”

“그땐 아무리 연락해도 전화를 안 받았어.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도 우 작가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연락하겠나? 암튼 됐어. 지금이라도 계약하면 우리야 땡큐지. 그나저나 우 작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사라져. 우 작가가 박 PD보고 계약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

“본인도 생각이 있으면 좋은 회사 들어가고 싶겠지. 걱정하지 말고 끝나면 연락해. 종방연 끝나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LOK 록 실장이 끝나고 좋은데 데려가 준다고 했어.”

“록 실장 말이 많다고 싫어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아주 영혼의 단짝이 되셨네.”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나중에라도 꼭 와.”

“무슨 일인데 그래? 설마 엔진이랑 계약하고 싶다던 그 이야기야?”

“이따가 이야기해.”

“그건가 보네. 본인 이름 딴 스튜디오 차린다더니. 왜 갑자기 엔진에 오겠다는 건데?”

“엔진도 나 들어가면 좋은 거 아닌가?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나눠 보자고.”

“알았으니까 빨리 나가.”

프라이빗 룸에서 나온 박호중은 문 앞에 선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우연미 작가가 가방을 가져와 달라고 해서 룸에 돌아온 나는 어쩌다 보니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게 됐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박호중 감독은 나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뭡니까? 나한테 볼일 있어요?”

박호중 감독은 나를 밀치고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 우연미 작가를 엔진에 보내도 될까?

박호중 감독이 엔진과 계약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의 얼굴만 보고도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우연미다.

그런 그녀를 엔진에 보낼 수는 없지.

나는 룸 안으로 들어가서 우연미의 가방을 챙겼다.

“원 대표 왜 그래요? 우 작가가 많이 안 좋아요?”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계약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박주오는 우리가 돌아간다니 당황한 눈치였다.

그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우연미가 들어왔다.

“작가님. 우리 그만 가죠.”

“벌써요? 하지만 아직 계약 이야기가 남은 것 같은데요.”

“작가님 몸이 안 좋잖아요. 그건 나중에 이야기해요.”

“하지만…….”

어느새 일어선 박주오가 우리 앞으로 다가오더니 우연미 옆에 섰다.

“우 작가. 괜찮으면 여기서 계약서 씁시다.”

“예. 저는…….”

그때 내가 우연미 작가와 박주오 사이를 갈라놓았다.

“우 작가님은 엔진과 계약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끼어들자 박주오 대표의 얼굴이 굳었다.

사람 좋아 보이던 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험악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우연미 작가님을 빼앗기면 크게 후회할 거 같아서요. 우연미 작가님은 스타탄생이 모셔 가야겠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조금 전까지 신생 회사라서 케어할 능력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더 열심히 뛰어다니면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 이것 참. 원세강 대표가 소문과 다르게 성격이 별로네. 왜 이렇게 즉흥적이야?”

박주오는 나를 밀치고 우연미의 팔을 잡았다.

“우 작가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세요. 엔진에 오면 원하는 프로젝트는 다 해 볼 수 있습니다.”

우연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팔은 놓고 이야기합시다. 왜 사람 팔을 그렇게 세게 잡는 겁니까?”

나는 박주오에게 붙잡힌 우연미 작가의 팔을 빼냈다.

“원 대표. 안 되겠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박주오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박호중 감독님과 나눈 대화 다 들었습니다.”

내 말에 놀란 박주오의 두 눈이 커졌다.

“작년에 락궁에서 두 분이 나눈 대화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날의 이야기가 나오자 박주오 대표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때 우연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정했어요.”

나와 박주오가 동시에 우연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연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는 원 대표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우연미는 내 손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본 박주오 대표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박 대표님도 양심이 있다면 우릴 잡지 않으시겠죠?”

내 말에 움찔한 박주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우연미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그제야 박주오의 입이 열렸다.

“혹시 둘이 사귀는 겁니까?”

“그 말씀은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다음에 뵐 때는 부디 좋은 자리에서 뵙죠.”

나는 내 손을 꽉 잡은 우연미를 데리고 룸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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