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4화 (55/261)

#54화. 만남의 광장

“나 TOP 엔터 대표 한지욱입니다.”

서이렌은 한지욱의 예상과 달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TOP 엔터 한지욱이라고요. TOP 엔터 몰라요?”

“모르는데요.”

“정말 모르는 겁니까?”

“제가 알아야 하나요?”

서이렌은 한지욱은 모르지만, TOP 엔터라면 알고 있었다.

원세강이 대표 자리에 오를 뻔했던 회사가 바로 TOP 엔터가 아니던가.

한지욱은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쳐다보는 서이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지금껏 이 명함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지은 건 서이렌 씨가 처음입니다.”

“제가 처음이라니 저도 당황스럽네요. 그럼, 제가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거죠?”

서이렌의 말에 한지욱은 당황했다.

한지욱은 소매를 걷더니 다시 한번 서이렌의 앞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드러난 그의 팔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가 번쩍였다.

“여기 명함에 쓰여 있죠? TOP 엔터테인먼트. 내가 바로 한지욱입니다. 나는 모를 수 있다고 쳐요. 서이렌 씨가 아직 데뷔한 지 일 년밖에 안 된 신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이자현 배우는 알겠죠? 톱스타 이자현 말입니다.”

“선배님은 당연히 알죠.”

“이자현 배우가 바로 TOP 엔터 소속입니다. TOP의 모회사는 배우 매니지먼트로는 업계 톱 쓰리인 LOK고요. 이제 나란 사람에 대한 감이 왔겠죠? 그러니 이 명함 받아요.”

한지욱은 서이렌의 태도가 달라질 것을 예상하고 미소 지었다.

그러나 서이렌은 거의 장황한 소개를 다 듣고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예. 그러시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한지욱 대표님.”

서이렌이 짧은 인사를 하며 돌아서자 한지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요. 그냥 가는 겁니까?”

서이렌이 아무 말이 없이 공개홀 복도를 걸어가자 한지욱이 달려왔다.

“서이렌 씨. 나 아직 말 안 끝났어요. 내 말을 좀 듣고 가시죠.”

서이렌을 따라잡은 한지욱이 앞서가는 서이렌의 팔을 낚아채려고 손을 내밀었다.

서이렌은 다가오는 한지욱의 손을 발견하고 멈춰 서서 옆으로 몸을 틀었다.

서이렌이 피하자 놀란 한지욱의 스텝이 꼬이고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간신히 자세를 잡고 일어선 한지욱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지금 나 피한 겁니까?”

서이렌은 한지욱의 앞으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급하신 거 같은데 먼저 가세요.”

한지욱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 나 한지욱이라니까요.”

“예. 이미 세 번이나 말씀하셨어요.”

“소문이랑 다르게 깐깐한 성격인가 보네요.”

“처음 보는 남자가 달려드는데 그럼, 얌전히 서 있다 팔이라도 잡힐까요? 보통은 이런 걸 순발력이 뛰어나다고 하지 않나요?”

“나는 처음 봤어도 이자현 배우 이름은 들어 봤을 거 아닙니까?”

“선배님이 저 보자고 하시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죠.”

“그럼, 더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만.”

“스타탄생이랑 몇 년 계약했어요? 신인이니까 칠 년 아니면 오 년일 텐데. 칠 년인가요?”

“제 계약 기간이 궁금해서 찾아오셨나요? 저희 대표님께 여쭤보실래요?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 보죠.”

한지욱은 드레스 차림의 서이렌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안타깝게도 드레스에 핸드폰 넣을 주머니가 없는 거 같네요.”

“가방은 폼으로 들고 다닐까요?”

서이렌은 핸드폰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귀엽고 앙증맞은 클러치 백을 들었다.

빈선예가 드레스와 같은 재질의 천을 구해서 직접 만들어 준 클러치 백이었다.

한지욱은 서이렌이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자 당황했다.

“스타탄생에서 받은 계약금의 열 배를 줄게요. TOP와 함께 일합시다.”

전화번호를 누르던 서이렌이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한지욱을 빤한 눈으로 쳐다봤다.

한지욱은 먹혔다 싶었는지 더 세게 나왔다.

“위약금도 TOP가 다 해결해 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는 들어가는 작품마다 대박이 났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거 다 운인 거 아시죠?”

“운이라고요?”

“데뷔작인 여우비는 대사 몇 줄이 없던 단역에서 배우 하차로 덕을 본 거고, 영화 데뷔작도 저예산 영화잖아요. 심지어 주연도 아니고. 마네킹은 더하죠. 한물간 피디에 다들 걱정하는 막장 드라마 작가까지. 안 그래요?”

“올해 한국에 안 계셨나 봐요? 287일은 오백만 관객이 본 영화예요. 마네킹은 올 한 해 KBC 시청률 일 위고요.”

“그 운이 언제까지 갈 것 같습니까? TOP에 오면 업계 최고의 감독과 작가를 골라서 작품을 할 수 있습니다. 스타탄생이 못 하는 걸 저희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한지욱은 서이렌의 눈빛이 떨리는 걸 미끼를 물었구나 싶었다.

‘계약금을 열 배나 불렀으니 혹할 할만도 하겠지.’

한지욱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품 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뭐죠?”

“그랜드 호텔. 펜트하우스 숙박권입니다. 한 해에 딱 삼백육십오 장만 풀려서 구하기 어려운 겁니다. 받으세요.”

“제가 이걸 왜 받죠?”

“이제 드라마 끝나면 좀 쉴 거 아닌가요? 그때 지인들이랑 쉬러 가요. 원세강 대표가 워낙에 꼼꼼한 사람이라 알아서 챙겨 주겠지만 말입니다.”

한지욱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원세강이 이런 비싼 숙박권을 구해다 줄 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야 TOP 한지욱이 제대로 보이겠군.’

한지욱이 미소 짓는 데 서이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들고 있는 펜트하우스 숙박권을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밀어냈다.

“글쎄요. 저는 그게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한 번은 사양할 거라고 예상한 한지욱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한 계약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요. 당장 답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제 성의니까 받아 주시죠.”

한지욱은 다시 한번 펜트하우스 숙박권을 서이렌에게 내밀었다.

“저는 정말로…….”

그때 서이렌과 한지욱 사이로 내가 나타나 한지욱의 손에 든 펜트하우스 숙박권을 채 갔다.

“어! 원 대표?”

나를 보고 당황한 한지욱이 뒤로 물러섰다.

나는 한지욱을 무시하고 서이렌이 괜찮은지부터 살폈다.

“단막극이랑 조연상 시상 끝났어요. 이제 곧 신인상 시상할 테니 어서 들어가 봐요.”

“같이 가요. 대표님.”

“아뇨. 나는 한 대표랑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요.”

“예. 그럴게요.”

한지욱은 해사하게 웃는 서이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서이렌의 얼굴에 그와 대화할 때 보였던 불편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돌아가려던 서이렌이 한지욱을 향해 뒤돌아섰다.

“저기요. TOP 한지욱 대표님.”

한지욱은 서이렌이 갑자기 자기 이름을 부르자 두 눈이 커졌다.

“대표님이 제가 받은 계약금의 열 배를 주신다고 하셨죠?”

서이렌이 계약금 이야기를 꺼내자 한지욱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줄 몰랐겠지.

나는 서이렌이 어떻게 할지 궁금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계약금이 열 배든 백 배든 한지욱 대표님 돈은 안 받을래요. 그 돈은 내가 벌면 되니까요. 그럼, 나중에라도 다시 얼굴 보지 맙시다.”

말을 마친 서이렌이 윙크를 날리더니 그대로 뒤돌아섰다.

나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서이렌을 보며 뿌듯했다.

저 사람이 내 배우라니.

적수가 없구나.

한지욱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라지는 서이렌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저도 갑니다. 오늘 보고 들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할 테니 다시는 배우님께 접근하지 마세요.”

내가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자 한지욱이 내 팔을 잡았다.

“그건 주고 가야지.”

“뭘요?”

“그거.”

“그러니까 그거 뭐.”

한지욱이 말이 짧길래 나도 반말을 했다.

고민하던 한지욱이 결국 백기를 들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랜드 호텔 숙박권 말입니다.”

“이거 말씀이십니까?”

나는 이미 내 양복 주머니 안에 넣은 펜트하우스 숙박권을 살짝 꺼내 한지욱에게 귀퉁이만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건 주신 거니까 잘 받겠습니다. 곧 한성제 대표님 생신이 다가오네요. 한성제 대표님께 선물로 드리면 되겠네요.”

“그걸 그렇게 가져가면 어떻게 합니까?”

“분명 계약이랑 상관없으니 받아만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잘 받겠다고요.”

나는 황당해서 말을 못 하는 한지욱을 그곳에 내버려 두고 시상식장 안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 * *

객석에 돌아가 보니 올해의 여자 신인상 후보 영상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내 배우라서가 아니라 후보 중 서이렌이 유독 튀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살아 돌아와 복수하는 캐릭터를 맡아서 그런지 짧게 편집된 VCR로도 남다른 존재감을 보였다.

“대표님. 인터넷 반응도 다 우리 이렌 님이 받을 거라고 예상하네요.”

이락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인터넷 창을 몇 개씩 켜 놓고 커뮤니티 반응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그때 시상자의 멘트가 끝나고 봉투가 열렸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시상자는 한번 뜸을 들이더니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이름을 불렀다.

“올해의 여자 신인상 수상자는 마네킹의 서이렌 씨입니다. 축하합니다.”

시상자의 외침과 함께 카메라가 서이렌을 비췄다.

서이렌은 마네킹 식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이렌은 무대 위를 오르기 전, 객석에 앉아 있는 우리를 찾았다.

그녀의 미소를 보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무대 위를 오르는 서이렌의 모습이 슬로 효과를 준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내 남은 인생에서 어느덧 삼백 일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문득 남은 삶도 이렇게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은 서이렌이 무대 앞으로 걸어왔다.

처음 받는 상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기분도 남다른 것 같았다.

서이렌이 마이크를 자신 쪽으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마네킹은 제게 특별한 작품입니다.”

서이렌의 뒤로 그녀가 연기한 윤서라, 서혜의 연기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엊그제 마네킹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했습니다. 내 인생을 암흑에서 끌어 올려 준 구세주인 마네킹과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서이렌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마네킹은 이제 여러분의 곁을 떠나지만 저는 계속 살아 숨 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눈앞에서 계속 연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서이렌의 수상 소감이 무얼 말하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무대 위의 서이렌을 바라봤고, 서이렌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서로 두 눈을 마주치자 그제야 서이렌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카메라가 신인상 후보였던 다른 배우들을 비췄다.

옆 테이블에 앉은 정하연이 두 손을 꼭 잡고 서이렌의 수상 소감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짧게 지나갔다.

기분 좋은 이 순간, 내 옆에 앉아 있는 빈선예가 짜증을 냈다.

“지수연 쟤는 뭐야? 다들 기뻐하는데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정하연 다음으로 카메라가 향한 곳은 보그 테이블이었다.

강하나는 그나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박수를 치고 있었지만, 지수연은 한눈에도 뿌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감정을 정리한 서이렌이 갑자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분간은 앞만 보고 내달릴 예정입니다. 휴식기 같은 건 없으니까 좋은 대본이 있으면 언제든지 보내 주세요. 제 심장을 움직이는 작품이 있다면 쉬지 않고 무대든, 카메라 앞이든 가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이렌은 이 말을 끝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석에서 수상 소감을 지켜보는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서이렌 씨가 그렇게 말 안 해도 계속 일 물어다 줄 거였습니다.

서이렌의 방금 발언은 방송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서이렌 팬들을 끓어오르게 했다.

- 이렌님께서 열일하신단다.

- 와. 연기에 대한 저 열정 보소. 휴식기 따위는 없대.

- 서이렌이 올해 몇 작품 했지?

└ 2 드라마, 1 연극, 1 영화.

└그럼 내년에도 이만큼 해 준다는 이야기?

- 올해처럼 작품 많이 하면 이미지 소비가 크지 않나?

└ 서이렌이 한 역을 봐라. 겹치는 거 하나도 없음.

- 나는 드라마만 봐서 그런지 몰라서 서이렌 자주 나오는 거 모르겠던데?

- 수많은 CF 스타들은 서이렌 좀 보고 배워라. 배우면 연기를 해야지.

- 한참 열일하다가 이제 CF 스타 된 이자현도 있잖아.

└ 이자현은 그동안 열심히 달렸으니 대상 받고 조금 쉬는 거겠지.

- 이자현 이야기 나와서 말인데 오늘 대상 시상하러 오겠지?

└ 당연하지. 작년에 대상 받았잖아.

축하 공연과 신인상 수상이 끝나자 긴장이 풀렸다.

연기대상은 그 이후로도 상을 남발하며 열두 시가 넘어서까지 진행됐고 새벽 한 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빈 팀장님. 나는 락군이랑 먼저 차 대놓고 있을 테니 팀장님이 이렌 씨 데리고 나와 주세요.”

“그래요. 대표님.”

락이가 주차장으로 간 사이 나는 핸드폰을 켜고 축하 문자와 톡을 확인했다.

내가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원세강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 눈앞에서 선 사람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오늘 날 잡았나?

아는 사람은 죄다 만나고 가겠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지수연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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