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53화 (54/261)
  • #53화. 무대 위의 세이렌

    서이렌이 노래를 부르자 바쁘게 돌아가던 무대 뒤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축하 공연 때문에 모인 신인 배우는 물론 PD와 스태프들도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의 목소리는 타고났다.

    맑고 티 없는 울림을 가졌고, 발성과 발음도 완벽하다.

    노래도 웬만큼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만 했는데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녀의 노래 실력에 나는 혀를 찼다.

    이 정도면 가수 역도 문제없겠군.

    “이렌 씨. 그만해도 될 거 같아요.”

    내가 서이렌의 드레스 옆 자락을 살짝 당기자 서이렌이 노래를 멈추고 입을 닫았다.

    다들 입이 쩍 벌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이렌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제가 노래를 부를게요. 피아노도 칠 수 있습니다. 아시죠? 저 피아노 잘 치는 거?”

    몇몇 사람들은 287일에 나온 서이렌을 떠올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PD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이렌에게 물었다.

    “악보는 알아요? 리허설 없이 바로 무대에 서야 합니다. 되겠어요?”

    “나의 별로 OST잖아요. 좋아하던 노랩니다. 악보는 이미 머릿속에 있어요. 칠 수 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AD가 말을 보탰다.

    “서이렌 씨. 영화에서도 피아노 잘 쳤습니다. 피아노 없이 그냥 노래만 해도 대박일 거 같은데요?”

    PD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지 고민에 빠졌다.

    이번 축하 공연을 제대로 꾸미라고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들이 꾸미는 축하 공연은 KBC 연기대상의 연례행사처럼 빠지지 않고 열렸지만, 올해처럼 윗선에서 신경 쓰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다.

    최종 리허설을 지영록 국장까지 보고 갔을 정도다.

    결정을 못 내리는 PD와 달리 나는 확신이 있었다.

    연습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거지만 서이렌이 실수할까?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 완벽히 무대를 할 거다.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PD에게 다가가 시계를 보여 주며 말했다.

    “곧 시작이지 않습니까? 빨리 결정하시죠.”

    “하지만…….”

    “만약 무대에서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시청자들은 배우들이 꾸미는 축하 무대에서 프로가 준비한 공연을 보리란 기대는 없을 겁니다. 몇 년 전에도 신인 배우가 춤을 추다가 실수를 했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귀엽다며 좋아했잖습니까?”

    PD는 내 말에 혹하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고민하던 PD는 결국 결정을 굳히고 큐시트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럼 원래 기획대로 갑니다. 대신 서이렌 씨 독무는 빠지는 겁니다.”

    “예. 저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어야 하니까요.”

    “노래 다 끝나고 우산 펼칠 때 나오시면 됩니다. 이해하셨죠?”

    “알겠습니다.”

    PD는 다른 배우들을 보며 당부했다.

    “서이렌 씨 말고 다른 사람들은 바뀌는 게 없으니 문제없겠죠?”

    “예. PD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인 배우들이 잘할 수 있다며 열의를 보였다.

    PD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이렌 씨만 믿고 가는 겁니다. 아셨죠?”

    그는 긴장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서이렌은 그런 PD를 바라보며 말했다.

    “믿으세요. 제가 완벽하게 해낼게요.”

    끝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서이렌을 보며 PD는 왠지 모를 대박의 기운을 느꼈다.

    “자, 그럼 준비합시다. 십 분 뒤 축하 공연입니다.”

    무대 뒤가 정리되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사라지자 PD는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서이렌에게 물었다.

    “서이렌 씨. 그런데 방금 그 사람은 누굽니까? 아는 사람이에요?”

    “우리 회사 대표님이신데요?”

    “대표라고요?”

    “너무 잘생겨서 배우라고 생각하셨죠? 아니에요.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세요.”

    * * *

    내가 객석에 돌아오자 빈선예와 이락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어떻게하기로 했어요? 정말 그렇게 진행한대요?”

    나는 흥분한 빈선예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아뇨. 립싱크는 안 하기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우리 이렌 씨가 직접 노래를 부르기로 했어요.”

    “예? 이렌 씨가 노래를 불러요?”

    빈선예와 이락은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피아노도 이렌 씨가 직접 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렌 씨가 메인이 되는 건 좋은데, 잘못하면 우리 이렌 씨만 우스워지는 거 아니에요? 피아노는 잘 치는 거 알아서 그렇다고 치는데. 노래는 어떻게 해요?”

    “잘합니다.”

    “예?”

    “서이렌 씨가 노래를 정말 잘합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생방송이고 연습도 없이 무대에 서는 건데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실수는커녕 완벽하게 해낼 겁니다. 우리는 그냥 놀랄 준비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때 VCR로 드라마 하이라이트 장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올해 히트한 KBC 드라마가 화면에 스쳐 지나갔고, 무대 아래서 이를 지켜보는 배우들의 얼굴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갔다.

    “저기 좀 봐요. 이제 축하 공연을 하려나 봐요.”

    이락이 무대 아래 줄지어 서 있는 신인 배우들을 보며 소리쳤다.

    VCR이 끝나면 곧바로 축하 무대의 막이 오른다.

    신인 배우들이 줄지어 무대 위로 올라 자리를 잡고 섰다.

    서이렌이 실수 없이 잘 해내리라 확신하지만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무대 위에서 한 치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VCR이 끝나고 MC가 자연스럽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올해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한 드라마가 이렇게 많았네요. 윤지 씨는 마음속에 정해 둔 올해의 대상 후보가 있나요?”

    “VCR를 보니까 다들 대단한 작품이고 선배님들도 굉장한 연기를 보여 주셔서 제가 감히 고를 수가 없습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윤지 씨가 출연하고 있는 흥부네 딸들이 나오자마자 손뼉을 치며 좋아하신 걸 제가 봤습니다.”

    “그걸 또 보셨네요. 아무튼, 이렇게나 후보들이 쟁쟁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절대 채널 돌리지 마시고 마지막까지 KBC 연기대상 꼭 시청해 주세요.”

    “하하. 이렇게 넘어가시네요. 그럼, 윤지 씨는 대상 말고 기대하고 있는 다른 상이 있나요?”

    “저는 아무래도 저는 신인상이 제일 기대가 됩니다. 신인상은 배우 인생에 단 한 번밖에 못 받는 상이니까요. 김국현 씨는 어떠세요?”

    “저는 신인상보다는 신인상 후보들이 꾸미는 축하 무대가 더 궁금합니다. KBC 연기대상만의 전매특허 아니겠습니까?”

    “아마 시청자분들도 같은 생각이실 거 같은데요. 올해는 더욱 특별한 무대로 여러분들을 찾아갈 거라는 이야기를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들었습니다.”

    “윤지 씨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궁금해지는데요. 그럼, 기다리지 말고 빨리 무대를 만나볼까요? 올해의 신인상 후보들이 꾸미는 환상적인 축하 무대를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MC들의 멘트가 끝나고 드디어 무대 위에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섯 명의 남녀가 장우산을 손에 들고 무대 위에 섰다.

    그때 공개홀의 문이 열리며 드레스를 차려입는 누군가 뛰어들어 왔다.

    뒤늦게 나타난 지수연은 무대에 조명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야. 시작한 거야?”

    지수연의 매니저는 축하 무대가 시작한 것을 보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때 무대 뒤쪽이 갈라지며 피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노에 앉아 있는 사람을 카메라가 비추는데, 다름 아닌 서이렌이었다.

    다른 신인 배우들과 같은 의상을 차려입은 서이렌은 장우산을 피아노에 기대 놓고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시청자들은 서이렌의 등장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 대박! 안젤라 수녀님 나오셨다.

    - KBC 너무 노린 거 아니냐? ㅋㅋㅋ.

    - 안젤라 수녀님 인기를 등에 업는 거 아주 좋은 선택인데?

    - 축하 공연 담당자님 복 받으세요. 이런 무대를 꾸며주시다니 덕후는 그저 웁니다. ㅠㅠ순간 서이렌의 손가락이 허공 위에 떴다.

    서이렌은 마치 피아니스트처럼 우아하게 나의 별로의 OST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공개홀의 배우들은 물론 시청자들도 이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오로지 한 사람, 지수연만은 얼굴이 사색이 됐다.

    신인 배우들은 서이렌이 치는 피아노 연주에 맞춰 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사흘 동안 빡세게 연습한 덕분인지 꽤 보기 좋은 군무가 펼쳐졌다.

    그때 지수연이 피아노 위에 설치된 마이크를 발견했다.

    “뭐야? 서이렌이 노래까지 하는 거야?”

    지수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이렌의 입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이렌의 목소리가 공개홀에 울려 퍼지자 아까 무대 뒤에서 벌어졌던 현상이 다시 한번 재현됐다.

    관객들은 서이렌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객석에서 축하 무대를 지켜보던 빈선예와 이락도 마찬가지였다.

    “허. 대표님. 이거 이렌 씨 목소리 맞아요?”

    “말도 안 돼. 우리 이렌 님은 대체 못 하는 게 뭘까요?”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빈선예와 이락을 보며 웃었다.

    두 번째 듣는 나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서이렌은 디바처럼 호소력 있는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신비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점점 빠져든다고나 할까?

    그래서 세이렌이었나?

    마네킹의 원래 이름이 세이렌이라고 했다.

    서이렌이라는 예명도 거기서 따서 지은 거다.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에 환상적인 서이렌의 목소리 그리고 신인 배우들의 잘 짜인 군무.

    지금까지 KBC 신인 배우들이 보여 준 그 어느 축하 공연보다 대단한 무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

    서이렌은 고음이 폭발하는 OST의 후렴구를 그녀의 신비로운 가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독무는 볼 수 없었지만 빠져들어 갈 것 같은 그녀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는 우주를 떠도는 방랑자.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나의 별로 돌아와 줘.]

    서이렌의 노래가 끝나자 춤을 멈춘 배우들이 일제히 우산을 펼쳤다.

    서이렌은 피아노 옆에 세워둔 우산을 가지고 무대 앞으로 나오더니 신인 배우들과 함께 우산을 펼치고 섰다.

    환하게 웃는 신인 배우 아홉 명의 얼굴이 각각 클로즈업되며 그렇게 축하 무대가 끝났다.

    노련한 MC가 곧바로 멘트를 쳤다.

    “와. 대단합니다. 신인상 후보들이 펼치는 축하 무대였습니다. 열심히 준비했을 신인 배우들에게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관객들은 환호했고, 지척에서 무대를 감상한 배우들도 박수를 보냈다.

    이 시각,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들도 축하 무대를 보고 난리가 났다.

    - 서이렌 미쳤네. 목소리가 완전 미쳤어.

    - 이건 축하 무대의 퀄리티가 아니다. 당장 브로드웨이에 올려야 한다.

    - 서이렌 예명이지? 세이렌에서 따온 거였냐?

    - 서이렌은 대체 못 하는 게 뭘까? 얼굴도 예뻐. 춤도 잘 춰. 노래도 잘해. 연기도 잘해. 나를 못 가진 거 빼고는 다 가졌다.

    └ 미친놈이.

    └ 시끄럽다. 씻고 자라.

    - 왜 다들 서이렌 이야기만 하냐? 다른 배우들도 잘했는데?

    - KBC 지금까지는 학예회 수준의 무대만 보여 주지 않았나? 왜 갑자기 이렇게 업그레이드된 거지?

    - 무대 시작할 때 자막으로 안무가 이름 뜰 때부터 알아봤다. KBC가 작정했구나.

    - 서이렌이 후보일 때 열일한 KBC ㅋㅋ.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던 이락이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인터넷 반응 터졌어요. 난리가 났어요.”

    나는 KBC의 의도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축하 무대의 반응이 이렇게나 좋은지 알지 못하는 신인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고 하나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가장 마지막으로 의상을 갈아입은 서이렌이 공개홀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빈선예가 고른 하늘거리는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서이렌이 복도를 뛰어가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봐요. 서이렌 씨. 나 좀 봅시다.”

    멈춰 선 서이렌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서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가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나 이런 사람입니다.”

    금빛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함을 받은 서이렌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와 그가 건넨 명함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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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이사 한지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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