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안녕 마네킹
“대표님. 오늘 서이렌 언니 상 받은 거 축하드려요.”
지수연은 내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미소가 꾸며진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
“고마워요. 지수연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는 뒤 돌아섰다.
그때 지수연이 돌아서는 내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요. 대표님.”
나는 지수연에게 잡힌 팔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 하는 거죠?”
“제가 LOK를 선택한 건 실수였어요.”
“LOK 변호사가 스타탄생에 보냈던 팩스도 실수였나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록 실장님이 그러자고 한 거죠.”
지수연이 뻔뻔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지수연이 배신하지 않았어도 그녀와는 오래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하 주차장을 나오는 스타탄생 밴을 본 나는 지수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지수연 씨는 LOK와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록 실장님도 지수연 씨와의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할 테니 잘해 봐요.”
“그게 무슨 말이죠?”
“갈게요.”
나는 당황하는 지수연을 그곳에 놔두고 스타탄생 밴에 올라탔다.
지수연을 알아본 이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표님. 저 사람 지수연 아닌가요?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인사만 했어요. 저기 서이렌 씨와 빈 팀장님 내려오시네요. 차를 더 가까이 대 줄래요?”
“예. 대표님.”
지수연은 떠나는 스타탄생의 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 지수연의 밴도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
차창을 내린 지수연의 로드매니저가 그녀를 불렀다.
“배우님. 저 왔습니다. 타세요.”
지수연은 얼굴을 구긴 채 밴에 올라탔다.
“아까 보니까 스타탄생 원 대표님이랑 무슨 이야기 하는 거 같던데. 맞죠?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죠?”
지수연은 짜증이 나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강 팀장님이 그러시는데 원 대표님이 우리 늦을까 봐 퀵 타고 오라고 말씀해 주셨대요.”
“강 팀장이 누군데요?”
“김선우 배우님 매니저요.”
“원 대표님이 그러셨다고?”
“예. 원 대표님도 사고 때문에 오셔서 퀵 타고 오셨다네요. 우리도 그러라고 말씀해주셨다는데, 지수연 배우님이 머리 망가진다고 헬멧 안 쓰겠다고 하셔서 그냥 차 타고 오다가 늦은 거잖아요.”
“짜증 나.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강 팀장님이 퀵 타고 오라고 했다고.”
“강 팀장인지 뭔지는 난 모르겠고, 원세강 대표가 그렇게 말했으면 똑바로 전했어야죠.”
지수연의 로드매니저는 갑자기 흥분하는 지수연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지수연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빠. 나야.”
지수연의 아버지인 KBC 드라마 국장 지영록에게 온 전화였다.
“괜찮아. 나 신인상 탈 거라는 기대도 안 했어. 걱정하지 마. 내년에 받으면 돼. 그나저나 축하 무대 날려 버린 건 내가 미안해.”
지수연이 탄 밴이 스타탄생 밴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수연은 스타탄생에 오르는 서이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 나 소속사 옮기면 안 돼?”
운전하던 로드매니저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로드매니저는 백미러로 지수연을 힐끔 바라봤다.
지수연은 로드매니저가 듣고 있다는 걸 신경도 쓰지 않고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아빠 말 들을 걸 그랬어. 원세강 대표가 진짜 능력자 같아.”
지수연은 한동안 전화로 하소연을 늘어놨다.
“알았어. 집에 가서 얘기해.”
전화를 끊은 지수연이 로드매니저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빠. 어디 가서 말 흘리지 마요.”
“예…….”
로드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운전을 계속했다.
* * *
마네킹은 드디어 단 2화만을 남겨 두고 있다.
서혜는 서지훈이 정 비서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비서는 서지훈이 윤서라를 죽인 것을 알게 되고 그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
서지훈은 그의 협박을 참지 못하고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다.
정 비서를 요트에서 죽이고 그의 시체는 바다 한가운데 버린다.
요트에 CCTV를 달아 놨던 서혜는 서지훈을 나락으로 보낼 증거를 얻는다.
한편, 폐인이 되어 집에만 처박혀 있던 이혜성은 스타 디자이너가 된 서혜의 기사를 보고 씁쓸히 웃는다.
그때 기사를 덮던 이혜성의 손끝이 떨렸다.
이혜성은 기사 속, 서혜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윤서라…… 이혜성…… 서혜…….”
이혜성의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둘도 없는 친구였던 한때, 윤서라가 이혜성에게 말한다.
“난 네 이름이 예쁘더라. 혜성.”
“난 네 이름이 더 예쁜 거 같은데? 서라. 발음이 마치 살랑바람이 부는 것 같잖아.”
“살랑바람이라고? 와. 그런 표현 처음 들어봐.”
“서라야. 난 나중에 딸을 낳으면 네 이름과 내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서혜’라고 짓고 싶어. 어때? 유니크하지?”
“서혜?”
윤서라는 서혜라는 이름을 곱씹으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 예쁘다. 서혜.”
회상을 끝난 이혜성은 기사 사진 속의 웃고 있는 서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제야 서혜에게 느꼈던 친밀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윤서라였어. 서혜가 윤서라였다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혜성이 울부짖었다.
- 헐. 다 알았네.
- 미친. 마지막에 휘몰아치네.
- 이혜성 눈빛 돌았네.
- 우리 서혜 건들지 마.
정비서의 실종으로 서지훈은 경찰 조사를 받으나 조작된 알리바이로 바로 풀려난다.
서혜는 경찰 조사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CCTV 영상을 경찰에 전달한다.
서혜가 복수를 마무리했다고 느낀 그때 이혜성이 그녀를 찾아온다.
갑자기 찾아온 이혜성의 손에 들린 것은 수제 쿠키였다.
서혜는 그녀를 의심하며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녹음기를 켠다.
이혜성이 만들어 온 쿠키는 땅콩 쿠키와 무화과 쿠키 두 종류다.
무화과 알레르기가 있는 서혜는 그것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서혜는 그제야 이혜성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눈치채고 코웃음을 친다.
서혜는 일부러 땅콩 쿠키만 골라서 먹는다.
그것을 본 이혜성이 묻는다.
“무화과는 싫어해? 혹시 알레르기라도 있어?”
두 사람은 웃고 있지만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서혜는 이혜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화과 쿠키에 손을 가져다 댄다.
“아뇨. 그럴 리가요. 좋아해요.”
서혜는 조심스럽게 무화과 쿠키를 입에 가져다 댄다.
‘괜찮을 거야. 알레르기가 있는 내 몸은 쓰레기와 함께 썩어 가고 있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이건 내 몸이 아니니까.’
서혜가 무화과 쿠키를 씹으려는 그때 놀란 이혜성이 그녀의 손에서 쿠키를 잡아채 버린다.
“미쳤어? 이거 먹으면 너 죽어.”
쿠키를 입에 넣으려던 서혜의 손이 멈췄다.
서혜는 당황한 얼굴로 이혜성을 바라봤다.
서혜를 죽일 마음을 먹고 온 이혜성은 자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혜성. 너 뭐야?”
이혜성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이혜성은 허둥지둥 그곳에서 도망치고 서혜가 그녀를 뒤쫓는다.
이혜성은 황급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달아 누르고 뒤따라오던 서혜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이혜성의 눈빛을 마주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며 마네킹 15화가 끝났다.
- 방금 이혜성 표정 봤음?
- 이렇게 끝나는 게 어디에 있어???
- 이제 1화 남았는데 수습이 가능한 거냐?
- 어떻게 끝날지 감도 안 온다. 미친.
- 마네킹 연장한다는 말 없었지?
- 없었음. 얄짤없이 내일 끝날 거 같은데.
드디어 마네킹의 마지막 회가 시작됐다.
경찰에 잡힌 서지훈이 이송 중에 탈주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서혜는 사라진 이혜성을 찾아다니고 드디어 그녀가 있는 곳을 발견한다.
요양원에 도착한 서혜는 누군가를 극진히 간호하는 이혜성을 발견한다.
서혜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쓰러져 있는 여인을 보고 놀란다.
그녀는 죽었다고 생각한 자기 자신 윤서라였다.
이혜성은 서혜를 보며 의심의 눈빛을 드러냈다.
“넌 대체 누구야?”
서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도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나도 몰라. 나는 대체 누굴까?”
이혜성은 그녀 앞에 서서 무릎 꿇는다.
그녀의 눈에서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서혜는 자신의 발을 부여잡고 우는 이혜성을 보며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를 미워했어. 잘난 거 하나 없는 네가 나보다 재능 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미웠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혜는 이혜성을 떼어 버리려고 손을 들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서라야. 미안해. 죽을 때까지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게. 네가 발이 되라면 발이 될게. 다시는 허리를 펴지 않고 엎드린 채 평생 살아갈게. 미안해.”
서혜는 참회하는 이혜성을 차마 내치지 못했다.
서혜가 이혜성의 손을 잡자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 * *
경찰을 피해 도망치던 서지훈은 CCTV를 푼 사람이 서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혜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뒤쫓던 서지훈은 서혜가 요양원에서 이혜성을 몰래 만나는 것을 알고 분노한다.
“이혜성. 네가 사주했구나. 그렇지. 서혜가 내게 이럴 이유가 없잖아. 모두 이혜성 네가 꾸민 짓이야.”
벼랑 끝에 선 서지훈은 수술용 칼을 들고 그녀들 앞에 나타난다.
“나를 여기서 만날 줄 몰랐겠지?”
서지훈은 서혜와 이혜성을 위협하며 칼을 들이밀었다.
서혜는 이혜성을 자신의 뒤로 보내고 침대 옆으로 이동했다.
서서히 다가오던 서지훈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윤서라를 발견한 것이다.
서지훈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윤서라가 왜 여기에 누워 있어?”
서지훈은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서지훈은 이혜성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서혜가 나서서 서지훈의 칼을 잡아챘다.
서혜의 손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네가 복수할 사람은 나잖아?”
서지훈은 분노에 가득 찬 서혜의 눈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한 그녀가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서지훈은 서혜의 팔을 낚아챈다.
“따라와.”
* * *
서지훈은 서혜를 데리고 요양원 뒷산으로 끌고 간다.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닷가 절벽에 선 두 사람.
“넌 끝까지 치졸한 자식이야. 복수할 가치도 없는 자식.”
“너 정체가 대체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데?”
“말해 줘도 넌 모를 거야. 영원히 모르고 살아.”
서혜는 이제 복수에 관심이 없었다.
복수하면 그녀가 받은 상처가 치료될 것이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상처를 되돌려 줄수록 그녀는 더 아팠다.
서지훈은 서혜를 칼로 위협하며 산 아래를 포위하는 경찰들을 확인했다.
“다 끝났어. 가서 자수해. 감옥에서 생각해. 네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곳에서 네 죗값을 치러.”
서혜는 이 말과 함께 뒤돌아섰다.
서지훈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의 눈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경찰들이 포위망이 좁혀지는 산 아래 길과 바다로 이어지는 절벽.
모든 길이 내리막이다.
힘들게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 보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추락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순간 서지훈의 눈빛이 번뜩였다.
“어둠으로 꺼지느니 지옥에 떨어지는 걸 택하겠어.”
서혜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서지훈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혜는 함께 죽으려고 달려드는 그를 피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서혜가 자신에게 돌진하자 서지훈이 되려 놀라 멈춰 섰다.
서혜는 멈추지 않고 그를 얼싸안고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 미쳤나?
- 이게 웬 논개 엔딩이냐?
- 서혜 안 죽겠지. 인간이 아니잖아.
- 서지훈 저 똥차 새끼. 회개하라고!!!
- 이렇게 끝날 리가 없다.
- 이대로 끝나면 방송국 불태워 버릴 거야.
화면이 전환되고 카메라가 요양원에 누워 있는 윤서라를 비췄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던 윤서라의 손가락이 꿈틀대며 화면이 암전됐다.
- 헐. 윤서라 깨어나나?
- 서혜 사망 땅땅이네. 둘 다 살리라고.
- 둘 다 살리는 건 말이 안 되지.
- 이미 마네킹이 살아 움직였을 때부터 말은 안 되는 거였음.
- 우린 그 어떤 상식 파괴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시청자라고. 작가야. 네 힘을 보여 주라. 서혜도 살려 놓으라고.
시청자들의 원성 속에 암전됐던 화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화면에 ‘1년 후’라는 자막이 떴고 작업실이 보였다.
작업실에서 누군가 스케치를 하고 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도화지에 여성의 몸이 그려지고 이내 그녀의 몸에 아름다운 옷이 입혀졌다.
완성된 작품을 보며 웃는 그녀의 웃는 입술이 보인다.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고, 그녀는 스케치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받고 놀라는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윤서라다.
놀란 윤서라가 다급하게 묻는다.
“정말 찾았어요? 어디서요?”
윤서라의 호흡이 가빠진다.
“알았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
전화를 끊고 일어서려는 윤서라는 책상 옆에 놓인 목발을 찾는다.
목발을 짚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윤서라.
그때 작업실로 이혜성이 들어온다.
“전화 받았어?”
“어. 방금 받았어. 나 좀 도와줘.”
“알았어.”
이혜성이 윤서라에게 달려간다.
윤서라는 이혜성의 도움을 받아 절뚝이며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 윤서라. 다리 다쳤나?
- 요양원에서도 다리 다친 거 나왔음.
- 쓰레기더미 속에 깔리면서 다쳤나 보다.
- 이혜성이 윤서라의 발이라도 되겠다고 사죄했었잖아. 그 말대로 됐네.
└ 헐. 그러네.
└와. 작가님. 여기까지 생각하신 거냐.
└나 방금 소름 돋았음.
윤서라와 이혜성이 도착한 곳은 요양원 근처의 바닷가다.
멀리 작업선이 뭍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윤서라와 이혜성은 두 손을 꼭 잡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작업선의 갑판 위로 커다란 천이 덮여 있다.
작업선이 들어오자 이혜성의 부축을 받은 윤서라가 그곳으로 달려간다.
덮어 놓은 천을 벗겨 내자 조각난 마네킹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서지고 녹슬었지만 서혜가 분명했다.
윤서라가 손가락이 하나밖에 없는 마네킹의 손을 잡으며 화면에 ‘The Ending.’이라는 글자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