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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의 매니저-52화 (53/261)
  • #52화. 위기의 축하 무대

    이자현을 보고 놀란 나는 급하게 뒤돌아섰다.

    그때 연기대상 AD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이렌 씨는 여기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따 축하 무대에 서야 하니까, 이 큐시트 보고 미리 준비하세요. 저희가 시간 맞춰서 불러 드릴 겁니다.”

    빈선예가 AD가 건네는 큐시트와 자리 배정표를 건네받았다.

    “대표님. 이렌 씨. 빨리 가요.”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말했다.

    “들어갑시다.”

    이자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자현과는 이미 끝난 인연이 아닌가?

    지금 내 배우는 서이렌뿐이다.

    나는 서이렌을 데리고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마네킹 팀의 테이블은 무려 무대 앞 정중앙이었다.

    우리 양옆으로 보그와 인기리에 방송 중인 주말 드라마 흥부네 딸들 테이블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이렌을 그곳으로 보내고 객석으로 돌아서려는데 보그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수연 씨. 아직도 안 왔어요?”

    “오다가 사고가 났나 봅니다.”

    “무슨 사고인데요?”

    “문화 사거리에서 팔중 추돌 사고가 났다는데. 저희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팔중 추돌 사고란 말에 내 두 눈이 커졌다.

    나는 곧바로 보그 팀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보그 팀에는 김선우와 강하나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안면이 있는 김선우와 강하나의 매니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김선우 매니저에게 다가섰다.

    “제가 방금 그 사거리 지나쳐 왔는데 사고가 꽤 크게 났습니다. 그 일대가 완전히 막혔습니다.”

    “그 정도라고요?”

    김선우의 매니저는 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도 타고 있던 차에서 내려서 퀵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간신히 왔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세요.”

    “고마워요. 원 대표님.”

    김선우 매니저는 내게 인사를 하고 지수연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큰 사고라며? 지수연 배우님 다친 건 아니지? 괜찮아?”

    지수연한테 사고가 났나?

    지수연이 나를 배신한 것과 별개로 사람이 교통사고 현장에 있다는데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쉽사리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화 통화를 지켜봤다.

    “그래? 다행이네. 그냥 놀라기만 한 거라는 거지? 그럼, 지금 올 수 있겠어? 뭐라고? 벌써 구급차 타고 병원에 가고 있다고?”

    김선우 매니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늘 수연이 신인상 후보에 축하 무대까지 있는데 늦지 않게 올 수 있겠어?”

    나뿐만 아니라 연기대상 AD도 김선우 매니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때 김선우 매니저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다행이네. 그래. 늦지 말고 빨리 와라. 보니까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는 퀵 오토바이 타고 왔다더라. 너도 늦을 거 같으면 퀵 불러. 네가 고생 좀 해라.”

    전화를 끊은 김선우의 매니저가 AD를 돌아보며 사정을 설명했다.

    AD는 늦으면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사라졌다.

    나도 자리로 가려고 뒤돌아서는 데 김선우 매니저가 나를 불러 세웠다.

    “고마워요. 원 대표님.”

    “아닙니다. 오늘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랄게요.”

    고개를 돌려 보니 서이렌과 빈선예도 우리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다.

    “서이렌 씨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오늘 연기대상이나 신경 써요. 이따 축하 공연도 떨지 말고 잘하고요. 이렌 씨가 강심장이라는 걸 잘 아니까 걱정이 좀 덜하긴 하네요.”

    서이렌이 빈선예와 나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제가 축하 공연을 어떻게 찢나 구경이나 하세요.”

    “아. 든든해. 우리 이렌 씨가 이런 성격이라서 난 좋더라. 오케이. 기대하고 있을게요.”

    빈선예가 웃으며 서이렌에게 사랑의 총알을 쐈다.

    * * *

    지수연의 일이 걱정됐던 나는 공개홀에서 나와 복도에 섰다.

    핸드폰을 들고 강진석 팀장의 전화번호를 찾는데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에요.”

    내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나는 그대로 온몸이 굳은 채 고개를 들었다.

    이자현이 내 눈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자현 배우님.”

    “제가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원세강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배우님이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아까 로비에서 나랑 눈 마주치지 않았나요? 못 봤다고 거짓말하기엔 지금 대표님 눈동자가 너무 떨리는데요?”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KBC 연기대상 시상하러 왔어요?”

    “예. MBS로 안 가고 여기로 왔더니 MBS에서 난리가 났다더군요. 다시는 MBS에서 드라마 못 할 거라고 드라마 국장이 엄포를 놨대요. 역시 그때 대표님 말씀 들었어야 했나 봐요.”

    이자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우리가 좋게 헤어진 건 아니지만 원수처럼 지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차기작은 왜 안 나와요? 일 년을 통으로 쉬었죠?”

    “대신 CF는 많이 찍었죠.”

    “차기작은 정해졌어요? 비밀이면 굳이 말 안 해 줘도 되고요.”

    “원 대표님 정도면 시장에 나온 대본은 다 받아 보실 거잖아요. 지금 내가 할 만한 대본이 없어요.”

    그녀의 말이 맞다.

    이자현 같은 톱스타가 들어갈 만한 대본이 씨가 마른 건 사실이다.

    남자 배우를 뒷받침하는 역할이나 나이대가 맞지 않거나 그녀가 하기엔 급이 맞지 않는 대본들뿐일 거다.

    하지만 내가 이자현과 함께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나는 TOP 사장이 되면 제일 먼저 제작에 손을 댈 생각이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찍어야 한다.

    여주 원톱물이 인기가 없어서 안 찍는 걸까?

    지금까지 여주 원톱물로 성공한 예를 들어 보라면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영화 쪽은 흥행이 보장된 남자 배우들 위주로 돌아가고 있다.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때 이자현이 쑥 치고 들어왔다.

    “서이렌은 어때요?”

    나는 여기서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자현 앞에서 서이렌을 추켜세우고 싶지 않았다.

    “신인 시절의 이자현 배우님을 보는 것 같아요. 자현 배우님처럼 열심히 합니다.”

    내 말을 들은 이자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여전하시네요.”

    “예?”

    “내가 밉지도 않아요? 그렇게 모질게 내쳤는데?”

    미웠다.

    한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거 같았고 이자현과 LOK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가 끼어드니 미워할 시간이 아까웠다.

    당장 죽을 날을 받아 놨는데 내 귀한 시간을 증오로 허비하면 아깝지 않은가?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뇨. 난 이자현 배우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 마세요.”

    “대표님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이자현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굳게 닫았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내가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려는데, 이자현의 뒤로 누군가 나타났다.

    마치 오늘 상을 받으러 나온 스타처럼 화려하게 꾸민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TOP 엔터의 신임 사장인 한지욱이었다.TOP 엔터의 신임 사장인 한지욱이다.

    LOK 한성제 사장의 외아들이자 나를 밀어내고 TOP 사장 자리를 채간 그를 보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까는 미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건 이자현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나 보다.

    한지욱의 얼굴을 보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

    한지욱은 이자현의 옆에 붙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나도 자존심이 있기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이자현이 입을 열었다.

    “이분은 TOP 엔터 한지욱 대표님이고. 이쪽은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세요. 서로 노려보기만 하지 말고 인사하세요.”

    이자현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원세강입니다.”

    “난 알고 있죠? 한지욱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방학 때 한국에 오면 LOK에 자주 놀러 오셨잖습니까?”

    “그때는 원 팀장이었는데 출세하셨네. 팀장에서 단번에 대표가 되셨어. 대표가 되니까 어때? 좋은가요?”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린놈이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이상한 어투로 내 신경을 긁었다.

    나는 지난 십 년 동안 매니저 일을 하며 갈고 닦은 강철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웃으며 답했다.

    “그때와 똑같습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오늘 서이렌 씨가 신인상 탈 거 같던데 미리 축하해요.”

    한지욱이 이자현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 배우는 이제 대기실로 가지?”

    이자현과 한지욱이 뒤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잠시만요.”

    내가 불러 놓고도 너무 놀라서 입을 굳게 닿았다.

    내가 왜 그랬지?

    이자현과 한지욱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말하자.

    나는 한지욱에게 걸어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자현 배우님 차기작 고르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한지욱은 갑작스러운 내 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없다면 만드세요.”

    “뭐라고요?”

    한지욱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자현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생각에 잠겼다.

    “한성제 대표님께서도 언젠가는 LOK가 직접 제작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실 겁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제야 한지욱의 눈에서 물음표가 사라졌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기분 나쁜지 얼굴을 구겼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할 말을 모두 마치고 뒤돌아섰다.

    * * *

    공개홀로 돌아온 나는 빈선예와 이락이 앉아 있는 객석으로 갔다.

    그런데 나를 보는 빈선예와 이락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 물음에 빈선예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대표님 어떻게 해요? 지수연이 안 왔어요. 시간 내에 도착 못 할 거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그것 때문에 난리 났어요. 지수연이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고 거의 메인이었거든요. 지금 반주 틀고 배우들이 지수연 목소리에 립싱크한다고 결정이 난 모양인데. 가뜩이나 오글거리는 축하 공연이 더 오글거리게 생겼어요.”

    “그냥 그렇게 진행한답니까?”

    “그럼, 어떻게요. 노래할 배우가 안 왔는데.”

    나는 놀란 눈으로 무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네킹 테이블에 앉아 있어야 할 서이렌이 보이지 않았다.

    “이렌 님은 지금 무대 뒤에 가 있어요.”

    나는 이락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시게요?”

    “사정 좀 알아보고 올게요.”

    * * *

    그 시각 무대 뒤에선 축하 무대를 준비한 신인 배우들은 옷을 갈아입은 채, 굳은 얼굴로 PD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쳤다.

    놀란 서이렌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노래는 누가 해요?”

    “그냥 노래 틀어 줄 거래요. 우린 입만 뻥긋하면 돼요.”

    “그럼, 피아노도 없는 거네요.”

    “예.”

    서이렌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사실상 이번 축하 무대는 KBC에서 지수연을 돋보이게 하려고 판을 깔아 준 거나 다름이 없다.

    지수연 없이 그냥 춤만 춘다면 과거의 연기대상 축하 무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렌 씨. 이 노래 부를 수 있죠?”

    “그럼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노래는 잘 불러요?”

    서이렌이 두 눈을 끔벅이며 나를 쳐다봤다.

    “얼마나 잘하길 원하시는데요?”

    “서이렌 씨 본래 이름만큼?”

    내 말에 서이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이렌이란 이름값은 하죠.”

    자신만만한 서이렌을 보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는 칠 수 있겠어요?”

    “연습할 때 지수연 씨가 치는 거 다 봤어요. 제 머릿속에 완벽하게 악보가 들어가 있어요.”

    나는 확신에 찬 서이렌의 눈빛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때 PD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야! 누가 관계자 말고 무대 뒤에 사람 들여보냈어?”

    PD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AD가 나를 보고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거기 나가세요.”

    나는 PD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서이렌 씨가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뭐?”

    “피아노도 칠 수 있습니다.”

    “뭐라는 거야?”

    나는 서이렌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금 노래 불러 봐요.”

    “여기서요?”

    “예. 지금 당장.”

    서이렌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작고 귀여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서이렌의 사람 홀리는 목소리가 무대 뒤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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